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2023 | 사순절 메시지 4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My Family And I Will Serve The LORD

여호수아 24:15-19, 24-27

신앙생활에는 전환점이 필요합니다. 애벌레가 어느 순간이 되어 껍질을 탈피하고, 날개를 펴서 하늘을 날게되는 시점이 전환점입니다. 과거를 매듭 짓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발돋음 하는 것도 전환점입니다. 성도들에게 구원의 경험도 전환점입니다. 마음의 할례는 관성적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돌려, 하나님의 영으로 호흡하며 날마다 은혜의 삶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피조물임을 자각하는 순간,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가 얼마나 더러운 사람인지,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용서 받아야만 살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은 마음의 할례라는 것은 성결해진 영혼의 습관적 성격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는 성도들은 새롭게 태어난 증표들로 마음의 재형성이 이뤄집니다. 이전에는 마음 안에 거룩함이 없었는데, 내면에 거룩한 감정들이 차오르니까 그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이후에 거룩한 습관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살아내며 예수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넜고, 가나안 지역의 길갈에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사건은 할례의식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죽음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출애굽의 여정을 완수했지요. 가나안 땅을 정복했고, 각 지파들에게는 땅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출애굽 이후 60년의 세월이 지나며 1세대들은 가나안을 앞두고 모세를 비롯해 다 죽게 되었고, 2세대는 여호수아처럼 나이가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이후 3세대는 출애굽의 구원과 광야의 고난을 경험하지 않는 젊은 세대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을 세겜 지역에 불러 모으고, 고별설교를 한 것은 모든 백성들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하기 위함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언약식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애굽으로 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이적을 행하셨고, 광야길을 걷는 동안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셨음을 설교한 것입니다. 이곳 가나안 땅을 얻게 된 것도 가나안의 아모리 족속들을 쫓아 내신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난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말씀한 것입니다. 고별설교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너희는 애굽의 400년 종살이에서 불러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길도 없는 거칠고 황량한 광야에서 인도하신 은혜를 잊지 말아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경험하지 않는 세대들은 가나안에 들어와 모든 것이 넉넉한 상황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과 여호수아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온도차이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 지파별로 땅도 할당 되었으니, 훗날 지역적인 감정적 문제들이 생길테고, 가나안 지역의 신들과 신앙도 혼합되어 질 것이 염려되지 않았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아브라함부터 이삭, 야곱, 요셉에 이르기까지 가나안 땅에 있는 헤브론 지역과 세겜지역에 다 묻혔습니다. 이들은 나그네 같은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 보았다는 증거입니다. 야곱도 죽기 전에 자신을 이집트가 아닌 약속이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합니다. 여호수아서 24 32절에 보면 요셉도 자신의 뼈를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와 그의 아버지 야곱의 땅인 세겜에 묻었다고 나옵니다요셉은 이집트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을 믿음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해 지면 무뎌지게 됩니다. 삶이 평안해지면 고생을 언제 했느냐고 잊게 되는 존재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으로 다짐하고 결심해도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전환점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익숙해지지 않도록 여러 통로들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바로 은혜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예배 드리는 자녀, 찬송을 고백하는 자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매일 묵상하는 자녀들을 주목하십니다.

 

저는 지난주 코아부 팀장들이 준비한 새벽기도 특송영상을 보면서,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들을 눈에 담으며 몇번을 돌려 보게 되었습니다. 함께하는 지체들의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이 뭉클해 지더군요. “주를 섬기는 일에 후회가 없다는 찬양의 가사의 고백이 제게도 귀한 울림이 되어 주었습니다. 제단 앞에서 기억나는 삶을 살아 가자고 말씀을 전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말과 행동으로도 누군가에게 믿음의 도전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코아부 찬양을 듣고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을 느끼고 나니 제 발걸음이 기쁨으로 기도의 자리로 향했습니다. 공동체가 주는 힘이 그런것 아니겠습니까? 아이들을 양육하는 교사들은 일주일에 한번이 아니라 매일 아이들이 하나님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설레임으로 준비하고, 각팀의 리더들은 주를 섬기는것에 후회가 없음을 고백하며 말씀과 기도, 사랑과 교제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을 할때에 현재에 보기에는 나의 선택과 다르고 가시밭길 같고 고난의 길 같아 보이나 지나고 보면 그 길은 우리를 믿음으로 성숙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고 매주일 강단에서 설교를 전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일입니다. 보다 편한 삶을 위한 본능적인 끌림을 거부해야 하기도 하고, 사명이 무거움이 아니라 진정한 기쁨임을 깨닫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말씀속으로 들어가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주어진 삶에 다음에라는 말은 없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말씀에 순종하는 일도 지금의 결단입니다. 누군가에게 생명의 싹을 틔어 주는 섬김도 다음에라는 말은 없지요.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에 바로 순종해 보십시오. 그 은혜는 여러분의 삶에 깊은 고백이 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지녀야 할 생각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15 그러나 여러분은 여호와를 섬기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오. 여러분은 오늘 스스로 선택하시오.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결정하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상이 유프라테스 강 저쪽에서 경배하던 신들을 섬길 수도 있고, 이 땅에 살던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을 섬길 수도 있소. 그러나 나와 내 후손은 여호와를 섬기겠소. 16 그러자 백성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여호와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섬기다라는 히브리어는 아바드עָבַד인데, 이 단어의 뜻은 예배하다, 따르다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많은 것이 다른 우리지만 우리를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게 하시고 한 뿌리로 거듭난 형제로 불러 주신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섬김은 곧 예배입니다. 세상의 차원에서의 섬김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향한 섬김의 자리와 세상속의 빛과 소금의 자리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섬김과 나눔, 돌봄과 이해입니다.

 

성경은 옛자아를 벗어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적당하게 믿고,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 많이 해도 나를 위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구원은 어떠한 조건없이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등지고 산 날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부어 주십니다. 섬김의 사람이 되기 위해 예배할수록 그 은혜가 더 깊어 집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또 다시 못박는 존재임을 깨닫고 무너질때에 괜찮다하시는 큰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마음의 할례를 통해서 우리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걸림돌인지 아니면 디딤돌인지선명하게 알게 됩니다.

 

“15 그러나 여러분은 여호와를 섬기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오.” 여호수아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노년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상태를 보고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의 진멸을 경험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옛자아를 철저히 부인하는 구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2)라고 말씀하지요가나안 땅을 소유한 젊은 출애굽 세대들은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들도 우리가 변화시키면 되지 꼭 다 없앨 필요까지 있을까 생각을 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신앙생활은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기는 것입니다. 단순히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 것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여호수아는 신앙이 대대로 이어져야 하기에 하나님과 이방신 가운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와 내 후손은 여호와를 섬기겠소라는 신앙은 나만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해 십자가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수준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19 여호수아가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여호와를 잘 섬긴다고 하나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오. 왜냐하면 여호와는 거룩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오. 또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오.

