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2024 | (부활절 세번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9 부활의 공동체 3 Community of Resurrection 3

고린도 전서 15:35-49

부활절 세번째 주일입니다. 보스턴에도 봄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땅속 깊이 심겨져 있던 씨가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듯 교우들의 삶에 하나님의 생기가 충만해 지기를 소망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견뎌야 할 때가 옵니다. 견디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이 지닌 강인함입니다. 땅속 깊이 심겨진 씨가 겨울을 견디고 다시 소생하듯이 인생의 모호한 시간을 지나는 이들과 꿈을 위해 현재의 시간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단비가 우리 안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씻어내기를 소망합니다. 몇천년전 고대 이집트 시대에 있었던 씨가 발견되어 싹을 띄우는데 성공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수천년 동안 생명을 품고 있던 씨앗의 강인함이 느껴집니다. 수천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딱딱한 껍질 안에 있던 생명이 충분한 환경조건을 만나니까 발아(germination) 되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부활의 몸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사실 부활을 살아내는 것은 현재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부활의 몸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만일 가능하다면 어떤 몸으로 부활하냐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35 ○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몸을 갖고 다시 온다는 거야?”

오늘 본문은 부활의 몸에 대해서 묻는 회의론자들을 향한 바울의 설명이며, 부활의 몸에 대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첫째, 성경은 인간의 몸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몸은 아무리 관리해도 시간이 지나면 약해지고 노화가 됩니다.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관리하고 노력해서 노화를  늦출 있을지 몰라도 근원적으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우리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받아들인다면 약해진 몸도 영광스런 일부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가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가고 있는 단단한 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중세시대 신학자들은 부활에 대해 육체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 간의 균형을 찾는 관심을 가졌습니다. 부류의 신학자들은 사도신경에 기록된 대로 부활이 신체의 실제 부활을 의미한다고 믿었고, 다른 신학자들은 영적인 부활을 강조하여, 부활은 영혼의 삶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며 몸의 부활보다는 영혼의 부활에 많은 중점을 두었습니다. 유대 랍비들 같은 경우에는 인간이 죽음에 처할 때에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육은 땅의 먼지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헬라 철학의 이분법적 사고 개념은 영과 육을 대립적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몸을 씨앗이 속에 심겨지는 하나의 그림과 죽은 몸이 무덤 속에 장사되는 하나의 그림을 오버랩시키며 설명합니다. 36절로 38절입니다. 36 어리석은 사람이여,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 아십니까? 그대가 땅에 씨앗을 뿌릴 , 씨앗이 죽지 않으면 싹이 돋아나지 않습니다. 37 그대가 씨앗을 뿌릴 때는 장차 이루어질 몸을 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씨앗을 심는 것뿐입니다. 밀이라든가 다른 여러 종류의 곡식 씨앗이 있지 않습니까? 3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씨앗에 합당한 몸을 주십니다. 그래서 각각 씨앗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고유한 몸을 받게 됩니다.

땅속에 심긴 씨가 새로운 형태로 변화되어 껍질을 찢고 새로운 생명을 밀어내듯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새로운 몸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비유는 영혼은 선하고 육은 무조건 악하다는 헬라 철학자들의 사상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몸을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창조의 대상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땅속에 심겨진 각각의 씨앗이 하나님의 주권적 디자인으로 인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생명이 나타나는 것처럼 부활의 몸도 각기 다른 고유한 몸을 받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39 육체라고 해서 모든 육체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육체가 있고, 동물들도 저마다 다른 육체가 있으며, 새들과 물고기들도 저마다 다른 육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씨가 종류대로 알맞는 형체로 디자인이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몸의 신비입니다. 자연속에 동물과 새들, 물고기들, 작은 개미 한마리도 하나님의 창조의 몸을 지녔습니다. 우리는 자연속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느끼고 하나님의 창조적 숨결을 깨닫게 될때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깊은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육체는 단백질로 구성된 몸을 의미합니다. 몸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새나 물고기든 피조물들의 몸은 죽고 썩을 몸이며, 유한한 몸이지만 각기 다른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몸에 대한 부정적 의미와 긍정적 의미의 구절들이 모두 있습니다. " 많은 육신에 따라 사는 사람은 오직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지만,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8:5) 라는 구절은 몸을 부정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자체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자체가 악하고 부정하다면 우리가 살면서 몸으로 섬기고 사랑하고 예배하는 모든 행위를 악하다고 규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우리의 섬김과 헌신이 그릇에 담겨질 때에 본질이 드러나고, 주의 사랑을 나타낼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간을 구성하는 몸과 영혼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지 않습니다. 몸은 전인격인 통합을 지칭하기에 사실 몸과 영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관념적으로 구분을 해서 설명하고 이해할 뿐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몸에 대한 또 다른 구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 6 19절입니다. "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집입니다. ,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성령이 상주하고 계시는 성령의 집인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몸의 약함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약한 몸으로 인해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갈라디아서 4 13절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내가 처음으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게 것은 육체의 병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며 받으실 거룩한 제물로 바치십시오. "(로마서 12:1) 오늘 본문인 고전 15 43절입니다. "비록 비천한 몸으로 묻히지만, 장차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납니다. 연약한 몸으로 묻히지만, 강건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고전 15:43)

그러므로 성도는 주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아가는 연습을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몸을 통하여 드러내야 합니다. 죄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면 우리의 몸은 불의의 도구가 되고, 성령을 거슬러 살아가게 됩니다.  인간의 기원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넣어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 몸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자를 지으실 때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갈비뼈 하나를 뽑으시고 자리에 몸을 채워주셨습니다. ( 2:21) 오늘 본문도 몸의 고유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도 몸을 지니고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제 40절을 보시겠습니다. 성경은 하늘에 속한 , 땅에 속한 몸을 말하고 있는데 영광이 각각 다르다고 합니다. 40 하늘에 속한 몸도 있고, 땅에 속한 몸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속한 몸의 영광이 다르고, 땅에 속한 몸의 영광이 서로 다릅니다. 41 태양에는 태양의 영광이 있고, 달과 별에도 각기 다른 영광이 있습니다. 그리고 별들 하나 하나에도 저마다 다른 영광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몸은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 해와 달과 별을 가르킵니다. 하늘에 속한 창조물 가운데 보여지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음을 뜻합니다. 땅에 속한 몸은 땅에 존재하는 피조물들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적 디자인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각각의 형체들 안에 하나님의 신비를 담아서 디지인하셨음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신은 현재는 불완전한 몸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성령의 충만한 삶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소망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살아가며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삶을  만나는 특별한 여정입니다.

