1/13/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2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자 Kowing God's Point Of View

마가복음 8:31-33

오늘 말씀의 요절(要節)은 33절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썩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이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Get away from me, Satan! You are seeing things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not from God's (사탄아 썩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단순히 사람의 관점에서만 보는구나).”

‘인간적인 관점 (a human point of view)’이란 보통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 베드로가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했더라면 그 같은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God’s Point of View)’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갖게 되는 관점으로, '성경의 관점 (a point of the Bible)이라고도 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삼 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배웠습니다. 말씀도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도 제자들은 딴 생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매우 긴장된 얼굴로 아무 말씀도 없이 제자들보다 앞서서 가셨습니다 (누가복음 9:51)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그 때 뒤따라 가던 제자들은 놀랍고 두려울 정도였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마가복음 10:32). 이런 상황에서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짖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s he talked about this openly with his disciples,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primand him for saying such things①.” / ①Or began to correct him  ‘reprimand’라는 말은 우리 말로 ‘견책하다’ ‘꾸짖다’라는 뜻입니다. 영어 사전에는 이 말에 ‘to reprove or rebuke severely, especially in a formal way (공식적으로 심하게 꾸짖다)’라는 뜻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람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나 자기 목숨 아까운 줄 압니다. 이럴 때 사랑하는 제자가 앞을 가로 막습니다. 만일 그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야, 베드로, 역시 너만은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고맙다, 네가 그런 말을 해 줘서..... 그렇지? 꼭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다른 방법이 있겠지?”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가는 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제자의 만류를 사탄의 유혹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So we have stopped evaluating others from a human point of view. At one time we thought of Christ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How differently we know him now)!” (고린도후서 5:16)

그리스도를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사울 (바울)의 행동에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께 그럴듯한 스펙 (specification)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이 어느 학교를 나왔습니까? 또 그 집안 (부모)은 어떤 집안입니까? 그가 남긴 업적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책 한 권도 제대로 쓰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쓰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은 지 30-40년이 흐른 후에 그의 제자들이 쓴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변두리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람이 갈릴리 부랑배들을 끌고 다니면서 율법의 규정에 어긋난 말과 행동을 하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닙니다. 사울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총대를 메기를 자청합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남자든 여자든 닥치는 대로 끌어 내어 감옥에 넣었습니다.” (사도행전 8:3)

이런 사람이, 관점이 바뀌니까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십시오. “사실 육체적으로 보면 나 스스로를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조건을 더욱 많이 갖춘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내 인생의 안내자 역할을 하여, 나는 율법을 가장 엄격히 지키는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너무나 열심이었으므로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하였습니다.....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4-8) “I was so zealous that I harshly persecuted the church. And as for righteousness, I obeyed the law without fault. I once thought these things were valuable, but now I consider them worthless because of what Christ has done. Yes, everything else is worthless when compared with the infinite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관점이 바뀌니까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박해자 (persecutor)였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옹호하는 사람 (apologist)이 됩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사울의 변화를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울 (바울)을 배신자로 낙인을 찍고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가서 핍박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시대에 사울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쓸 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하나님은 드라마틱하게도 사울 같은 사람을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 (instrument)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15). 여러분이 좋아하는 시편 중에 42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1절) 시편은 시(時)이면서 동시에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고라의 자손들 (the descendants of Korah)입니다. 고라는 광야생활 중에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땅이 갈라져 빠져 죽은 사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고라의 자손들을 살려 놓으셨습니다 (민수기 26:11). 드라마틱하게도 하나님은 고라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임무를 맡기신 것입니다.

Brooks Atkinson 이란 사람이 관점이 바뀌는 일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most fatal illusion is the settled point of view. Since life is growth and motion, a fixed point of view kills anybody who has one (가장 치명적인 환상은 고정된 관점이다. 우리의 삶은 유동적이며 계속 성장하기 때문에 고정된 관점은 누구든 그것을 가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또, Toba Beta라는 사람은 “We begin to learn wisely when we're willing to see world from other people's perspective (우리가 기꺼이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부터 세상을 보려고 할 때 비로소 지혜롭게 배울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Understanding is not absolutely final. What's now right could be wrong later (이해는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지금은 옳은 것이라도 나중에는 틀릴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의 관점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 사람의 관점이 바뀌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 정도로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관점을 바꾸기 위해서 자기 말을 많이 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말을 많이 들으려고 노력했더니 전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점은 노력을 통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관점이 바뀌는 일을 성경에서는 회심(回心)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conversion’입니다. 사전에는 ‘conversion’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 change of attitude, emotion, or viewpoint from one of indifference, disbelief, or antagonism to one of acceptance, faith, or enthusiastic support, especially such a change in a person's religion (무관심, 불신, 반대로부터 수용, 믿음, 열성적인 후원으로 태도, 감정, 혹은 관점이 바뀌는 것이다. 특별히 이런 변화는 한 사람의 종교에서 일어난다).”