 

하나님의 ‘질투’는 또 다른 사랑의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인도함 받기 위해서 가만히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른 곳을 향하던 시선을 멈추고, 하나님의 마음 안에 머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고민의 끝. 소유의 끝. 불평의 끝. 두려움의 끝에서 선택을 하면 또 다른 염려가 따라옵니다. 우리는 모두가 잘 살고 싶은 욕망과 열심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 욕망이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끊임없이 판단하고 선택하고 싶은 욕망에서 누구도 자유롭지가 않습니다하나님의 뜻은 편가르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고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된 삶을 선택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복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십니다. 겨울 한복판에서 따뜻한 봄이 새싹을 틔우며 생명을 알리는 것처럼 거친 세상에서 온기를 품고 살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내는 일. 내 것을 포기하고 들어 줄 수 있는 용기, 다투지 않고 화해 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흉흉한 소식에 믿음 안에 의심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머무르다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단단히 결속되어지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예배 드리는 이곳에서 우리의 신앙에 안주하지 말고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결단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헬라어 프로네오: φρονέω 신약성경에 동사형으로 26번이 나옵니다. 주로 바울서신에서 사용된 단어인데요. ‘생각하다, 질문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의 생각을 넘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뜻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남들이 그냥 하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생각을 설득하십시요.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다 이해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신비라고 부릅니다. 알면 알수록 더 깊어지고, 진리의 힘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이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생각속에 더 깊어지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단어 중에 도키마조: δοκιμζω라는 단어는 분별하다:discernment’라는 뜻으로 성경( 12:2; 1:10; 요일 4:1)에 쓰여집니다. 이제껏 신앙생활을 하며 내가 믿는 말씀들 중에 경험시켜 주신 말씀들을 분별해 보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경험해 보지 않고는 제대로 증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믿음생활을 지켜 봅니다. 주일에 교회 나와서 어떻게 섬기고 있는지, 예배 후에 돌아가며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부모의 물질관, 내세관, 세계관을 보고 배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자리에서 보여지는 믿음의 태도가 우리의 신앙의 상태입니다

 

셋째로, 신앙교육은 언약의 증거입니다.

24 그 때에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겠습니다.25 그 날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약속을 맺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약속을 백성이 지켜야 할 가르침으로 삼았습니다. 이 일은 세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26 여호수아는 이 일들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큰 돌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소 근처에 있던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웠습니다. 27 그리고 나서 여호수아는 모든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이 돌을 보시오 이 돌은 우리가 오늘 한 일에 대해 증거가 될 것이오. 여호와께서는 오늘 이 곳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소. 이 돌은 오늘 일어난 모든 일을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기억나게 해 줄 것이오. 이 돌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나님을 저버리지 못하게 하는 증거가 될 것이오.

 

인생은 믿음의 증거들을 삼는 시간입니다. 부모님이 평생을 살아오신 믿음의 발자취가 자녀들에게는 믿음의 돌이며, 공동체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일도 증거의 돌입니다. 목회자가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며 목양하는 일도 증거의 돌이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체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격려해 주는 일도 믿음의 돌을 남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삶 그래서 내 품을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삶, 섬김의 발자취는 믿음의 돌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녀들에게 생명을 담는 예배가 이어져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시대와 세대가 급격히 변화되어 질수록 후손들에게 신앙교육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날 시대는 가치와 문화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자녀들의 사고가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살아가는 세대를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세대를 읽지 못해서도 안되고 이 시대의 흐름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우상들은 시대마다 우리의 믿음을 유혹하지요. 이러한 빠른 변화속에서 신앙의 이어짐이 끊겨 버리게 되면 신앙의 미래는 없습니다.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흘러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 다음세대들을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가야 합니다. 우리는 홀로 걷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서로의 사랑을 나눌수 있는 광장이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이러한 어울림의 장소가 되면 좋겠습니다. 음악 용어 중에 레가토(legato)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두개 이상의 음을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라는 표시입니다. 신앙 공동체는 혼자만의 믿음이 아니라 자기 수준의 믿음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의 레가토로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충돌은 우월의식에 기초합니다. 말씀을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닫기 위해 엎드리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말 보다는 기도하고 엎드리며 삶을 살아내야 할 때입니다. 사람들은 배우고 아는 것에 그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에 하나님의 생각에 주목해야 합니다. 새시대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이 겸손하게 함께 지어져가는 과정을 배우는 것입니다.

 

한국의 어느 교회에 믿음으로 살아내기를 결단하는 남자들의 예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달에 한번 모여 각자 세상에서 버려야 할 것들을 예배의 자리로 나와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고백하는 모임입니다. 처음에는 많이 모여서 시작했는데 갈수록 인원이 줄어드는 겁니다. 이유를 알아 보았더니 믿음으로 결단하고 살아내는 것이 너무 힘들고 버거워서 결단을 못할것 같아서 점점 인원이 줄었던 것입니다. 맞습니다. 살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어렵습니다. 그러나 함께이기에 때때로 무너지고 나약해져도 같이 갈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택할지 우상을 택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섬길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고백하며 예수님의 가치를 붙들고 살아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나의 평생에 가장 잘한일은 내가 예수님을 주로 섬긴것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고백이 되어야합니다. 여호수아의 결단식을 했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를 섬겼고,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여호와를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 2415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섬길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이 시간 예배를 드리고 나가실 때에 삶의 자리앞에 내가 교회됨을 기억하시며 걸음을 걸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교회입니다.


3/12/2023 | 사순절 메시지 3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Is The Lord Among Us or Not?”

출애굽기 17:1-7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고요의 바다’라는 8부작 드라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2075년을 배경으로 한 SF 웹 드라마인데요. 물이 고갈된 지구를 떠나 달에 버려진 연구기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환경오염이 심각해지면서 물은 급속도로 소모되고, 지구의 물은 바닥나기 시작합니다. 과학자들은 달에 있는 월수(月水)에 적응된 인간을 만들기 위해 비윤리적인 실험을 자행하게 되지요. 달의 기지 발해에서 무수히 많은 인간을 죽이며, 실험을 하다가 달의 기지가 폐쇄되고, 정예대원들이 달의 기지에 들어가 숨겨진 비밀들을 펼쳐내는 내용입니다.

 

미래학자들은 팬데믹을 통해서 인류의 변화를  5년 이상 앞당겼다고 합니다인류의 변화가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요? 과거의 사람들이 오늘을 살아 간다면 우리가 불평하는 요소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욕망과 문명의 이기(利器)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심(利己心)으로 인해 환경이 갈수록 파괴 되어집니다. 인간의 욕망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폭력문화에 쉽게 넘어가지요. 이러한 사회 구조속에서 경제논리로 생명의 문화를 파괴해 버리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의 원리를 역행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속에도 수천년전 애굽의 제국문화의 요소들은 많이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힘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권력을 함부로 대하는 제국 문화속에서 피라미드의 가장 아랫부분에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땅에 대한 꿈을 갖게 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대안으로 가장 약소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 무엇인지 우리에게도 알려주십니다.