둘째, 부활의 소망은 우리에게 변화된 삶을 요구합니다.

42 ○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비록 썩어질 몸이 묻히지만, 장차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43 비록 비천한 몸으로 묻히지만, 장차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납니다. 연약한 몸으로 묻히지만, 강건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44 자연적인 육체의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자연의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부활의 몸은 지금의 육체가 지니는 영광과 다른 영광을 지니게 것임을 말해 줍니다. 썩어질 몸이 썩지 않는 몸으로, 비천한 몸과 연약한 몸이 영적인 강건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소망이 우리를 풍성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약한 몸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오히려 연약한 몸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강하고 모든 것이 준비되었을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지만 우리가 약할 우리가 무너져 있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간절히 만나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상실의 감정들과 거절의 순간들, 이루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불안과 두려움은 부활의 소망을 만날때 영원한 상실이 아닌 우리 안에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소망의 자리를 채우는 기회가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쉽게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을 그들은 영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 가셔서 당신의 몸을 보여주시며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고 질문하시고 생선 한토막을 잡수셨습니다. (누가복음 24:36~39)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자신이 단순한 영이 아님을 제자들에게 증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 잡혀 다락방 문을 겹겹이 걸어 잠그고  있었는데 예수가 들어 가셔서 위로와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제자에게는 자신의 십자가의 흔적을 만져 보라고 하시며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몸은 이전의 육체의 속성을 지니고 계셨지만 지금의 몸과는 다른 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19~21) 사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의 몸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믿음으로 당하는 고통과 수고를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삶이 헛된 것이 아니라 그날에는 옳은 삶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계십니다. 분명 풀과 꽃이 마르고 육체의 몸도 썩어질 것이나 우리가 살아가며 실천한 모든 삶이 기억되고 남는다면, 믿음의 헌신들,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일들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일들이 그대로 남게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부활의 때에는 이상 사망도 없고 애통함이 없는 성도가 누리게 것이라 기록합니다. 하늘의 영광이 우리의 몸에 새겨질 것입니다. 계시록 21 4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몸소 닦아 주실 것이니, 이제 이상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우는 것도 아픈 것도 절대로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땅에 보내신 목적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몸으로 믿음의 일들을 많이 심어야 것입니다. 믿음의 법칙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심는 이들은 적당히 거두겠지만 육신의 한계를 넘어 믿음으로 살며 씨를 뿌리는 성도들은 기쁨으로 열매를 거두는 날이 있게 됩니다. 이제 45절로 4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5 성경에 기록된 대로, “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 라고 했지만,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먼저 왔고, 후에 영적인 것이 옵니다.

하나님의 창조한 모든 것들은 본래의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창조 질서에 따라 파종기와 추수기가 있듯이 부활의 추수때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먼저는 자연적인 것이 먼저 왔고, 있는 자로 살아가다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입게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인 ,부활의 몸을 입게 것임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간과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태어나서 병들고,죄짓고,죽고,썩는 것을 운명으로 안고 태어난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운명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래 계획데로 살아가지 못하게 죄의 도구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몸이 반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셋째, 육의 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의 몸을 입게 됩니다.

47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에 속한 사람이지만, 둘째사람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48 따라서 흙에 속한 사람들은 흙으로 지어진 사람 아담과 같고,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하늘에서 오신 둘째 사람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49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흙에 속한 사람 아담의 형상을 입은 것과 같이, 또한 장차 우리는 하늘에 속한 둘째 사람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쉬운말 성경)

49절의 형상은 인간 창조의 모델이라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아니라 '아담의 형상' 가르킵니다. 우리는 아들이 아버지를 닮는 질서 속에서 인간의 몸의 형태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형상은 바울이 이제껏 말한 몸이라는 형태입니다. 아담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형상이 대조되는 것은 지금 순간 우리의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됩니다.

마음과 눈의 시선이 주님께 있지 않은데 어떻게 나의 믿음 생활이 온전히 있을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가득해 지면 두려움이 줄고, 관계는 꽃을 피우고, 사랑은 커져 것입니다. 애쓰고 노력해도 안되는 용서와 사랑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갈 때에 우리의 마음이 정결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청결한 자는 거짓이 없이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며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하나님을 보게 되는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의 일부가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몸을 갖고 다시 온다는 거야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주님의 몸과 같이 부활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입게 것입니다. 억지로 믿으려고도 하지 마시고 억지로 부정하려고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회의론자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전히 말씀을 믿지 못하는 이들과 삶의 위기속에서 힘겨워 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마음으로 어떻게 다가아야 할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길을 만들어 가는데 마음과 시간을 쏟아야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이라고 하면 세상의 권력, 명예, 손에 쥐게 되어 내가 높아지는 것들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땅에서 존경과 영광만을 누리고 사셨습니까? 가장 화려한 곳으로 찾아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자리로 찾아가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섬김의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좋은 집에서 복음 전하지 않으셨고 예수님께서 걸어 가시는 모든 땅이 복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고통 없는 강인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죽으심 없이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신 영광의 일들을 믿는다면 부활의 일들을 알수 없어도 하나님을 보게 되고 인식하게 됩니다. 몸의 부활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며 삶의 태도를 분명하게 해주는 능력입니다. 성도는 현실에만 안주해서 적당히 믿고 적당히 거두는 삶이 아닙니다.