사울이 회심해서 관점이 바뀌는 말씀이 사도행전 9장에 나와 있습니다. 사울의 관점은 자신의 노력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의 삶에 개입해 들어오심으로 일어났습니다. 2018년 1월 4일 밤에 눈보라가 치고 강풍이 부는 날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 교회 뾰족탑 (steeple, 종탑)이 강풍에 흔들린다는 신고를 받고, 안전상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관계자들이 뾰족탑을 제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Local TV에서는 이 뉴스를 ‘Divine Intervention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위험한 상황을 아시고 미리 큰 사고를 막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Divine Intervention’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하게 해 주신 경우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점이 바뀌는 것은 ‘Divine Intervention’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만큼 한 사람의 관점이 바뀌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입니다. 우리의 관점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 같은 예수님의 제자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만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관점의 변화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일이 있습니다. 관점의 변화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예외 없이 ‘인간적인 관점’을 버리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적인 관점’이 모두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 묻습니다. “빌립, 이 사람들이 먹을 빵을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 그 때 빌립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빵을 한 입씩만 먹는다고 해도, 그 빵을 사려면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200데나리온은 약 20,000불 정도 되는 큰 돈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빌립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빌립의 의견을 따랐다면 5,000명을 먹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2019년 한 해를 ‘인간적인 관점’만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이 좌절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계속 읽어가면 금방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것은 빌립을 떠보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을 작정하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6:6)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 그렇게 물으신 것은 ‘인간적인 관점’의 한계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인간적인 관점’만 가지고 모든 일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인간적인 관점’을 무시하거나 비웃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는 (overcome)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불가능한 일이라고 좌절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믿는 사람들은 “Humanly speaking, it is impossible. But with God everything is possible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마태복음 19:26)” 이 말씀을 믿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때 케임브리지에 있는 Museum of Science의 마케팅 슬로건 “Museum of Science, where your horizons broaden (뮤지엄 오브 사이언스, 당신의 시야(視野)가 넓어집니다)”였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던 것들을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큰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1/6/2019 | 새해엔 이렇게 믿자 1

생각과 태도를 바꾸자 Renewing Your Thoughts And Attitudes

에베소서 4:20-24

오늘은 2019년 새해 첫 주일 예배입니다. 여러분, 고사 성어 중에 ‘일신일신우일신 (日新日新又日新)’이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직역하면, 날마다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롭다는 뜻입니다. 서경(書經)의상서(商書)편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중국 은 (殷)나라의 탕 (湯)이라는 덕망이 높은 왕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세숫대야에 이 말을 새겨 놓고 날마다 세수할 때마다 새로워지려고 다짐함으로써 현실에 만족하려고 하는 자신을 경계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각오를 새롭게 함으로써 과연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매년 이맘 때가 되면 누구나 새로워지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새해 결심한 것 (resolution)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목표를 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면 마음이 해이해져서 결심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상 (status quo)에 만족하려고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 새로워지는 것이 우리의 결심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구나!” 하고 경험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은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일과 새로워지는 일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오늘 읽은 에베소서 4:20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at isn't what you learned about Christ.”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에베소 (Ephesus)는 지금의 터키 남서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큰 도시입니다. 지금은 ‘셀주크 (Selcuk)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에베소’라는 이름 자체가 ‘욕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을 연결해 주는 교통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항구 도시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에는 유명한 풍요의 여신 ‘아데미 (Artemis) 신전’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선교에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에베소에 무려 2년을 머물면서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많은 신자들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세 달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토론도 하고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져서 믿지 않고 오히려 군중들 앞에서 ‘도’를 욕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떠나 신자들을 데리고 두란노 학원으로 가서 날마다 사람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그 일은 2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시아 지방의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9:8-10)

바울의 에베소 선교에 대한 애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이자 동역자인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러 교회를 돌보게 합니다 (디모데전서 1:3). 에베소에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 교사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에베소 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성경 (편지)가 적어도 3권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와 후서,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에베소 교회를 생각하면서 쓴 편지입니다. 사도행전까지 하면 모두 4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삶이 쉽게 변화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진정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또 진리 되신 그분 안에 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21절)