 

이스라엘의 긴 역사속에서 출애굽한 백성들은 40년의 광야 시간을 통해 신앙의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애굽의 고센 땅을 벗어나서 더 좋은 삶이 펼쳐진다면 좋았을텐데 광야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광야는 하루 하루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살 수 밖에 없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왜 광야의 장소로 인도하셨을까요? 마실 물이 없는 곳인 르비딤으로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는 상황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시간을 지나며 백성들은 긴 시간으로 인해 광야길에서 죽기 않고 살기만 해도 만족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광야에서 있었던 한 사건인데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하시고 광야길을 떠돌아 다니게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도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서 광야의 인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현대인들은 목마름을 느끼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상실과 두려움, 좌절감과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본향땅을 향한 광야의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우리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 이후의 삶을 가르쳐 주는 시간입니다. 광야의 길은 우리들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제국의 지배아래 종의 습관에 익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인생의 참주인을 통해 철저한 다루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은혜의 바람을 통해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 양식들을 얻었고, 인도하심을 가운데 보호하심을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으로 부터 보호하셨고, 홍해를 건너면서는 온 백성들이 세례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겠다는 결단식을 갖게 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은 하나님의 나라의 원칙과 정신을 알게 하셨고, 성막의 제사제도는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광야 길 곳곳에서 펼쳐지는 일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믿음의 공동체에게 주시는 귀한 메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마실 물이 없는 곳에도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1 <바위에서 솟는 물> 이스라엘 모든 무리가 신 광야를 떠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그들은 르비딤에 진을 쳤지만, 거기에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림을 지나 르비딤이라는 오아시스를 찾아 도착하게 됩니다. 사실 르비딤 지역은 남부 험한 산악지대이며, 시내 광야는 지형이 높아서 이스라엘 대민족이 행군을 하기에는 어려움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림을 보시면 엘림에서 마라까지가 230km인데 시내산이 있는 르비딤까지의 행로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군대에서 행군한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그때를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군대에서 무거운 군장을 매고 40킬로미터를 행군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행군하며 마셨던 수통의 물맛과 당시 주머니 속에 챙겨서 한입씩 깨물며 먹던 초콜릿바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오랜 시간을 행군해서 왔는데, 물이 없는 지역을 만나게 되니까 서로 다투며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는 목마름을 느꼈을 것입니다. 기대했던 것이 철저히 무너졌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맛사’ 하나님을 시험하다  ‘므리바‘  백성들이 ’ ‘다투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3 3백년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하게 된 상황들을 전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단지 험난하고 어려운 길을 행군해서 왔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그곳에 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의 문제를 만나게 되면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두려움과 불안함이 엄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르비딤 지역에도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불평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사람들의 불평은 첫단계로 무의식적 무능력(Unconscious Incompetence) 상태에서 불평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전혀 의식 할 수 없는 무지한 상태에서의 불평을 의미하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불평의 조절 능력이 없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도 모르게 불안이 엄습하고, 불평 할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말씀을 날마다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폴 트립의 ‘목회, 위험한 소명’이라는 책에는 “오랫동안 성경을 대하다 보면 광대한 지혜가 깃들어 있는 위대한 구원 이야기에 더 이상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오랫동안 속죄를 설명하다 보면 십자가 밑에 서있어도 기쁨도 없고, 눈물도 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다른 사람에게 제자훈련을 시키다 보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이 더 이상 놀랍지 않게 된다. 오랫동안 성경의 신학을 배우다 보면 그 목적이 개인의 거룩함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너무 규칙적이고 일상적인 일이 되다 보니 더 이상 마음에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우리는 익숙함의 한계를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익숙함의 자리를 뛰어 넘어서 기도하게 될 때에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존한계의 3.3.3 법칙이 있습니다. 공기 없이는 3, 물이 없이는 3, 식량이 없이는 3주가 건강한 인간이 느끼게 되는 생존한계라는 것입니다. 물론 더 길게 버틸 수 있는 경우들도 있지만 보통의 경우를 생존한계로 정한 것입니다. 영혼에도 골든타임이 있습니다. 삶에 어려움을 찾아오게 될 때에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해지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려운 순간에 인간은 자신이 따르던 세상의 우상들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생명을 두고 하는 기도에는 다른 어떤 것들이 개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가 막힌 고통의 세월 40년을 돌아도 우린 여전히 광야에 있을 수 있습니다. 끝없이 일어나는 불평과 원망으로 광야의 자리를 맴돌게 될 수도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문화속에서 익숙했던 종의 습관을 완전히 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옛사람의 기질을 거부하고 철저한 신뢰와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거룩한 갈망이 임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는 장소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광야 인생길에 성경이 주는 답은 십자가이지요. 이해 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 믿음으로 해석할 수 없는 문제들, 명확히 알 수 없는 고통의 문제의 답은 그리스도가 달린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외치시며 죽으신 십자가에서 세상의 행복과 가치는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선물인 은혜와 사랑이라는 통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행복을 말하지만 교회는 은혜를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끊임없이 이기적인 욕망에 속절없이 이끌리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은택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곳곳에서는 자신의 왕관을 외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세상속에서 하나님을 증명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불평 안에 우리가 원하는 욕구가 담겨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인간의 욕구가 찢어지는 순간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황제가 공포한 것이 아니고, 언덕에서 죄가 없으신 한 사람으로 오신 예수가 소리치며 죽었던 그 자리에서 선포된 것입니다. 죄의 중력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며 누구도 설수 없는 곳에 서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어진 모든 상황들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함을 믿을지 아니면 불평하며 원망할지 그 사이에서 믿음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백성들은 바위로 부터 물을 공급 받았습니다.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들은 당장이라도 나를 돌로 때릴 듯이 보입니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앞으로 나아가거라.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몇 사람 데리고 가거라. 그리고 나일 강을 칠 때에 썼던 지팡이도 가지고 가거라. 6 내가 시내 산 바위 위에서 네 앞에 설 것이다. 지팡이로 그 바위를 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백성이 먹을 수 있는 물이 나올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바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곳마다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분이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댄동산 같고 끊어지지 않는 샘 같을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모두가 같은 영적 음식을 먹으며 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느니라.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 마셨는데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느니라” (고전 10:3,4)

분열과 논쟁에 가득한 고린도 교회가 따라야 할 모범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 시절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하셨던 광야의 교회는 세상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384장은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주님은 우리 앞에서 물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간 삶이 고달프십니까? 인생에 목이 마르십니까? 가만히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요. 그 샘물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한 샘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의심의 순간에도 기도합니다. 백성들은 불평을 하지만 모세는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습니다. 교회의 리더들은 불평하는 백성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불평의 상황을 이길 수 있는 일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광야가 펼쳐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이 광야였습니다. 40년이라는 시간동안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향해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터져 나오는 물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석을 친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고난 받으신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의  죄의 무게 보다 더 크신 사랑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우는 꽃은 없습니다. 세상속에서 우리 영혼도 계속 흔들릴 겁니다. 그러나 이 흔들림 속에서도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지요. 일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커져 갈수록 신앙의 힘에 사로잡히는 시간은 늘어날 것입니다.

 

셋째로, 표적은 본향 집을 향한 이정표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며 당신이 메시아라면 표적 보이기를 요청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16:4)입니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요나가 큰고기 뱃속에서 밤낮 삼일동안 지낸 사건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기대한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요나가 삼일 동안 지낸 것은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이외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어떤 표적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보이지 않는 광야길에서 힘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을때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심을 바라 보십시요. 이것이 구원 이후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숙제입니다. 기억하십시요. 바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구원 이후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부활은 세상 사람들에 경험되지 않는 생명의 사건입니다. 구원 이후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 사랑안에 거하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시간을 늘려가야 합니다.

 

7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 하고 여호와를 시험했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맛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백성이 다투었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 라고도 불렀습니다.