성경속에 인물들만 보아도 모든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에서 예수님의 형체를 입게 되어짐으로 흙의 비참함을 벗게 됩니다. 부활의 믿음은 삶의 현실속에서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홀연히 변화하여 거룩한 부활의 몸을 입게 것이라 말씀합니다. (고전 15:51)  이제 몸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소멸되어가는 몸도 아름다운 과정일뿐입니다. 성도는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현재의 삶의 기쁨이 되어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살아계신 주님이 삶속에서 강력하게 인식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4/7/2024 | 부활절 두번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8 '부활의 공동체 2' Community of Resurrection 2

고린도 전서 15:20-28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풋볼을 무척 좋아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풋볼 팀에 들어갔는데 늘 후보 선수였기 때문에 한번도 경기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팀이 경기가 있는 날이면 소년의 아버지는 어김없이 경기장의 관중석에서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했습니다. 아들이 대학에서도 풋볼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을 아버지는 앞으로 4년 동안의 대학 풋볼 경기 입장권을 한꺼번에 샀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여전히 단 한번도 주전으로 나가지 못했고, 아버지는 관중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졸업을 얼마 앞둔 어느날 그 아들은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속해 있던 팀이 경기에서 지고 있었는데, 늘 후보 자리를 묵묵히 지키던 그가 감독에게 제발 한번만 출전 시켜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래서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기적처럼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그가 울먹이며 감독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시각 장애인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이제껏 모든 경기를 보러 오셨지만 내가 뛰지 못한 것을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처음으로 제가 경기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보실 수 있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누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은 죽음 앞에 무력한 존재이지요. 죽음은 참으로 강력한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말하며 죽음을 빼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힘이 죽음을 삼켜 버릴 정도로 강력하기에 부활의 빛은 죽음까지도 소멸시킵니다.

 

바울은 12절로 19절에서 가정문을 사용하여 부정을 다시 강하게 부정하는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에 대해서 진리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했는데도,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13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한 채 아직도 죽은 상태로 계셔야 할 것입니다. 14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한 채 아직도 죽은 자들 가운데 그대로 계신다면, 우리가 전한 것은 아무 쓸모없는 헛된 것이며, 여러분의 믿음 또한 헛됩니다. 15 더 나아가, 우리 모두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못하셨는데도, 우리가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해왔기 때문입니다.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하고 아직 죽은 상태로 계셔야 합니다.


17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하셨다면, 여러분의 믿음도 몽땅 헛된 것이고, 여러분은 여전히 죄 가운데에 있게 됩니다. 18 그렇게 되면, 이미 세상을 떠난 그리스도인들도 다 멸망해 버렸을 것입니다.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우리의 소망이 단지 이 세상의 삶만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다른 모든 세상 사람들보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들이 걷는 길이 진리라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과 진리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추상적인 차원에서 믿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절대로 실제적일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12절로 19절의 말씀을 부정하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그리하여 모든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선언합니다

 

첫째, 모든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첫 열매’라고 번역한 헬라어 ‘아파르케’(παρχ)는 시간적으로 '창조'라는 뜻의 아르케(ρχή)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 열매'라는 것은 '새창조 사건'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가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첫번째 열매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서 일어날 대표적 의미를 갖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까지도 죽음 이후 몸의 부활에 대한 약속입니다. 예를 들어 농부가 봄에 씨를 심어서 가을에 첫열매를 얻게 되었다면 이후에 우리는 그 나무에서 열매가 지속적으로 열릴 것을 알게 됩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듯이, 이제 죽은 자의 부활도 다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들어옵니다. 22 곧 한 사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이제 다른 한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절망이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말하며 고통과 고난을 빼놓지 않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의 숨결을 느끼며 주어진 때를 살아가게 합니다. 세상이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져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첫열매가 되신 주님의 행렬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속에도 잘됨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고통의 시간, 원하지 않는 때를 맞이할 때도 있는데 하나님은 인생의 어두운 날도 회피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받아 들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때 나사로는 이미 죽어서 장례를 치른 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부활 때에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안다고 대답합니다. 언뜻 보면 그녀가 부활하게 될 것을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녀는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주님께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1:25~26)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셨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나사로는 다시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은 앞으로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믿음을 주시기 위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죽음의 권세까지 굴복하신 주님께서 마음의 주인으로 자리하고 계신가요? 기독교는 지적이거나 윤리적인 차원의 종교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만이 인생의 길과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심을 정말로 믿는 것입니다. 인생의 분명한 답이 바로 부활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부활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답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세상에 없습니다. 한치 앞을 알수 없는 인생길 주님께서는 우리의 빛이 되어 주십니다.

 

둘째, '이것을 너희가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고백이 믿는다라는 것입니다매주일 사도신경을 고백하며 믿는다고 고백합니다부활의 신비는 누군가가 전해 주니까 믿어 주는 것도 아니고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어서 믿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묻고 계시는 주님의 질문에 정직하게 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간 '너희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다시 물으십니다.

 

이 사실을 잊고 산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일에만 급급하게 될 것이고 나이가 들수록 인생의 허무함만 더해 갈 것입니다. 지나 온 인생을 보며 후회만 남는다면 한없이 절망하게 되고 속절없이 감정의 파도에 끌려 다니게 됩니다.

 

주님은 부활의 소망을 굳게 믿고 살아가라고 죽은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마음에 참된 안식이 찾아 옵니다. 잠자고 있던 영혼이 깨어나고, 상처로 인해 단단해진 마음에 주님의 위로하심이 있습니다. 이 신비는 우리가 우리 힘으로 고통의 현실 속에서 부활의 능력을 끌어 당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소망하고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현실과 영적인 것 사이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신앙생활의 문제는 진정으로 믿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흙에 속한 자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가리키는 죽음의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 보아야 합니다.

 

죽음은 우리가 접해 보지 않고 경험해 보지 않았다고 해서 다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 가운데 본래적인 것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인간에게 찾아 왔습니다. 인류 역사속에서 이 죽음을 해결할 방법이 없기에 살아가면서 사망의 권세는 우리를 가장 두렵게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이유는 대부분 애착하는 것으로 부터 분리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바울은 죽음 이후에 일어날 사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23절부터 26절을 읽겠습니다.

 

23 하지만 죽은 자의 부활은 각각 순서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장 먼저는, 모든 죽은 자들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24 그 후에 세상 종말이 임할 것인데,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의 모든 권력과 권세와 권능을 다 멸하신 후,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것입니다. 25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완전히 굴복시킬 때까지,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26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굴복시킬 원수는 죽음입니다.