오늘 우리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변화의 삶에 대한 문제를 말씀드리기 전에, 한가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변화의 삶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는데도 그 사람의 삶이 변화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생각과 태도를 바꾸자 (Renewing Your Thoughts And Attitudes)”입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변화(變化)’는 형식적인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태도가 바뀌는 ‘근본적인 변화 (a radical transformation)’입니다. 생각하는 법 자체가 바뀌어야 하고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져야 합니다. ‘paradigm shift’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변화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들은 수학에서 말하는 예제(例題, example)와도 같습니다. 예제를 잘 이해해야 예제를 응용해서 더 어려운 문제들을 풀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 이야기’가 바로 예제와 같은 말씀입니다. ‘삭개오 이야기’를 잘 이해하면 변화의 삶에 대한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삭개오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했고 만나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에게 그런 마음이 없었더라면 삭개오의 삶은 변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 (chief tax collector)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원했습니다. 이 사실은 그가 많은 사람들 틈에서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려고 했다는 말씀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자신이 변화의 삶을 원해야 합니다. 그 다음, 변화의 삶의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변화되기 전 우리의 ‘자아’를 ‘옛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old sinful nature (예전의 죄된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옛 사람’은 ‘한없는 욕망으로 점점 더 눈이 어두워져 더 악하고 더러운 것을 좋아한다 (It is corrupted by lust and deception)’고 했습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이 ‘옛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 (성령께서 당신의 생각과 태도를 새롭게 하도록 허락하십시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 속에서 여러분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도록 하려면 먼저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어떤 일을 원하시는 지, 어떤 일을 좋아하시는 지, 알아서 그 일들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속에서 성령께서 활발하게 (actively)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John Piper 목사님이 로마서 12:2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새로워지려면 다음의 4가지를 소원해야 한다. 첫째로, 세상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고, 둘째로, 당신의 속에서부터 변화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고, 셋째로,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 하고, 넷째로, 당신의 삶 전부가 영적 예배의 삶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보다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다.”

우리 속에 있는 ‘옛 사람’은 우리의 죄된 본성을 자극합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그것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옛 사람’은 우리의 욕망 (lust)을 자극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속에 이런 것을 기뻐하는 ‘옛 사람’이 살아 있는 이상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옛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새 사람이 되는 일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생각과 태도를 바꾸어 주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동양의 성현 중에 노자 (Lao Tzu)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Warring States period, 770-221 B.C.) 사람으로 도가(道家)를 완성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When I let go of what I am, I become what I might be (내구 누구인지를 놓아 버릴 때 내가 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습니다).” 또 Joseph Campbell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We must be willing to get rid of the life we’ve planned, so as to have the life that is waiting for us. The old skin has to be shed before the new one can come (새 피부가 생기려면 늙은 피부가 떨어져 나가야 하는 것과 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계획한 삶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어떻게 우리를 버릴 수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 Put on your new nature (성령께서 당신의 생각과 태도를 새롭게 하도록 허락하고, 새로운 본성을 입으라)”라고 말합니다.

끝으로, 디이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라는 목사를 소개함으로써 새로운 본성을 입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본회퍼는 히틀러가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세계를 공포 속에 몰아 넣고,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을 때 살았던 독일 고백교회 (The Confessing Church)의 목사였습니다. 그 때 독일의 교회들은 히틀러의 그런 만행을 보고 침묵하거나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고백교회의 목사들은 히틀러의 독재와 만행에 항거했습니다. 그 때 본회퍼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신학자였습니다. 그가 21살에 베를린 대학에서 쓴 박사학위 논문 ‘성도의 교제 (Communion of Saints)’는 당시 신학계의 거장이었던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스위스)로부터 신학계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들었습니다. 그의 신학적인 재능을 아깝게 여긴 미국의 신학자들이 그를 미국으로 빼돌렸습니다. 그를 환영하는 만찬이 열린 자리에서 본회퍼는 다시 독일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나중에 조국이 평화를 되찾았을 때 당신은 그 때 어디 있었느냐는 질문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독일로 돌아온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합니다. 2차 대전이 끝나기 4개월 전입니다. 그가 옥중에서 쓴 글들이 대부분 알려져 책으로 나왔지만, 후에 본회퍼가 자기 애인에게 보냈던 시 한 편이 알려져, 그 시에 곡을 붙인 노래가 사람들에게 불리고 있습니다. 그 시의 제목은 ‘선한 능력으로 (Von Guten Mächten)’입니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한 능력이 자기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 속에서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새해를 시작하고 싶다는 생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마음과 생각이 완전히 바뀐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죽은 지 74년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 속에 살아서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선한 능력으로>