 

생명의 통치를 우리의 수준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마실 물이 없는 곳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인생의 기초가 되시는 그리스도 반석 위에 삶을 세워가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성도들의 삶에 보여 주시는 표적은 우리의 종착지를 향한 이정표일 뿐입니다. 때때로 인생에 표적이 없어도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속에서 ‘복’이 아니라 ‘성장하고 성숙’ 되어지는 과정을 인도하시고 동행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져 주셨고, ‘하늘 소망을 바라보는 간절한 기도의 손을 붙들고 계십니다.

 

무너져 있던 자리에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의 능력이 믿어질 때에 나 지금은 땅을 벗삼아 살아 갈지라도 주님 계신 하늘의 소망 품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말씀으로 사역하게 하시는 은혜의 자리 뒤에는 말씀으로 살아 내기 위하여 애쓰며 살아온 흔적이 남아있고 그 걸음들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케임브리지 성도 여러분

 

햇빛처럼 따뜻하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순절 우리의 삶의 시간에 가득 채워 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배를 붙들기 위하여 그 간절함으로 나의 나 됨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 오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5/2023 | 사순절 메시지 2

예수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평안 Peace with God in Jesus Christ

로마서 5:1-8

사순절 두번째 주일입니다. 지난주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에 대해서 나눴고 오늘의 주제는 평안입니다. 스톨의 색깔의 의미도 알려드리기로 했지요. 보라색은 강림절과 사순절에 사용하게 되는데, 사순절기의 보라색은 참회를 상징합니다. ‘편안함평안함는 그 뜻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평안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줄수 없는 평안을 너희에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주일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예수님 외에 두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한 여자는 예수를 수태한 유대인 여인이고, 한 남자는 예수를 죽인 로마 관원입니다. 예수가 육신의 몸을 입기 위해서 소녀 마리아는 하나님과 평화를 이뤄야 했습니다. 자신의 편안함을 버리는 것이었죠. 처녀의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임신하는 일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신명기 법에 의하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반면에 로마 관원이던 빌립보는 자신의 위치와 상황속에서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스스로의 양심을 저버렸습니다. 사도신경은 “…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라고 분명히 적시하여, 마리아의 순종과 빌라도의 허물을 오는 세대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그 자리에서 자신과 예수의 십자가와는 무관하다면서 물로 손을 씻었다고 기록합니다.( 27:24) 그러나 사도신경은 지상에서 예수님의 생명의 시작을 마리아의 믿음으로 알리고 있으며, 예수께 십자가 사형 선고를 내린 사람으로 빌라도를 2천년에 걸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이 황금기를 이르던 시대에 한 사건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입니다. 이 십자가 처형은 당시 로마의 평화와는 다른 것입니다. 로마의 평화는 정치, 경제, 군사적 안정을 목표로 다른 나라들을 억누르는 것입니다. 로마의 평화는 약소 민족들 입장에서는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한 예가 70년경에 디도 장군에 의해서 유대 예루살렘성이 함락되고 도시 전체가 초토화 된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평화는 지배 문화가 정당화 되도록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힘과 권력으로 만든 평화이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죽이려는 십자가에 달리시며 평안을 주셨습니다. 주가 주시는 평안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주신 평안함입니다. 로마의 평화와는 차원이 다른 것입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손해 보고 자아를 죽이며, 소란스런 세상에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는데 주일학교 때에 부르던 노래 가사가 생각이 났습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 뿐 그 지겨움 끝없네. 그러나 주 여기 계시듯 우리가 아들 믿을 때에 그의 영으로 하나돼’ 2022224일 시작 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한해가 지나도록 팬대믹 보다 더 끔직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세상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평화를 원하지만 세상에 그 평안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수고와 노동, 질병과 저주, 아픔과 고통은 아담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인해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씀합니다.(5:21)

 

당시 로마에 있던 교회들에게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죄의 결과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풍성한 은혜를 대조 시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로마서 67장으로 가면 죄는 사람들을 종으로 만드는 아주 인격적이고 실제적인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왕과 같이 세상을 장악한 세력입니다. 즉 모든 인간이 죄의 종노릇하는 것이지요.

 

죄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안 짓고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 안에  ‘본래부터 죄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침몰하는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살기 원해도 그 배는 결국 침몰하게 되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몰하는 배에서 절망 속에 있는 당신을 살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 진리가 기독교의 출발입니다. 즉 성도의 삶은 구원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더 이상 악한 권세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5:18)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물의 희생제사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흠이 없는 제물을 죽여 죄를 동물의 피에 전가해서 하나님께 화목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삶속에서 부지중에 지은 죄를 위해서는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이 제사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하지 말하야 할 것을 한 경우, 고의적으로든, 무지로 지은 죄든 그 죄를 제물에 전가해서 1년에 한번 속죄일에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이웃끼리 다투거나 범하는 모든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속건제물을 드리며 사함을 얻어야 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매일 서서 섬기며 희생제물을 드렸지만, 그 제사만으로는 결코 모든 죄를 없앨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영원하고 큰 대제사장인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단번의,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셔서, 이후로는 자신의 원수들이 자신의 발등상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10:11-13)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가 얻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현실속에서 평화를 누리기 보다는 좌절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조차 느끼지 못하고 편안한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거부하는 세상의 힘은 우리를 유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의 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5:1 <의롭다 함을 얻은 결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또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가 벌이던 전쟁이 그치고 고요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반항하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함으로 잠잠해 지는 것이지요.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저항하던 우리의 혈과 육은 완전히 패했으며, 마음속 깊은 곳에 끓고 있는 용암과도 같은 혈기, 욕심으로 물든 죄가 십자가의 보혈로 잔잔해 지는 것입니다.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갈 때는 모든 것이 문제로 보였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는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던 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니까 그것까지도 주의 십자가를 깊이 알게 되는 길이 될 뿐입니다. 십가가에 달린 주님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사랑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사순절기는 우리가 주님의 품을 떠나지 않도록 머무르는 훈련의 시간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애써 동참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복음 안에 머무르며 주가 주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라는 것이지요.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월요일 교우들의 참여로 새벽기도 줌이 100명이 넘었다는 것을 새벽 예배를 드리고 나서야 사람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사용하는 줌 어카운트가 제한 인원이 100명으로 되어 있어서, 지난 월요일 새벽기도회에  100번째 이후로 들어 온 분들은 새벽예배에 접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들어 오지 못한 교우가 하나님을 만날 절호의 기회였다고 생각해 보게 되니까 책임에 대한 무거움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그릇을 넓히라고 하셨습니다. 너의 그릇에 영혼들을 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순전한 그룻으로 영혼들을 담아내라하시는 마음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사순절 절기 동안 줌플랜을 바꿨습니다. 이번에 잠시 바꾼 플랜은 500명 제한입니다. 금요 예배를 드리고 차 운행을 하는데 한 청년이 새벽기도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함께하니까 너무 든든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하는데, 제 마음도 뜨거워 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뒷모습으로도 힘을 얻고 위로를 얻는 지체들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순절 영적 순례길에 더 많은 교우들이 동행하며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순례길을 걷다 보면 우리의 믿음도 조금씩 성장해 갑니다. 성장통과 함께 키가 자라는 아이들처럼 매일 십자가를 붙들며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는 영적근육이 길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매일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화를 믿음으로 누리는 것이지요.

 

째로 의의 열매는 연단된 인품과 소망을 낳습니다.