각각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질서 있게 이 일이 진행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때에는 초림때 비천한 상황에서 태어나신 것과 달리 왕중의 왕으로 영광과 권위를 지니고 임하실 것입니다. 이때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이 세상의 완전한 종말이 온다는 의미입니다.(13:39, 14:15) 바울에 따르면 두가지 일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다 심판하시고 악의 세력이 파멸될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하나님의 나라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만 그날에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품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새로운 창조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부활의 신비가 역사적 사실임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은 믿지만 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부활 이후의 말씀도 그대로 다 받아 들여야 합니다. 예수의 생애에서 실제로 부활이 일어났고, 성경은 우리도 그렇게 될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착하게 산다고 해서 죽음을 극복할 수 없고, 오랜 시간 수행의 삶을 산다고 죽음을 이길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믿으려 하고 이해하려고 하면 믿어지지 않고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거꾸로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이 길을 신뢰하며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그 길을 따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성경의 말씀을 계시적으로 깨닫게 해 주십니다.

 

초대교부들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태양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에 자주 비유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태양을 온전히 살필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지성과 이성이 하나님의 신비를 다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통해서 삶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숨겨진 깊이를 볼 수 있도록 열어 주시지만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닫혀진 우리의 영적 시각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굳게 닫힌 돌문이 열리고 주님께서 나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은 죽음의 의해 삼켜진 그리스도의 생명이 다시 역전되어 죽음을 삼킨 생명의 사건인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어떤 순종을 원하실까요?

 

27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켰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굴복시키신 모든 것에는 그 ‘모든 것’을 굴복시키신 하나님 자신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28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굴복시킨 그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모든 것을 자기 발아래 굴복시키신 하나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녕 ‘모든 것의 주님’이 되실 것입니다.

 

굴복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강압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의미에서 순종입니다. 주님은 찬양 받으실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새창조를 이루셨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며 순종하셨습니다. 깨어진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들이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안에서 버려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도들은 고통중에도 십자가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만 있게 될 그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종말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이제껏 살아온 삶으로 부터 단절시키는 것 같고,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잊혀지는 것 같고, 이제껏 쌓아 올리며 살았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종말은 미래에 일어날 우리에게 펼쳐질 영광의 자리이며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인생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늘 내게 주어지는 일들을 부정적으로 받아 들여서는 안됩니다. 비록 주어지는 환경속에서 고통과 고난이 있더라도 찬송의 노래를 부르며 부활의 몸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찬양은 사망을 이기고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몸은 날로 쇠잔해 지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몸은 날마다 새사람으로 살아납니다. 바울은 자신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공동체 안에서 어떤이들은 새새명을 낳고 탄생의 기쁨을 누리기도 하고 동일한 시기에 누군가는 부모와의 헤어짐을 경험하며 아픔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품을 때도 있고, 내려 놓고 떠나 보내게 될 때도 있지만 모든 시간과 모든 날들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의무적이거나 강압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는 것은 현실에서 넘치게 채워주실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의 인생에 넘치도록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믿음은 정해진 기계적인 삶이 아니라 모든 환경속에서 우리를 설계하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십자가에서 이루신 죽음을 우리도 삶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앞으로 우리에게 펼쳐질 인생이 이미 정해졌다는 숙명론자가 아니라  부활의 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하실 하나님께 매일 묻고, 삶속에서 펼쳐질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갈망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믿음생활 가운데 평탄한 길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몸을 함께 지니게 될수록 주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며 부활의 신비를 경험해 갈 것입니다. 인생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시작과 마지막을 운행하고 계시니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으로 사려 깊게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들이 인생을 설계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책임있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31/2024 | (부활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7 '부활의 공동체' Community of Resurrection

고린도 전서 15:1-11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40일의 사순절기를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며 보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복음이 완성되었습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이유는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의 탄생과 수난이 죽음으로 끝났다면 세상의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었을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이 길이 진리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십자가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절을 시작으로 6주 동안 부활절기를 보내게 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 부활에 의해 나의 일상도 변화 받는 삶, 나에게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기고 삶의 우선 순위가 바뀌는 삶, 주일 예배 한번으로 신앙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매 순간 부활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논쟁과 의문들에 대해 바울이 쓴 편지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는 부활을 믿지 않는 교우들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서로가 상반된 견해로 논쟁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지금 시대의 성도들이 부활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것도 점점 더 신앙의 개인주의화가 되어가고 공동체 안에서의 믿음은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너무 급하고 분주한 삶을 살다보니 부활의 의미는 점점 사라져 갑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이 없었다면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전 세계 모든 이들는 예수를 주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의 권세가 끊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를 드러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교리는 논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권위를 받아 들일때에 알게 되고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의 몸을 입어 가는 과정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로 이어집니다. 성도의 구원은 부활과 연결되어 있는데 주님은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이며, 그날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선한 일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의 의로움을 보장해 주며, 앞으로 부활의 몸을 받게 될 것을 보장합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온전히 믿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나 봉사도 아무 의미가 없는 헛된 것이 되고 말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모든 사람들 중에 성도들은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죄와 슬픔이 그치고 십자가의 은혜로 충만케 하십니다. 지금은 우리가 육신의 몸을 입고 있어서 완전한 영화로운 삶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같은 형상으로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고후 3:18)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다가 온전한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연합하라는 말은  여러분의 개성을 잃어 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은사들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역사하십니다.