선한 능력에 언제나 고요하게 둘러싸여서, 보호받고 위로 받는 이 놀라움 속에, 여러분과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하고,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낮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의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옛 것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어두운 날들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우리를 누르지만, 아, 주님! 내 몰려 버린 우리의 영혼에게 당신께서 준비해 놓으신 구원을 주십시오.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의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12/31/2018 | 송구영신예배 메시지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Overwhelming Victory Is Ours

로마서 8:28-37

오늘 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은 로마서 8:28-37에 있는 말씀입니다. 교회생활을 좀 하고, 믿음이 좀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오늘 말씀이 매우 익숙한 말씀입니다. 설교 시간이나 성경공부 시간에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이고, 의미가 있는 말씀인지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ppt1첫째로,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나에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참을 수 있고, 기다릴 수 있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견딜 힘이 없습니다.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ppt2우리는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알고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그의 아들을 본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29절). 그 아들을 본받게 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서 그의 아들과 형제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 so that his Son would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결코 아무 생각 없이 교회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예수님과 형제가 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일입니다.

둘째로,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ppt3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1절) “If God is for us, who can ever be against us?” 성경에는 이와 같은 뜻의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ppt4“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144:1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46:5)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33:12) 또 시편 118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가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나를 돕는 분이십니다......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고관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6-9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곧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신다면 아무도 우리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세상에 겁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한자 말에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말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말할 때는 우리가 진리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불의한 일에 개입된 사람이 하나님께 피한다고 하고, 하나님이 나의 편이라고 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아전인수격으로 성경 말씀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런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리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불의한 일에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가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만들어 비텐베르크 (Wittenberg) 대학의 교회 게시판에 붙인 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교황의 지위와 권력에 도전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습니다. 루터가 자기 주장을 철회하지 않자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국회에 소환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관습으로 볼 때 루터는 화형(火刑)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 루터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ppt5“Here I stand. I can do no other. God help me. Amen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루터가 진리 편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루터 편에 서 계셨고, 루터를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도움으로 삼고 인생을 살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언제나 진리 편에 서 계십시오. 불의한 일에 가담하지 말고 늘 옳은 편에 서 계십시오. 당장에 눈에 보이는 이익이 없어도 진리 편에 서 있으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ppt6이 말씀 속에, 나의 삶을 해석할 수 있는 성경적인 ‘패러다임 (paradigm)’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어떤 일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시스템, 혹은 틀 (frame)을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 나름의 ‘paradigm’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도 인간의 불행을 해석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 있습니다. 창세기를 읽어 보면, 그 속에 요셉이라는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환하게 들여다 보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인간의 고난을 해석하는 해석의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8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And we know that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우리에게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기쁜 일도 일어나고, 슬픈 일도 일어나고, 불행한 일도 일어납니다. 기쁜 일은 일어나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당황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에 빠집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면 저 역시 절망할 것입니다. 이 때 자신의 불행을 해석할 ‘패러다임’이 없다면, 우리는 불행을 이길 수 없습니다. 특히 청년들이 나에게 왜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지 해석하고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면, 어쩌면 자기 삶을 포기하게 되고, 자기 삶을 송두리째 망쳐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그저 어쩌다가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에 의미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도록 하십니다. 다시 28절 말씀을 보십시오.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유명한 예레미야 29:11-13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ppt7“너희를 위해 세운 나의 계획은 너희에게 재앙이 아닌 희망이 넘치는 미래를 주는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 내 삶에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불행한 일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하고 위로합니다. 오늘 말씀은 결코 그런 값싼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수를 놓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가지 색실들을 이용하여 수를 놓습니다. 다양한 색실들을 이용하면 더 멋진 수를 놓을 수 있습니다. 광부들이 사는 마을에서 불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갱이 무너지는 바람에 많은 광부들이 죽은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불행을 당한 가족들을 위로하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무슨 말도 불행을 당한 가족들을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그 마을에 왔습니다. 그 목사님은 “여러분, 지금 제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 아름답게 수를 놓은 북마크입니다. 여러분 여기를 보십시오” 하면서 북마크 뒷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저리 색실들이 얽혀 있었습니다. “여러분, 보다시피 색실들이 얽혀 있어서 뒷면에 무엇이 수놓아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이 상황이 바로 이렇습니다. 왜 나에게, 우리 가정에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뒷면을 보십시오” 하면서 북마크의 뒷면을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 “God is love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수놓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목사님의 말에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오래 전에 어느 글에서 읽었는데, 오늘 마침 생각이 나서 여러분과 같이 나누었습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성공이나 실패나 궂은 일이나 좋은 일이나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한 올의 실이 되어 색색가지의 아름다운 수를 놓습니다. 수를 놓는데 여러 가지 색실이 필요합니다. 빨강, 노랑, 파랑, 이런 색실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검은 색실도 필요하고, 어둡고 칙칙한 색실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양한 색깔의 실을 가지고 그분이 원하는 수를 놓습니다. 뒷면을 볼 때는 색실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어서 앞면에 무슨 수가 놓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거기에 아름다운 수가 놓여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간,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나의 삶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 우리는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성경적인 해석의 ‘패러다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은 그 일들을 사용하셔서 선한 일을 이루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한 해를 살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다 함께 31절 말씀을 읽어 볼까요? ppt8“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No, despite all these things, overwhelming victory is ours through Christ, who loved us).” (37절)