3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4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환란을 당해도 즐거워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할까? 환란을 어떻게 자랑할 수 있지? 십자가가 어떻게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의 능력은 알지만 십자가가 내 삶에 오는 것을 피합니다. 버티고 머무르다가 십작가가 정작 삶에 해로운 것이라 느껴지면 떠나갑니다.

 

그런나 우리는 환란을 즐거워하고 자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고난과 절망, 생존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는 생각을 멈추게 되고, 스스로 슬기롭다는 죄의 본성,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에 저항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눈물을 보게 되며, ‘하나님께 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순종을 통해 영원한 승리를 얻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며 눈물로 세상과 사람들을 끌어 안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세력이 예수의 발 아래에 짓 밟혀서 굴복되게 하셨습니다성도들은 환란이 인내를 낳고, 그 인내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인품과 하늘의 소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베토벤은 최소한 하나의 곡을 만들기 위해 열두번 이상을 다시 썼다고 합니다. 천지 창조를 만든 하이든은 끊임없이 기도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작곡을 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걸작 최후의 만찬을 8년동안 무려 2천번이나 스케치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즐겨 먹는 꿀 한 숟가락은 꿀벌이 42백번이나 꽃을 왕복하며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어사전을 집필한 웹스터는 36년 동안 밤낮으로 일하여 사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모든 나라의 국가대표 선수들은 고된 훈련을 즐거워 합니다. 고된 훈련이 자랑이 되는 것은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고된 훈련을 하지 않고 영광를 얻게 되는 선수들은 없습니다. 인내를 통해서 얻게 되는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영광이라는 단어는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그 영광을 조금 흉내 낼 뿐이지요. 세상의 영광은 하늘의 영광을 조금 맛보는 것 일뿐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고통은 따라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입니다.

인간은 기쁨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확신과 불신의 자리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희망의 끈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란이 없다하지 않으시고 환란을 당하더라고 소망을 붙들면 기대를 져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16:33)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을까요? 모든 것들이 풀처럼 지나가지요. 그러나 환란 중에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내게 필요한 시간이라고 기뻐하게 되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심을 받아 들이며 믿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의의 열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5 이 소망은 절대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조셉 조렌티니라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서 도어맨으로 53년 동안 근속한 사람이었습니다그는 53년 동안 3일만 결근했다고 합니다. 글로 보는데도 성실함과 꾸준함이 얼마나 힘든일인지 느껴집니다그가 78세로 은퇴를 하게 되자 기자들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런 단순한 일을 어떻게 53년 동안이나 계속할 수 있었습니까?” 하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나는 사람을 좋아하지요. 호텔 도어맨은 날마다 새 사람을 만나는데, 이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손님을 맞이할 때 예수님을 맞이하 듯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예수님이야기를 합니다그러므로 이 호텔 현관은 53년 동안 제게는 천국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십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합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찬송가 304장에 보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두루마리에 먹으로 해서 글을 썼잖아요. 넓은 하늘이 화선지이고, 깊은 바다가 전부 먹물이라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다이 문장을 몇 번이나 쓸 수 있을까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만큼 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부터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하셨다는 증거가 2천년 전 예수가 지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 것입니다.(6)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에는 제한이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도 우리는 가장 소중한 자녀들을 내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가장 소중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8) 사순절기는 그 사랑을 채워가는 시간입니다.

우리 곁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보시고, 만나는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발견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우리 손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그 사랑의 능력을 흉내 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말씀이 실제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담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모인 자리에서 먼저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삶이 되도록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에도 나의 열심인지 하나님의 열심인지 분별하십시오. 비판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사랑은 눈을 뜨게 합니다

어느날 저녁에 교회에 기도하러 왔는데, 그날따라 성가대의 한자리 한자리부터 오케스트라를 지나 회중석 2층까지 손을 대고 기도했습니다. 의자는 빈자리였지만 체온이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다함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깊고 뜨겁게 전해 질 수 있도록 함께 지어져 가는 믿음의 여정을 걷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말로만 전하는 신앙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우리의 교회와 지체를 마음 다해 사랑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26/2023 | 사순절 시리즈 I

하나의 몸과 많은 지체 One Body with Many Parts

고린도전서 12:18-27, 골로새서 1:18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프랑스 남부의 국경마을에서 시작해 스페인 북서부 산티아고에 있는 대성당까지의 거리가 대략  800㎞라고 합니다. 이 길은 하루에 20~30km를 걷는다고 가정해 보면 약 30~35일이 걸리게 됩니다. 긴 역사가 살아 숨쉬는 이 길을 걸으며 많은 이들은 성찰의 여정을 갖게 됩니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 아마도 그 걸음에는 자신들의 삶의 다양한 스토리가 함께 하고 있을 겁니다. 삶의 낙심과 가지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욕구, 끝없는 외로움, 허전함의 마음들은 그 길을 걸으며 또 다른 여유와 평안함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존번연(John Bunyan1628-1688)은 침례교 목사이자 천로역정의 작가입니다. 영국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서 대장장이 일을 하며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청교도 혁명에 의회군으로 참여하며, 내전이 끝난 후 고향에 돌아왔지요. 이때 번연은 동료가 전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천로역정 안에 구원받기 위해 괴로워 하는 기독교인들이 아름다운 집을 향해 언덕 꼭대기 십자가에 도착하자 마자 짊어졌던 무거운 짐은 아래로 떨어지고 그들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안에 있는 은혜의 개념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놀라운 선물이며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사순절기에 매년 지키는 40일 영적 순례의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기도의 자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자리에 친히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사순절기를 통하여 우리의 무거워진 짐을 내려놓고 말씀으로 평안해지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사순절기를 준비하며 제 마음을 두드린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인데요. ‘몸의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땅끝에 있는 심정으로 기도하는 교우들이 생각났습니다. 교우들을 위한 기도가 마칠때즘에 교회는 고통 당하는 지체들이 마음껏 울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에 제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갈 길을 찾지 못해 지쳐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생기를 줄 수 있어야 하고, 삶에 거친 풍랑이 불어와 위기를 만난 지체들이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믿음 생활을 하다보면 곤고한 날도 찾아 오고, 근심과 걱정에 뒤척이며 잠 못 이루는 날들도 찾아오기도 합니다. 밤이 깊은 긴터널을 통과하다 보면 몸이 피곤하고, 영혼이 낙심 되면 길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때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힘은  믿음으로 서로가 떠 받쳐 주는데서 나옵니다. 믿음은 고난 당한 이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은 땅끝에 이르러 비로소 하나님께 절실히 기도하게 됩니다. 사순절 십자가에 우리의 영혼을 걸 만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도 짐이 될 것입니다. 이 시기를 통해 주님의 구원의 손길을 바로보는 이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삶의 문이 열어 주실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한다는 것은 십자가 아래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교회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부모의 품을 잃어버린 지체들이 하나님의 품을 느끼게 해주며, 낯선 땅에서 고향을 잃어버린 이들이 아름다운 여정을 향해서 다시 걸을 있는 힘이 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하나의 몸과 많은 지체즉 그리스도의 몸을 비유하며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받은 은사를 가지고 자기 이름을 높이는데 사용하거나 또 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두고 등급을 메기며 교만의 방편으로 삼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받은 은사가 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다른 은사를 가진 이들에게 기도의 깊이를 모른다고 무시한다면 공동체는 분열이 되는 것이죠. 예언을 하는 이들은 방언만 하는 이들을 열등하다고 말하고, 병을 고치는 사람은 섬기는 은사를 받은 분들을 낮게 평가한다면 은사는 분열의 도구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는 주신 은혜에 따라서 믿음의 분량대로 섬기는 도구입니다. 은사를 분열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성령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고 공동체를 흔들리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을 이루어야 한다고 편지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다양한 지체들이 통일성을 이루며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을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한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교회에 속해 있는 지체들입니다.