 

12절을 마음을 열고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1 형제들이여, 내가 전에 여러분들에게 전해 준 복음을 다시 되새겨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내게서 전해 받았고, 지금 그 복음 위에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말씀을 여러분이 헛되이 믿지 않고 굳게 잡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복음에 의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바울은 확실하게 믿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생활을 하지만 어떤이들은 목적없이 가볍게 믿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현재의 삶이 예수님의 부활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고난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부활 신앙이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는 것은 땅속에 깊이 심겨진 씨가 죽어짐으로 꽃이 자라나듯이 그는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부활 신앙 토대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사망으로 이끌고 갑니다. 죄는 내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삶으로 거칠게 밀어 붙이는 힘을 지닙니다. 그래서 죄의 뿌리를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실제적으로 누리지 못합니다. 만일 죄를 쉽게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한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죄가 죽고 우리가 다시 살아 났다는 의미가 깊어 질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실제가 되지 못하도록 마귀가 끊임없이 성도들을 공격합니다. 이것이 신자 안에 소멸되지 않은 죄의 뿌리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은 허영심과 교만의 모래성을 계속 쌓아 올리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내면은 영적 전쟁터와 같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에서 말씀을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이끌림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3 ○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여러분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과, 4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던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 성경에 기록된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음을 마음으로 받아 들이시기 바랍니다. 성경대로 믿으라는 것은 문자주의나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상과 가치로 해석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대로 믿는 것은 깊은 이해를 통하여 성화의 삶을 꾸준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옳다는 것을 부활을 통해 입증하셨습니다. 성경의 모든 기자들이 이 사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부활은 삶을 변화시키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5 그리고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그런 다음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6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500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동시에 나타나셨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는 죽었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또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주의 동생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다른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기독교가 당신을 변화시키려면 부활이 역사적 사건임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성경의 기자들은 생명을 걸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서 전달하려고 애썼고 수많은 증인들이 이를 전하고 있습니다. 다시 살아 나신 주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부활의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그런 다음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에 500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동시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주의 동생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다른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믿는 성도들의 현재의 삶에도 나타나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깨닫고 삶이 변화되는 현재의 역사적 사실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소망이 되어 주시고 믿음을 지켜가기 위한 말씀과 기도의 자리,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도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마태복음 28 장을 보면 예수의 부활 직후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들이 대제사장들에게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전하자 대제사장들은 그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제자들이 도둑질하여 갔다고 소문을 퍼뜨리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서만 증거된 것이 아님을 볼수 있습니다. 박해자들에 의해서도 증거됩니다. 마태복음 2811절로 15절입니다.

 

"11 여자들이 떠난 뒤, 예수의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 몇 사람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 대제사장들에게 그동안에 일어난 일을 낱낱이 보고했다. 12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유대 지도자들과 논의한 끝에, 경비병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당부했다. 13 “한밤중 너희가 잠든 사이에, 예수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하라. 14 그들은 또 경비병들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만일 총독이 이 소문을 듣게 되더라도, 너희에게는 아무 피해가 없도록 우리가 책임을 지겠다. 15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지난 2천년 동안 예수의 부활 사건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 내기 위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무제한적으로 성경을 비판하며 연구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부활을 비판하며 연구하던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 일들이 허다합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다락방에 모여 어찌할 바를 몰라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분을 본 제자들은 완전히 변화되어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존경받는 율법학자였고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던 바울도 주님을 만난 이후 부족한 나에게까지 나타셨다고 고백합니다. 자기 인식에 대한 변화이자 새롭게 변화 된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8절로 10절입니다.

 

"8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달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사람 같은 한참 부족한 나에게까지도 나타나셨습니다. 9 나는 모든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이전에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으로, 사실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도 없습니다. 10 그러나 오늘날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주님을 만난 모든 이들은 그 모습에서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빈무덤은 인간이 한줌의 재로 돌아가는 허무한 인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우리를 실패 가운데서나 역경들 속에서도 더 진지하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없다고 말하는데 그가 마음에 바라 본 영광은 어떤 것일까요? 그는 구약 성경에 능통한 자였고 성경의 약속대로 틀림없이 이뤄진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셋째, 예수의 부활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해줍니다.

 

"10. .....내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을 내어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이렇게 복음을 힘껏 전하고 있으며, 또한 여러분은 그 복음을 이렇게 믿었습니다."

 

은혜가 헛되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에 그분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욕망과 자기 만족, 끊임없는 경쟁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잃어버리고 소모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교만과 자랑, 허영심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철저히 다스림을 받는 시간입니다.

 

여전히 자격 없다고 느끼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믿음은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힘들고 고단한 인생을 사는 이들에게 이 부활의 사건을 증거 하십시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십시오. 성도들에게도 슬픈일들이 찾아 옵니다. 힘에 겨운 일을 마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지닌 성도들은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들속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신것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만이 인생의 소망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이었지만 물과 피를 쏟으신 그 현장 앞에 예수님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는 부활한 예수님을 다시 새롭게 만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가시고 그를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베드로를 복음 전하는 자의 삶으로 변화 시켜 주셨습니다. 수도 없이 부인했지만 또 등 돌리는 우리를 새로운 사명자로 세우시기 위해 찾아 오십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그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성도로 부활이 어떤 힘을 지녔는지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셨으니 영화로운 날이 올때까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삶에 찾아오지 않으면 헛되고 헛된 인생을 계속 소모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은 우리의 한 시대가 지나갈 때에 증명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부활의 흔적을 살아내는 성도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은 개개인이 엘리트이고 모두가 전문가들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만을 보여주어야 뒷쳐지지 않는것 같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겸손히 하나님앞에 순종하는 삶 앞에서는 영적 전문가, 엘리트는 없습니다. 높고 낮음이 아니라 일상의 삶을 거룩하게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한사람의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남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성도들의 삶 되기를 축원합니다.


3/24/2024 | (종려 주일)

십자가와 동행하는 사람들 마지막 만찬의 은혜 Grace of the Last Supper

누가복음 22:14-20

올해는 사순절 절기가 조금 빨리 찾아왔습니다. 부활절이 해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활절이 해마다 다른 이유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해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春分, vernal equinox)이후의 주일을 부활절로 지키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1697년 동안 지키는 모든 교회들의 약속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매년 부활절을 기준으로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거슬러 올라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로 부터 사순절기를 보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셨는데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하여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이제 월요일 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은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의 사랑을 기억하는 시간으로 보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마치시고 유월절 절기가 가까이 오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월절 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모인 예루살렘인데, 예수님에게 그해의 유월절은 달랐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의 살해 음모를 꾸미고, 가롯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고 처형할 빌미를 제공하기로 제안하고, 대제사장과 군관들은 그 대가로 돈을 주기로 약속합니다. 그해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축제일로 보내던 때에 체포 당하신 후 재판 받으십니다. 예수께서는 수요일을 침묵의 날, 기도의 날로 보내시고 목요일 밤부터 십자가 고난을 시작으로 십자가에 달리사 금요일 오후 3시쯤 운명하시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것 같은 마음을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정말 짧은 시간 동안에 이 일들이 모두 일어 났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날은 유월절 대표적 음식인 어린양을 포도주와 떡으로 대체하셨습니다. 주님은 고난 당하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원하셨고,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의 자리였습니다. 포도주를 마시며 감사 기도를 드리셨고 많은 사람을 위해 내가 흘리는 보혈이니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주간을 앞두고 성도들에게 주시는 성찬의 의미를 말씀하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에게도 마지막 식사의 시간은 찾아옵니다.