12/30/2018 | 송년예배 메시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다 Unless You Repent, You Will Perish

누가복음 13:1-9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본문 말씀을 문맥(文脈)의 상황(context) 속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세 개의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었다는 섬찟한 이야기이고, 그 다음은 실로암 타워가 무너져서 열 여덟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무화과 나무 한 그루를 포도원에 옮겨 심었는데, 삼 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않아 주인이 실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 개의 이야기가 각각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한 가지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 (3, 5절)

예수님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선동적 (煽動的)인 기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갈릴리에서 폭동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유대의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본보기로 갈릴리 사람 몇 명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러면 그 때 희생된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고, 실로암의 타워가 갑자기 무너져서 열 여덟 명이 죽었습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오늘 우리 주변에도 엄청난 재난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진과 쓰나미 (tsunami)가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2005년에 파키스탄과 인도의 접경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나 엄청난 사상자가 났습니다. 그보다 더 엄청난 재난이 2004년에는 이보다 더 끔찍한 일어났습니다. 수마트라 앞 바다에서 쓰나미 (tsunami)가 일어나 인도양 연안의 여러 나라에 밀어닥쳐서 무려 십 육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습니다. 그 때 그렇게 죽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크리스마스를 경건하게 지내지 않고, 휴양지를 찾아 다니며 자신의 쾌락을 좇던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이렇게 이런 말을 했다가 두고두고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너희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줄 아느냐” 아니다!” (2, 4절) “No, and I tell you again that unless you repent, you will perish, too (그렇지 않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렇게 망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엄청난 재난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지, 과연 지금 식으로 이렇게 살아가면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자신의 삶을 반성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 ‘반면교사 (反面敎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불행한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면서 compassion을 가짐과 동시에 지금의 나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습니다. “Then Jesus told this story.” (5절)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이야기 역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왜 이 사람은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었을까요? 몇 년 전에 유행하던 “당연하지!” 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상대방은 “당연하지!”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에는 포도를 심어야지.” “당연하지!” “그러면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은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당연하지!” “이 사람은 무화과 열매를 기대했을 텐데?” “당연하지!”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가 삼 년이나 열매를 맺지 못했으니, 그 사람이 화가 났겠네?” “당연하지!” “이 이야기가 한 해를 보내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지 않을까?” “당연하지!”

무화과나무는 보통은 그냥 길 가에 심겨 있는 나무입니다. 이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심기에 된 것은 그 포도원 농장 주인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와 여러분이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지, 왜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존 뉴톤 (John Newton, 1725-1807) 같은 목사님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라고 찬송시를 썼습니다. 한 때는 노예선의 선원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존 뉴톤 목사님이 그 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그 목사님이 인류의 역사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 잘 모릅니다. 존 뉴톤 목사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 중에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1833)라는 영국의 정치인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영국 국회에서 노예제도법을 철폐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윌리엄 윌버포스가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던 사람이 바로 존 뉴톤 목사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존 뉴톤 목사님은 이렇게 주변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고, 인류의 삶을 바꾸어 놓는데 공헌했습니다.