18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몸 안에 각각 다른 기능을 하는 여러 지체를 두셨습니다. 19 모든 것이 하나의 지체뿐이라면 몸은 어디 있겠습니까? 20 그러나 지금 그런 것처럼 지체는 많아도 몸은 하나입니다.

인간의 몸은 여러 기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참 신비롭습니다. 피곤한날에는 어깨가 뻐근하고 머리가 아파옵니다. 잠시 쉬면 금새 또 괜찮아집니다. 교회의 모든 교우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십자가 보혈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몸은 혈액순환이 잘 되어야 건강해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겨 주셨고 한몸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지체들이 교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서로 신비로운 관계를 맺고, 서로를 위해 섬기고, 마음을 다해서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매주일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며, 성찬을 하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심을 고백하는 세계 모든 교회는 공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공교회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공통의 분모를 지닐 때에 서로에게 속하게 되고, 그리스도께 기대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거룩한 공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또한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죽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먼저 살아나셨으므로 모든 것의 으뜸이 되십니다. ( 1:18) 교회의 으뜸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백하는 이들은 새로운 삶을 살며,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며 사랑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들은 세상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게 됩니다.

가나안 혼인잔치에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것을 보시고, 성전 안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을 치워버리고. 3일 만에 다시 성전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에 비로소 제자들은 이 말씀을 기억했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부활의 생명에 가까이 가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건강한 세포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망가지게 하는 세포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영적으로 순결을 유지해야 합니다. 순결한 마음은 분열하는 마음을 들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며 기도하는 것이지요. 외적으로는 건강해 보여도 몸을 해치는 세포들이 많이 생기면 결국은 교회공동체의 질서가 파괴됩니다. 유기적 생명의 관계가 유지되려면 공동체 안에서  생명을 살리는 세포들이 왕성하게 일어나야 합니다. 판단과 정죄, 분열과 분리, 위선과 형식주의 신앙 안에는 생기가 없습니다. 생기가 없는 것은 몸속에서 병이 자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특성을 지녀야 할까요?

첫번째 특성은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참된 것이란 부족한 지체들을 사랑으로 설득하며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눈이 손 더러 필요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손이 칼에 베이거나 다치게 되면 입은 자연스럽게 그 아픔을 표현합니다. 눈에서도 눈물이 나오게 되지요. 이것이 사랑 안에서 서로가 참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몸 전체가 아픔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어떤 반응도 없다는 것은 연결이 되어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두번째 특성은 개개인의 성도들이 다른 영적인 은사를 풍성하게 계발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체들이 자기의 이름으로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은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은사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사는 뜻에 맞게 덕을 세우며 주님을 높이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지체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뤄가는 것이기에 다양성 가운데서도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세번째 특성은 교회는 강력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1세기 지중해 연안은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자유인도 있고, 종들도 있었습니다. 헬라어는 사용하는 사람들과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피부색도 출신과 고향도 달랐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우월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지요. 그런데 교회는 한사람을 사회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께 소유된 백성이지요. 전에는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비를 얻는 사람들입니다.(벧전2:10) 성령의 역사를 통해 문화, 신분, 인종, 성별, 지위의 벽이 완전히 무너져야 합니다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의 교제를 통해서 거룩한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백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속의 교회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들이 반대로 교회속에 세상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에 흥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포용하지 않는 것은 한 몸인 지체들이 몸에 붙어 있지 않다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기 비판의 능력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속의 구별된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무교회주의자처럼 행동합니다. 이것도 교회속에서 세상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고 독립적으로만 행동하는 신앙도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둘째로, 교회는 부족한 지체가 더 존귀해져야 합니다.

22 이와는 반대로 몸에서 더 약해 보이는 부분이 오히려 요긴하며, 23 몸에서 고귀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지체를 우리는 더욱 고귀하게 대하고 볼품없는 부분들을 더 품위 있게 꾸밉니다. 24 반면에 우리 몸 중에서 아름다워 보이는 부분들은 특별히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의 지체들을 함께 모아 부족한 지체들에게 더욱 큰 영광을 주셨습니다. 25 그래서 우리 몸에 나뉨이 없게 하시고 몸의 여러 지체들이 서로 돌보며 살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회사나 기업이 아닙니다. 교회는 갑을관계나 상하관계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그 은혜 아래에서 형제 자매가 동일한 인격을 지닌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는 사회적인 지위로 판단하거나 우열을 가려서도 안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들이 서로이 든든한 토대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절망의 무게를 지닌 지체들이 하늘의 희망을 노래하도록 힘이 되어 주고, 그들의 고된 삶에 주님의 빛을 비춰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연약한 사람들, 유약한 사람들이 오히려 ‘요긴하며’라고 말씀합니다.

몸에서 고귀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지체를 더욱 고귀하게 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내게 부족한 신체 부위를 더 아름답게 꾸미게 되지 않습니까? 볼품없는 부분들은 더 신경이 쓰이고 몸의 여러 지체들의 도움을 받지 않습니까? 아름다워지는 것은 날마다 부족한 부분을 꾸미기 때문입니다. 몸의 일부분 중에 아픈 부위가 생기면 의사를 찾아가 도움을 구하고 치료를 받는 이유도 아픈 부위를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교회 안에서 다른이의 허물이 보인다면 사랑으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모든 사람은 타인을 배려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삶은 나를 둘러싼 세계가 하나님의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한몸을 이루며 연약한 지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수 있도록 섬기십시요. 섬기는 당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가 생명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몸속에 오장육부라는 장기는 약하기 때문에 몸의 안쪽에 배치하셨습니다. 대부분 기관들은 약한 것들은 몸속에 있습니다. 귓속에 있는 작은 달팽이 관 한개의 이상만 생겨도 어지러워서 몸 전체가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신비롭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몸의 기관들은 서로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고 서로에 대한 헌신 위에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교회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25 그래서 우리 몸에 나뉨이 없게 하시고 몸의 여러 지체들이 서로 돌보며 살게 하셨습니다. 26 몸의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몸의 지체입니다.