 

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 하나님 나라에서가 아니면, 앞으로 다시는 내가 유월절 음식을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17 그리고 예수께서는 잔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자, 이 잔을 받아, 너희가 서로 나누어 마셔라. 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이제 나는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경험한 만큼만 위로 할 수 있고 사랑 할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소중한 사람과의 마지막 식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언젠가는 떠나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도 마지막에는 나의 것이 아님을 내려 놓아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내가 그토록 부딪히며 완고했던 자아와 생각도 끝까지 가지고 갈수 없습니다. 전도서의 기자가 헛되고 헛되다 하시는 말씀은 삶의 허무주의가 아니라 더 소중함으로 살아내라,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죽음을 성찰하며 현재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것이 소중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삶이 소중하고 삶을 긍정의 마음으로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절망 가운데서도 다시 일어나, 기쁜소식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감사할 일보다 걱정거리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오늘날 미디어에서는 성공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성공에 대한 압박을 받아 왔기 때문에 잘 되는 일에 대한 감사는 자연스럽지만 삶의 진정한 목적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주변에는 말 못할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간증은 성공 스토리가 아닌 하나님과 살아 낸 이야기가 고백 되어져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지금의 삶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의 상처가 변하여 감사가 되도록 해 주십니다. 십자가는 끊임없이 찾아 오는 인생의 쓴잔에도 주님이 함께 계시니, 주님의 자녀는 주님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약속을 믿는 이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주시고, 생명의 참된 의미를 통해서 감사의 마음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리나 미디어로 인해 주님의 성찬의 참 의미를 듣지 못하며 살아가지만  성찬식은 고요하게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새언약이 되신 주님은 인생의 참 소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약시대의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연합이 이루어짐으로 은혜의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찬은 우리의 불완전한 삶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우고, 삶의 현장에서는 주님의 능력을 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의 능력을 입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실수가 많던 사람들이었지만,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주님께서 새언약이 되심을 몸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찬은 우리가 듣는 설교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며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은 실제로 내 삶의 아픔, 고통과 두려움, 염려와 걱정을 그리스도께 맡기며 감사의 언어로 몸과 마음을 빚어내는 시간으로 이어집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의 마음 안에 주님께서 거하시며 격려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성찬은 삶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연결고리가 되어 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성품과 마음이 변화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의 삶이 산산히 부서졌을때에도 진정한 감사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장에 무뎌진 믿음을 다시 깨우시는 것이 감사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은혜를 가득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찬은 주안에서 '하나임'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수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그 믿음의 씨앗을 마음 안에 심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의 죄된 욕망으로 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일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하나님 안에서 살도록 하는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미움과 시기를 끊어내고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가라고 그리스도의 참 사랑으로 매일 부어주십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회심은 관계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종들과 주인들이 함께 떡을 떼었고, 변화된 종과 주인은 서로에게 주의 교훈을 가르치고 교육을 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을 이뤘습니다. 신분의 차이가 뚜렸하던 시대임에도 종과 주인이 서로에게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서로가 한몸처럼 베풀고 나누며 그리스도인들은 실제적 믿음을 누림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 것입니다. 성찬에 참여함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고백하게 하시고,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성찬식을 준비할때마다 성찬 위원들은 성만찬을 준비하는 일주일의 말씀을 가지고 한주를 기도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월요일의 말씀은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또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모두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안에 있소, 살아 계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또 내가 아버지로 인해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인해 살것이오" 라는 말씀 구절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성찬을 통해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와 깊은 연합이 되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성찬을 준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깊이 경험하고, 우리의 영혼이 주님으로 인하여 살아있게 됨을 느낄 때 우리가 나누게 되는 성찬은 예수님의 생명이 됩니다. 우리 안에 그 생명이 나눠지게 될때에 서로의 관계가 깊어지고, 우리의 영혼이 그분으로 인하여 서로에게 속하여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2천년 전에 주인과 노예 사이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여기라고 했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믿게 되는 일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안식과 평강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관계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성찬은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진 우리의 발걸음을 돌려 하나님께 향하도록 해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나와 너를 연결하는 사랑이며, 삶에 대한 긍정의 마음을 지니게 해줍니다.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관계를 새롭게 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주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이제 우리가 나누며 살아야 할 구체적인 음식은 무엇입니까?

 

19 예수께서 또 빵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다. 이것을 먹어, 나를 기념하여라. 20 유월절 식사가 끝나자, 예수께서 또 잔을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유월절 식사에서는 전통적으로 몇번에 걸쳐 잔을 들게 됩니다. 첫번째 잔을 들고 기도한 후에는 쓴나물, 누룩없는 빵 외에 붉은색 쨈이 주어집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한 노동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잔을 들고는 시편의 찬양시를 불렀습니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축복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어떠한 이론을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실제적으로 나눠야 할 음식이 되셨습니다. 예수는 성찬을 통하여 새로운 언약의 중요한 예식이 될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집트를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음이 모든 가정의 큰아들을 삼키려 했지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더니 하나님은 죽음으로 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맏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유월절의 유래입니다. 그 어린양의 피가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마지막 때까지 우리를 죽음으로 부터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께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예수를 팔고, 배신할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다 알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마가복음 148,9절입니다.

 

"8 그러므로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한 것이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어준 것이오. 9 내가 분명히 당신들에게 말하겠소. 온 세상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행한 이 갸륵한 일도 함께 전해져서, 사람들이 그녀를 길이 기억하게 될 것이오.