그냥 길거리 아무 데서나 자라야 할 그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으로 옮겨 심긴 것처럼, 오늘 우리도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로마서 5:2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또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주인은 무화과나무에게 열매를 기대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A man planted a fig tree in his garden and came again and again to see if there was any fruit on it, but he was always disappointed (자기 정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옮겨 심은 이 사람은 열매가 열렸는지 보려고 여러 번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실망했습니다).” (6절)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열매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0-21)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한복음 15:8)

열매를 맺고 안 맺는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열매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말에 책임(責任)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맡겨진 임무나 의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responsibility’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응답할 수 있는 (respond) 능력 (ability)’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올바로 응답하는 사람이 책임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116편에 ‘구원받은 자의 감사의 찬송 시’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그 시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How can I repay the LORD for all his goodness to me)?” (12절) 하나님의 은혜를 이만큼 받았으면 그 은혜에 respond (응답)하고, 그 은혜에 repay (보답)하는 사람, 이 사람이 책임 있는 사람입니다.

한 해를 마지막으로 보내면서 회개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책임 있는 삶을 살지 못한 우리의 잘못을 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올바로 respond하지 못하고, 올바로 repay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을 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5:5 말씀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다 (Master, we've worked hard all night and haven't caught anything. But because you say so, I will let down the nets).”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어떻게 시몬 (베드로)이라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에 이렇게 응답했는지 그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것은 오랜 그의 경험에서 나온 어부의 지혜였습니다. 그런데, 시몬이라는 사람은 그날 아침에 자기의 경험을 송두리 채 뒤엎어 버렸습니다.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고 말씀하시는 그 분 앞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알아왔던 경험과 지식을 송두리 채 부정(否定)해 버린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발명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착상에서 나오는데, 이런 아이디어는 기존의 발상을 깨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이상하게도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창의적인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우리의 믿음생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늘 해왔던 대로, 늘 자기가 믿음생활 해 왔던 방식대로, 그렇게 믿음생활 하는 사람에게는 한 단계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만일 베드로가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 경험이나 자기 상식을 고집했더라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But because you say so, I will let down the nets.” ‘but (그러나, 하지만)’ 이 한마디로 자기를 부정했을 때, 베드로는 자기 앞에 서 계시는 분이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지금까지 믿어왔던 자기 방식을 내려 놓지 않는 사람은 결코 창의적인 믿음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까지 믿어왔던 방식대로 믿음생활 고집한다면, 또 다시 우리는 열매 없는 믿음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이런 방식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믿음생활에도 창의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에 실망한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베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7절) 우리 말에 무용지물(無用之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단순히 무용지물이 아닙니다. 그냥 쓸모가 없는 나무가 아니라 자리만 차지하고, 땅만 버리는 해를 끼치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한 나무입니다. 한번은 윌리엄 버클리(William Barclay)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들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당신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The most searching question we can be asked is, ‘Of what use were you in this world?')." ‘searching question’이란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묻는 중요한 질문을 말합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자신들에게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었는가?” “나는 교회에 얼마나 유익한 사람이었는가?”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얼마나 유익한 사람이었는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빚을 갚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두 바다가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바다이고, 하나는 사해 바다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물이 맑습니다. 그 바다에 많은 고기가 삽니다. 그러나, 사해 바다는 아무 것도 살지 않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두 바다의 차이점은 한가지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끊임없이 물을 받아 아래로 흘려 보냅니다. 그러나 사해 바다는 지형상 물이 흘러 나갈 수 없는 바다입니다. 그 결과 하나는 생명의 바다가 되고, 하나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책임 있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열매가 맺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런 사람들은 죽음의 바다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놔 두십시오. 제가 나무 주위에 고랑을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만일 내년에 열매를 맺으면 놔 두시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베어 버리십시오.” (8-9절) 이 과원지기 덕분에 이 무화과 나무는 다시 일년 동안 생명을 연장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서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중보 하시는 (intercede) 분이 계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런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울어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렇게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은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아파하는 사람이 있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 (Reiner Maria Rilke, 1875-1926, 오스트리아)의 시 ‘엄숙한 시간 (Ernste Stunde)’이 바로 그런 시입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웃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까닭 없이 웃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웃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걷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정처 없이 걷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까닭 없이 죽어가는 그 사람은 나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오늘 한 해 마지막 예배를 드리는 시간, 이 시간이 우리에게는 ‘엄숙한 시간’입니다. 한 해 동안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 기도 덕분에 또 한 해를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식으로 계속 살지 않겠다는,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며 책임 있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할 때입니다. 


12/23/2018 | 성탄절 메시지 2

베들레헴 떡집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Who Was Born In Bethlehem, The House Of Bread

누가복음 2:1-14

세계 각 나라의 재미 있는 크리스마스 인사입니다.