몸의 한 지체의 고통을 함께 당하라는 말씀 안에는 고통받고 있는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늘의 백성은 순례의 길에서 서로가 도와주고, 떠받치고 부축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교회로 받아 들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 교회는 개개인이 전체라 주장할수 없지만 각각의 소중한 존재입니다

교회안에서 우리는 지치고 고된 인생을 사는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품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에 노크를 하고 문밖에서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디. 아픈 마음을 곁에서 이해해 주고, 때로는 기다림 가운데 선한 영향력으로 곁에 있어주면, 몸의 한 지체들이 공동체 안에서 홀로가 아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서로를 향한 배려와 공동체의 질서에 자신을 맞추는 일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미숙한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서 교칙을 배우며 사회성을 습득하는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은혜의 통치 아래 공동체성을 배워나가도록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삶의 자리에서 진정한 작은 교회가 되어가는 과정을 감당하게 될때에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은 아는데 기도의 힘은 아는데 기도해도 말씀 안에 있어도 여전히 우리의 연약한 본성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대로 살때에 나의 삶의 모습이 누군가를 지켜낼 힘이 되고 연약한 이들이 딛고 올라갈 언덕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여러분의 삶을 응원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가 함께 동행하기 위해서 존재 자체를 먼저 인정해 주시고, 교제하는 모든 지체들이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점점 고독해지고 외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해짐으로 인해 우리의 가슴을 훈훈하게 했던 정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흐르는 강물을 거스르지만 죽은 물고기는 물결따라 흘러갑니다. 케임브리지 교우들은 세상속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필요한 존재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수없이 많은 만남과 삶의 현장에서 작은 교회가 되어가는 은혜를 누리시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지체들과 사순절 기간의 깊은 영적 순례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인생의 깊은 밤이 정말 길다고 느껴지고 삶이 너무 고되다고 느낄때마다 내가 선택한 믿음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끌어내는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지체들이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갈수 있도록 함께 사랑으로 이 길을 걷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19/2023 | 기도시리즈 V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Give Us Today The Food

마태복음 4:1-4, 6:11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번주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에 이르기까지 40일동안 그리스도의 빛이 가장 어두워지는 영적 여정을 걷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기 위한 영적 순례의 여정으로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두 가지의 양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말씀이고 또 하나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어떤이들은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무익한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죄를 회개하기 위해 음식을 삼가며 금식을 하는 것은 영적으로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금식을 통해서 욕망과 욕구를 죽이고 십자가를 더 가까이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주님은 육체는 악하고 영혼만 선하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가 마음 안에 머무를 때에 식탁의 자리도 떡을 떼며 소중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일상의 변화로 이어지며, 예배는 삶의 자리와 분리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주기도문의 간구 중에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날은 기도하지 않아도 일용할 양식이 넉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먹고도 쌓아 둘 만큼 넉넉한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의 기도가 어떻게 느껴질까요? 이제 일용할 양식의 기도는 우리의 삶과는 편차가 너무 크게 느껴지기에 이 기도는 배고픔을 겪는이들에만 필요한 기도일까요? 아니면 가난에 굶주리고 있는 빈민국가의 사람들에만 해당되는 기도일까요? ‘

 

일용할 양식의 원어는 헬라어로 πιούσιος, ‘에피우시오스입니다. 로고스 주석에 보면 에피우시온단어의 뜻은 날마다의 것을인데, 이 단어는 에피우시아의 합성어입니다. ‘우시아에 대한 단어의 의미를 추적해 보면, 첫째는 존재하기 위하여 필요한이란 뜻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날마다 그날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달라는 의미겠지요. 둘째는 오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내일의 위한 양식을 공급해 달라는 의미입니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다가오는 날을 위하여 공급되는뜻으로 일용할 양식을 받아들였습니다. ,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때 앞으로의 24시간을 가리킵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루 동안 필요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두가지의 뜻은 하나님의 시간에서 보면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점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의 인식 차원이 아니라 다차원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가지 해석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시간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현재는 과거가 되지요.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거하시려면 우리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행하실 하나님의 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억하고 기념하라 말씀하고 있는ㄴ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고 기억합니다. 예배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예배자가 현재에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영원한 시간과 교차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른 상황과 다른 시대에 쓰여진 책인데 모든 책이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알게 해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를 성령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많은 성서의 기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2천년 전 그리스도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주셨구나 믿어지는 일도 성령께서 해주십니다. 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되고, 주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어떻게 간섭하시는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시간이 우리의 시간 안에 뚫고 들어 온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안식과 쉼을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는 것이 힘이 들고 불편한 일이라면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아가는 일과 봉사하는 일들이 불편하고 고생스럽다는 것은 이미 믿음생활이 누림이 아니라 의무가 되어 형식, 위선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를 하는 것도 이러한 개념에서 보면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들어오심간섭하심은 인류의 역사 전체에 걸쳐 이루어 졌고, 지금도 이루어 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한몸을 이루었습니다. 마치 밀가루들이 하나로 모여서 빵이 되듯이 떡을 떼는 교인들은 하나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한몸이기에 연약한 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됨을 기억하며 일용할 양식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기도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떡도 포함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인간이 육체적 존재임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그래서 음식으로 인해 몸을 해치면 안됩니다. 몸이 아프면 밥맛을 잃게 됩니다.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소화기관이 정상이어야 하고, 식욕이 있어야 되는데 일용할 양식을 잘 먹을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들은 식탁의 교제속에서 이 은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지요.

 

디너처치(dinner church)라는 것을 들어보셨나요? ‘평범한 저녁그리고 교회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인데, 말 그대로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먹으며, 비기독교인들을 초대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 주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디너처치(dinner church)라 이름한 것이지요. 초대교회의 문헌인디다케에 보면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시오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의 범법들을 고백하여 여러분의 제사가 깨끗하게 되도록 하시오.”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교회의 건물이 없었으니까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에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떡을 나누고(성찬제사(예배)를 가정에서 드리며 생명의 교제를 나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갈릴리 호수로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제자들은 다시 고기 잡은 일로 돌아가서 밤새도록 잡지만 고기 한마리 잡지 못하고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우고 물고기를 구우시고, 떡까지 준비하셨습니다배고픈 제자들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을 알고 마련하시고 기다리셨습니다.(21교회마다 공동체를 위해 식당에서 섬기시는 분들의 손길을 보면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왜 헌신하는 것이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공동체의 식탁을 위해 주님의 사랑으로 준비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 가족모임, 팀모임,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이런 일들이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모임 가운데 믿지 않는 이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믿음이 자라가고 섬김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자주 만나서 식사를 함께하면 그 사람과 친밀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학교에서 배운 것은 밥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게 하시는 훈련입니다. 오늘날 일용할 양식의 개념에는 자녀들을 위한 양육비가 필요하고, 집을 소유하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렌트비, 그 밖에 하루 동안의 사용하게 되는 모든 양식이 충당이 되어야 합니다. 이뿐입니까? 소비문화는 소비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라고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대중매체를 통해서 특정상품이 유행이 되면 소유하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생각을 지니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입학시킨 것입니다.

 

광야라는 죽음의 땅에서 매일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40년이라는 방랑생활 동안에 매일의 양식인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주시며 그들을 낮추시고 훈련하셨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학교가는 자녀에게 일주일 전에 지었던 밥을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라면 매일 새밥을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 광야의 시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날마다 새로운 양식을 주시며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대는 밥만이 아니라 일용할 마음, 일용할 삶의 활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삶의 의미와 새마음, 정결한 마음이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매일 공급하시는 삶의 너머에 하나님이 계심을 보아야 합니다. 시간도, 건강도, 물질도 주어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함 가운데 하나님이 매일 공급해 주시는 것에 대한 훈련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만나가 하늘에서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안되었을까요?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배가 고프다고 불평한 것이 문제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새밥을 해주시며 출애굽 공동체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사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로 나가십니다. 예수님 정도면 광야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 사역을 하셔도 되었을텐데, 주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십니다. 40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를 하셔서 배가 고프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때 시험하는 자가 와서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돌을 떡으로 바꿔 보라고 하니 주님은 처해진 현실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떡속에 담긴 삶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와 같은 고통의 시간을 하나님은 언제든지 거둬 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광야의 시간은 자신의 백성들이 영원한 생명의 관점을 바라보며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다루심입니다. 예수님은 시험하는 자를 쫓으실때에 신명기 83절을 기억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8:3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낮추시고, 굶기셨다가 만나를 먹여 주셨소. 만나는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조상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오.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까닭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오.”