 

이 여인의 행위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일이었고,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던 주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예수의 기적과 이적을 따랐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때 모두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 여인의 순종은 성경에 기록되어 남겨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녀의 삶을 복되게 해 주시고 성경에 기록해서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함께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했던 이 여인의 반응이 우리의 삶속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세상속에 있으나 하나님의 차별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맡겨 주신 삶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이뤄 나가야 합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만 급급한 삶이 아니라 매일의 삶속에서 더 깊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경험되도록 살아갑시다.

 

이제 많은 사람을 모으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한사람 한사람을 찾아 가라고 말씀 하십니다. 한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그들과 동행하며 끝까지 찾아 가신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붙들어 주셨고, 자신이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그날 밤에도 사랑하는 제자들을 보게 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나의 삶을 온전히 내어드릴 수가 없는데 마음을 깨트린 옥합을 어떻게 드릴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옥합을 깨트리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린 한 여인은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었고 비방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으로 엎드리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여인의 순종을 성경 말씀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1963년에는 미국인의 65퍼센트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절대적 진실로 믿는다고 대답했다. 15년후인 1978년에는 그 수가 38퍼센트로 줄어들었다. 1992 1월에 실시한 조사에서는 32퍼센트로 다시 줄었다. (PRRC Emerging Trends) 영국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비율은 1981년의 26퍼센트에서 현재(1992) 31퍼센트로 감소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1981년의 52퍼센트에서 48퍼센트로 감소했다. (International Christian Digest)'

 

30년 전의 이 통계가 지금은 어떠한 결과로 남아 있을까요? 이제 우리의 교회와 믿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개인의 믿음을 회복하여 복음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어쩌면 믿고 있으면서도 갈급하고 곤고한 이유가 내가 가진 옥합을 깨트릴 자신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 능력의 절정은 남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십자가에 있으며, 이제 우리의 삶의 실제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사랑을 배워가는 예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참된 희망을 찾는 이들에게 풍성한 교제를 소개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3/17/2024 |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

십자가와 동행하는 사람들 '잃어버린 두 아들을 위한 잔치' The celebration of the 2 lost sons coming home

누가복음 15:24-32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의 아침이 더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특별 새벽기도를 결심하고 지키는 분들은 이쯤되시면 생체 리듬이 바뀌었을 겁니다. 이제 열흘 정도 남았는데 피곤하고 힘들어도 주의 생명이 마음 깊은 곳에서 부터 솟아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집으로 다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자유를 갈망한 아들이고, 다른 한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얻기 위해서 아버지 곁에 머물러 있던 아들입니다. 자녀를 키우다보면 아이마다 성향이 다르고 기질이 다름을 느낍니다. 이 두 아들의 선택은 우리의 삶과도 닮아 있을것입니다. 누가가 기록한 본문에도 방황했던 아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고 끝까지 기다리던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십가가의 정신 가운데 한가지는 포용성입니다. 포용과 환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가치입니다. 포용의 마음을 잃어 버린 공동체는 내 기준만을 높이기 때문에 파벌이 형성되고, 환대를 잃어버린 공동체는 새로운 이들을 환영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생깁니다. 이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큰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아담의 죄로 인해 사랑과 협력 보다는 분열과 배척을 반복해 왔습니다. 편견과 분열은 성경 안의 가정에서도 발견이 됩니다. 가인과 아벨,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요셉의 형제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불안전함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구속적 섭리로 믿음의 가정을 이끌어 가십니다. 

 

누가복음  15:1, 2절에 따르면 예수께서 두 아들을 잃어 버린 비유를 하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세리와 죄인들이고다른 부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오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비유속에서 우리는 죄와 대속, 희망에 대해서 볼수 있습니다.

 

첫째, 둘째 아들은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아버지를 떠납니다.

 

12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소. ‘아버지, 제 몫의 유산을 미리 나누어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는 자기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소. 13 얼마 후, 작은아들은 자기 몫을 다 챙겨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소.

 

둘째 아들은 자신에게 남겨질 유산을 미리 분배해 달라고 아버지에게 요구합니다아버지의 굴레를 떠나 자유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로 부터 멀리 떠나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인생에 도전도 하고, 꿈도 펼치고 싶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들의 이 행동이 아주 잘못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멋진 꿈을 꾸며 인생을 멋지게 개척해 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이해와 달리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기에 당시에 이런 요구는 아버지가 원로들에게 데려가 아들을 돌에 맞아 죽게 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 아버지는 당시 시대적 문화를 넘어서 자유를 열망하는 아들의 요구를 순순히 허락합니다.

 

유대사회 풍습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장자에게는 재산의 2/3, 둘째에게는 아버지 유산의 1/3 할당이 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1/3 유산에 해당하는 꽤 많은 돈을 들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끝없는 자유를 향해 떠난 이 아들은 그 땅에서 오래 가지 않아 술과 여자로 재산을 다 탕진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기로 선택하면 하나님의 주권의 바다를 벗어나 물밖에서 살고 싶은 죄된 욕망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영역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로 인해 타락으로 가게 됨을 보게 됩니다. 죄가 하나님으로 부터 벗어 나려는 힘이라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삶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했을 때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고, 그는 돼지 농장에서 돼지 먹이로 허기를 채우면서 지내야 했습니다.

 

13절로 1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3 얼마 후, 작은아들은 자기 몫을 다 챙겨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소. 거기서 그는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 많은 돈을 다 허비해 버렸소. 14 돈은 이미 다 떨어진 데다, 그 나라 전역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 그는 끼니조차 제대로 이을 길이 없게 되었소. 15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그 나라 사람의 어떤 집에 더부살이로 들어가 돼지를 치게 되었소. 16 그는 너무나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라도 실컷 먹고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넉넉히 주는 사람이 없었소.