영어로는 메리 크리스마스 (Merry Christmas)
브라질어로는 펠리쓰 나딸 (Feliz Natal)
헝가리어로는 볼록 카락소니 (Boldog Karacsony)
이탈리아어로는 부옹 바딸리 (Buon Batale)
스페인어로는 펠리쓰 나비닷 (Feliz Navidad)
독일어로는 프뢸리히 베인아크텐 (Frohliche Weinachten)
스웨덴어로는 글래드 율 (Glad Yul)
프랑스어로는 즈와이유 노엘 (Joyeux Noel)
희랍어로는 칼라 크리스토게나 (Kala Christougena)
중국어로는 솅탄 쿠와일러 (Sheng Tan Kuailoh)
일본어로는 메리 구리수마수
러시아어로는 스로체스토봄 크리스토빔 (Srozhestvom Khristovym)
필리핀 따갈어로는 말리가양 빠스코 (Maligayang Pasko)
멕시코어로는 펠리츠 나비대드 (Feliz Navidad)
베트남어로는 니언지엡 노엘 쭉 지앙신 부이베에 (nhan dip noel chuc giangsinh vuive)
태국어로는 쓱 싹완 크릿쓰마아쓰 (ssuk ssan oan Christmas)
체코어로는 베셀레 바노체 (Vesele Vanoce!)
미얀마어로는 뾰쉰 차미엣바세 (Pyawshwen chanmyeitbazay)
한국어로는 메리 크리스마스 혹은 기쁜 성탄절 되세요!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로마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Augustus)였습니다. 그는 BC 27-AD 14년까지 무려 41년 동안 로마제국의 황제로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서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였지만, 원로원과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통치 시대를 ‘로마의 평화 (Pax Romana)’라고 부를 만큼 로마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세계 최강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세금제도를 개선했고, 넓은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도로망을 구축하여 ‘모든 길을 로마로!’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 제국에 인구 조사를 하도록 칙령 (decree)을 내렸습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는 시리아 지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 총독 구레뇨 (Quirinius)의 지시를 받아 자기들의 고향으로 가서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마을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리아라는 여자와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는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을 등록해야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기록한 완벽한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드라마가 재미 있으려면 구성이 치밀해야 합니다. 구성이 치밀하지 않고 엉성하면 보는 사람들이 “에이,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어?” 하면서 재미없어 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와 있는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얼마나 구성이 치밀합니까? 만일 그 때 아우구스투스가 인구 조사를 하라는 칙령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아기를 낳았을 것입니다. 또 칙령이 조금만 일찍 내렸거나 늦게 내렸다라면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아기를 낳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확한 타이밍에 인구 조사를 하라는 칙령을 내리도록 함으로써 요셉과 마리아는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예수님께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이토록 강조하고 있을까요? 제가 베들레헴 마을에 가 보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직선 거리로는 약 170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중간에 사마리아 땅을 지나다니지 않았던 그 당시의 관습을 감안한다면 약 230km 정도 거리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걸어서 간다면 약 10일은 가야 하는 거리에 있습니다.

보스턴 다운 타운에 있는 존 행콕 타워 (John Hancock Tower) 옆에 ‘삼위일체교회 (Trinity Church)’가 있습니다. 1877년에 지은 에피스코팔 쳐치 (Episcopal Church)입니다. 지은 지 오래 되었지만, 매우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교회로, 보스턴의 명소입니다. 이 교회는 특히 스테인드 글래스로 유명합니다. 화려하고, 정교하고, 아름답고, 예술적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 교회가 유명한 것은 이 교회에 교구 목사 (the rector)로 있었던 필립스 브룩스 (Philips Brooks, 1835-1893)라는 목사님 때문입니다. 필립스 브룩스 목사님은 교육자로서도 유명해서 앤도버에 있는 명문 ‘Books School’을 세우신 분입니다. 필립스 브룩스 목사님은 탁월한 설교자로서 보스턴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브룩스 목사님이 한 달 간의 휴가를 얻어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갔습니다. 여기 저기 성지를 돌아보다가 12월 24일 저녁에,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 탄생교회 (Church of The Nativity)’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브룩스 목사님은 이 예배를 통해서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때가 1865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흘러 성탄절을 맞이한 브룩스 목사님은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부를 찬송가를 하나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교회에’서 받았던 감동을 가사로 옮겼습니다. 이 가사를 그 교회 올갠 반주자 레드너 (L. H. Redner)에게 주면서 어린이들이 부를 찬송이니까 쉽게 곡을 붙여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부탁을 받은 레드너는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곡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꿈 속에서 천사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고 이 곡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오 베들레헴 작은 골 너 잠들었느냐, 별들만 높이 빛나고 잠잠히 있으니 저 놀라운 빛 지금 캄캄한 이 밤에 온 하늘 두루 비춘 줄 너 어찌 모르나” 브룩스 목사님은 3년 전에 있었던 베들레헴의 감동을 기억하면서 미가 5:2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마을이지만 네게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지도자가 나를 위해 나올 것이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you, O Bethlehem Ephrathah, are only a small village among all the people of Judah. Yet a ruler of Israel will come from you.”