 

예수님은 성도들이 세상속에서 단지 떡 하나에 의지해 사는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육체적 생존방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에서 진리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일용할 양식을 내가 열심히 벌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라고 착각합니다. 식당에 가서 내가 번 돈을 지불하고 먹었으니 내가 이룬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생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기에 우리가 살아 있고, 매일 생명력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교회 역사학자가 알렌크라이더가 쓴 초대교회 교인들의 일상을 보면, 초대 교인들은 도시의 음식을 먹고, 시민으로서 모든 일에 참여하지만 거주하는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초대교인들은 도시 문화속에 들어가서도 당시 로마 문화를 비판하며 시대 흐름에 도전하는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며 거주하는 나그네들이라 불렸습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힘이 없고 경제적 능력이 없어도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해 억눌린 자들을 자유로 인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새하늘과 새땅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은 일용한 양식을 채우는 일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400년 종살이에서 출애굽 시켜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루라도 잊어 버리시면, 이스라엘 전체가 굶게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일용할 양식에 담긴 공동체의 과업을 발견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에게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기도문의 구성을 보면 하나님께 대한 기도의 간구가 나오고 우리를 향한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를 위한 첫번째 간구가 일용한 양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라는 수식어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라는 말 안에는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 단지 먹을 것만이 아니라 어려움으로 하루를 살아갈 힘 조차 없는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양식은 단지 먹을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 모든 자원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는 일용할 양식이 넘치는 사람은 이웃과 나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있는 존재들이기에 일용할 양식을 더 누리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취하고 부당하게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을 드리는 성도들은 우리에게로 시작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기도의 그릇을 넓혀가야 합니다. 한국사람은 어릴때 내 아빠 내 엄마 하지 않고 우리 엄마 우리 아빠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릴때부터 자연스럽게 우리의 개념이 내 자녀, 내 가족, 내 식구가 먹을 양식이라는 개념에 익숙합니다. ‘우리에게라는 수식어는 형제의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 절박한 상황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만나를 남겨 두면 다음날 다 썩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탐욕에 물든 마음, 욕망의 노예로 살게 되는 삶은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허기진 마음을 채우려고 소유하고 또 소유해도 배고픔이 없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신가요?

 

<부시맨Bushmen>이라는 영화를 보셨지요? 원제는 ‘The Gods Must Be Crazy’인데 , 영화속 배경은 아프리카 덤불 속에 사는 부시맨들입니다. 경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 상공을 낮게 비행하던 백인이 콜라를 마시고 빈 병을 비행기 밖으로 던졌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병이 부시맨 마을에 떨어지게 됩니다. 부시맨들에게 하늘에서 내려 주신 그 병은 신비로운 요술 방망이 같기도하고, 밀가루 반죽을 밀어 보기도 하고,  과일을 놓고 내려치니 과일 즙이 됩니다.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장난감이었지요. 용도가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문제는, 하늘이 내려 주신 그 신비한 콜라병을 서로 독차지하려다 부시맨들이 그만 원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침내 족장은 자신이 아는 세상 끝까지 가서 콜라병을 절벽 아래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부시맨들은 다시 평화를 되찾게 됩니다. 콜라병 하나 때문에 온 부시맨이 원수지간이 된 이유는, 하늘이 내려 주신 것을우리가 함께 쓰려 하지 않고 저마다혼자 독점하려 하니, 콜라병 하나를 놓고도 분란이 생겼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은 빵을 저축하고 싶어합니다. 성공하고 싶고, 좋은 차를 타고 싶고, 유명해 지고 싶고, 세상속에서 거장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먼저 지녀야 합니다. 성공과 축복만을 향해서 기도하는 일은 자본주의적 가치일 뿐이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의 메시지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기도는 청지기의 삶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에게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바르게 모으고 사용하겠다는 기도입니다. 양식을 왜 모으는지, 쓴다면 왜 쓰는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명확한 기준과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 내 2024년 하계올림픽 개최 후보지로 선정된 보스턴시가 유치 신청을 철회했다고 합니다. 보스턴 시의 발전 보다 다음세대들에게 재정적 부담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마틴 월시 보스턴 시장은  “올림픽을 다시 유치하는 것이 미국에도 좋고 보스턴에도 장기적 혜택을 가져오리라 믿는다 하지만 어떠한 혜택도 우리 시의 재정적 미래를 넘겨줄 만큼의 가치는 없다고고 밝혔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제어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물질의 축적과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보다 좋은 미래를 가져다 줄 것 같지만 하나님으로 떠나게 만듭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매일의 기도는 우리가 가진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이 거둬 가실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바른 생각과 옳은 기준으로 하나님 앞에 있음을 매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셋째로, 일용할 양식은 쉼을 주시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먹는 것을 앞두고 매일 식사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의 영성은 매순간 노동을 하며 안식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안식도 필요한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기도를 드리며 죄, 불안, 경쟁, 불평, 정죄, 불확실함으로 부터 안식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죄인들이 자주 초대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나누며 하나님 나라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나누는 자리에 주인이시고, 그 자리에 온 모든 죄인들은 떡을 나누며 교제를 즐겼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때에 장래에 예수님의 식탁 앞에서 믿음의 교우들이 둘러 앉을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때에는 십자가에서 우릴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손수 떡을 떼어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예배는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들을 마시며 생명을 누리지만 언젠가 우리에게 임할 날을 기다리며 일용할 양식의 기도는 안식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선교사들은 일용할 양식을 나누지 않는 것을 죄라고 여기며 조선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이 떡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1901년 한국 이교의 심장 속으로 오랫동안 잊어버린 노래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파고들어 갔습니다. 그 멜로디는 무교의 정령숭배에 있는 두려움의 중얼거림을 삼켜버리고, 조상 제사에 있는 절망적인 실망의 속삭임과 불교의 윤회 사상에 내재된 고뇌의 신음 소리를 그리스도 십자가 영생에서 부르는 즐거운 승전가로 변화시켰습니다. 그 옛날 뱃길을 따라 전해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기도는 한국땅에 수많은 십자가와 교회를 세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 형성사라는 책에 실린 카우퍼의 장시 자비’(Charity)의 일부분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한국에도 옛날 항로를 따라 전해진 주님의 떡은 하늘과 소통하는 어떤 이가 순수한 강물이 발원하는 곳에서 항아리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 미천한 우리의 물과 다시 섞었는데 이는 마치 천사가 날개를 치는 것과 같았다. 불멸의 향기가 순례자의 길을 가득 채우고 그의 보물을 어디서 구했는지 우리에게 말한다. 그래서 보물을 가득 실은 범선은 태양이 인도의 향신료 해안에서 이글거릴 때 서구 세계의 어떤 안전한 항구에 그 닻을 내리고 돛을 접었다. 그 배가 어느 항구로 갔는지 묻는 것은 헛되다고 향기에 젖은 바람이 우리에게 알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