 

당시 유대 사회에서 돼지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은 자유를 희망했지만 유대인들이 혐호하고 부정한 짐승이라 여기던 돼지를 치며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얼마다 그 삶이 절박했을까요?  돼지가 먹는 열매로라도 배고픔을 없애 보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뜻대로 안 됐습니다. 이 아들은 어느 날 아버지가 계신 자기 집을 생각했겠지요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품꾼들은 지금의 자기 신세 보다 나을 텐데, 아버지에게 품꾼의 하나로 걷어 달라고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서 잘못을 빌고 앞으로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한명으로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요.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매일 매일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날도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둘째 아들임을 직감합니다. 아버지는 동네 어귀에 들어서기도 전에 아들을 향해 뛰어 나오십니다. 유대사회의 체면 문화도 아버지에게는 중요치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오직 죽었다가 살아 돌아오는 아들만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잃었던 아들을 끌어 안아 목을 껴안도 입을 맞추십니다. 하인들에게는 잔치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줍니다. 일꾼이 아니라 다시 아들의 신분을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이 아들은 크게 혼나더라도 일꾼으로라도 아버지 곁에서 섬기려고 했는데,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내 뜻대로 살고 싶은 자유,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고 싶은 자유,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며 마음안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알게 될때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어느날 존 웨슬리에게 찾아온 한 사람이 불신을 품고서 묻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아침 저녁으로 설교를 하며 어디로 인도하시는 겁니까? 웨슬리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닮아가고 만물을 사랑하며 자신의 삶에 자족할 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깨닫게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값없는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못해도 있는 그대로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영혼의 굶주림 가운데 있을때에 배불리 먹여 주셨고, 자유를 향해 질주하며 공허함과 허무함에 갇힌 우리를 절망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아버지에게 있어서 가장 기뻤던 날 아버지 집에 머물던 큰 아들의 실체가 드러 납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쌓이고 쌓였던 분노가 동생이 돌아온 시점에 드러났습니다. 평소에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아 보였는데 가장 기뻐해야 할 순간에 아버지에게 불만을 토로합니다.

 

24 , 보아라. 죽었던 내 아들이 이렇게 다시 살아왔다. 내가 아들을 잃었는데, 이제는 다시 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큰 잔치를 벌였소. 25 ○ 한편, 그때 밭에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큰아들은,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 자기 집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소. 26 그는 종 하나를 불러, 자기 집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소. 27 종이 대답하기를 ‘동생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어르신께서 동생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시고자,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였소. 28 그 말을 듣고,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소.

 

둘째, 큰 아들의 관심은 아버지가 지닌 재산일 뿐입니다.

 

형은 동생이 돌아온 것이 왜 불편한 것일까요? 아버지가 둘째를 받아들이는 것이 왜 분노할 일이었을까요? 아버지가 동생을 다시 아들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이제 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자신의 것이었는데 또 다시 1/3재산을 나눠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은 모두 내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인생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 자신이 받게 될 이익을 기대했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달랐지만 목적은 동일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뜻에 반항하고 자유를 갈망했던 것이고, 큰 아들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께 순종한 한 것입니다. 결국 두 아들 모두 아버지로 부터 벗어나려고 한 것이지요.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큰아들에게도 아버지 보다 재산이 먼저 였습니다. 이 아버지는 큰 아들도 동일하게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네 것이 아니더냐? 아버지는 너도 이 잔치에 참여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1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말하기를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네 것이 아니더냐?

 

하나님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얻을때 우리는 아버지가 베푼 잔치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율법을 통한 구원과 믿음으로 인한 구원의 차이로 분열과 대립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그리스도교를 떠나야 했습니다. 둘째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큰아들은 이미 믿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예수의 비유에서 나오는 큰아들은 형식주의적 종교를 지적하며,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있으나 실제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의심을 버리고 아버지의 잔치로 들어오라고 말씀합니다. 기독교는 착하게 살라, 성실하게 살라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착하게 살고 죄를 이기려고 해도 더 많은 죄의 물결이 마음에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좋은 열매는 뿌리 깊은 좋은 나무으로 부터 맺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변화시켜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9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투덜거렸소. ‘아버지,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뼈 빠지게 일했고, 아버지의 말씀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지금까지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저를 위해 염소 새끼 한 마리조차 잡은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이게 뭡니까? 창녀들에게 아버지의 돈을 다 써 버린 아들이 왔다고, 그를 위해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벌이시다니요!

 

또 다른 아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셋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요한 복음 316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소. 그것은,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온전한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들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통과하시며 죄와 어둠속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갈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해 주시기에 우리는 넘어지고도 일어날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의 잔은 고통의 잔이고 쓴잔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여정 가운데 우리의 고통의 잔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받아드리기 힘든 그 잔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아버지를 신뢰했기에 그 잔을 받아들일수 있었습니다. 내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할수 없을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할수 있는 근거는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존 스캇펙 박사는 평화만들기라는 책에서 진정한 공동체에 이르고 싶다면 잘난 제안들이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봐야겠다는 욕구를 먼저 버리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욕구, 돈에 대한 집착, 신에 대한 분노 등 이러한 것들은 평화의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평화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에 고통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분쟁의 시대에 진정한 공동체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예수는 우리의 고통도 축제의 일부분을 만드시며 이끄십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예수가 초대한 잔치에 들어온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닮아갈 것인가 스스로 질문했습니다. 우리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예수님과 함께 써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의 지친 호흡에도 계시고, 어두운 세상속에서 홀로 있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회개란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삶의 방향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는 삶의 방식입니다. 만일 우리가 더 이상 주안에서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탕자처럼 돌고 돌아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젖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믿음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배하고 있지만 삶의 영역에서는 내가 주인되어 살아가는 삶이 익숙하고 말씀을 읽지만 그안에 깊은 은혜는 깨닫지 못하며 살아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찾지만 구원의 길에서는 여전히 방향을 잃은 자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둘째 아들에게만 베풀어 준 잔치가 아니라 누구든지 오라고 베푸시는 잔치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해주셨습니다. 원망이 찾아 오는 순간마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첫째 아들의 모습도 있고 둘째 아들의 모습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가 어린 아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장성한 분량으로 서 있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청중일 뿐이고,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큰아들이나 작은아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가야 합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맞이했습니다. 마음의 방향이 달라져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아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걸음과 방향이 되어 주시는 주님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길을 걷습니다. 한번도 변한적 없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품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귀한 은혜 누리시고 사순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기억하며 묵상하는 한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