이 선지자의 예언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들어 있는 유다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 이 ‘베들레헴’에 밝은 빛이 비추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이 감동의 순간을 브룩스 목사님은 그렇게 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영토에 속한 모든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고향으로 가서 호적을 등록하라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이 있었고, 다윗 가문의 사람이었던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 갔고, 거기서 아들을 낳은 것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700년 전의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국의 인구를 조사해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여 제국을 부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통치자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원의 계획을 성취할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베들레헴 (Bethlehem)’은 유대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탄생하셨습니다. 메시아는 예루살렘이나 로마나 알렉산드리아 같은 큰 도시에서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좋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명성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메시아가 전혀 주목 받지 않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 (only a small village among all the people of Judah)’에서 탄생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은, ‘beth (house)’라는 말과 ‘lehem (bread)’이라는 말이 합해져서 ‘The House of Bread’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말로 하면 ‘떡집’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2,000년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두개골을 연구해서 얻은 데이터를 컴퓨터에 입력해서 이미지를 만들어내서 공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얼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진에 이런 설명이 붙었습니다. “조금도 특별할 것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 얼굴이어서 누구나 쉽게 말을 걸 수 있고, 친해질 수 있는 동네 아저씨 같은 얼굴이다.”

예수님께서 특별할 것이 없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 ‘떡집’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이 오히려 반갑지 않습니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의 친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이유는 자기 자신을 보통 사람들과 동일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귀신들렸어.’ 내가 와서 먹고 마시니,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을 봐! 탐욕이 많은 사람이야. 저 사람은 술꾼이야. 세리와 죄인의 친구야.’” (마태복음 11:18-19)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다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는 것이 증명된다 (But wisdom is shown to be right by its results).” (마태복음 11:19) 내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준 것이 잘 한 일이냐, 잘 못한 일이냐 하는 것은 그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빵을 먹고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귀족도, 가난한 사람도, 지위가 높은 사람도, 지위가 낮은 사람도 ‘빵’과 ‘떡’과 ‘밥’은 먹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면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영어 단어에 ‘available’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ready for use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at hand (옆에 있어서 손 쉽게 이용할 수 있는)’ ‘accessible (쉽게 다가 갈 수 있는)’ ‘of use (도움이 되는)’ 이런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베들레헴 ‘떡집’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 언제나 ‘available’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은 다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결단코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However, those the Father has given me will come to me, and I will never reject them).” (요한복음 6:37)

한 가지 더 ‘베들레헴’ ‘떡집’의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단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죽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을 주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요한복음 6:35, 48-51) 조금만 생각을 하면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생명의 빵을 먹는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의 빵을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빵을 먹고 밥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빵을 먹고 밥을 먹으면 그것이 소화되면서 나에게 힘을 공급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서 그것이 내 삶에서 실천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이 ‘인카네이션’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값싼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내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먹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는 만족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I am the bread of life. Whoever comes to me will never be hungry again. Whoever believes in me will never be thirsty." (요한복음 6:35)

“어찌하여 너희는 진정한 음식이 못 되는 것을 위해 돈을 쓰느냐? 어찌하여 만족시켜 주지도 못할 것을 위해 애쓰느냐?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영혼을 살찌우는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내게 와서 귀를 기울여라.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살 것이다. 내가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며, 다윗에게 약속한 복을 너희에게 주겠다 (Why spend your money on food that does not give you strength? Why pay for food that does you no good? Listen to me, and you will eat what is good. You will enjoy the finest food. Come to me with your ears wide open. Listen, and you will find life. I will make an everlasting covenant with you. I will give you all the unfailing love I promised to David).” (이사야 55:2-3)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에 이사야라는 사람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는 자기 백성들에게 전했던 말씀입니다.

이미 우리는 잘못된 음식을 많이 먹었고, 잘못된 음식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아무리 이것이 건강에 좋은 ‘natural food (자연산 식품)’라고, 이것이 ‘organic food (유기농 식품)’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목사의 심정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의 귀가 열려서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가 주는 빵을 먹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귀에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