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8/25/2024 | 성령강림후 제 14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하라 Be Strong in God's Mighty Power
에베소서 6:10~20
한주간 웨스트 캐나다 코스타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간절히 기도하는 청년들의 눈물의 기도를 보며 함께 울고 예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분주한 일상으로 인해 숨겨진 듯한 복음의 열정을 다시 깨닫게 하신 시간이었습니다. 은혜 받기 위해 3시간 떨어진 지역의 교회들도 연합하여 예배하며 하늘가족이 되었습니다. 9명의 스피커들이 청년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했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른 기준과 성향을 가지고 있고 신앙의 결도 다르지만 하나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신비를 느꼈습니다.
에베소서 6장은 바울이 에베소 교우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을 마무리하며, 여러분은 주 안에서, 또 주의 강한 능력으로 담대해지십시오.라고 권면합니다. '끝으로 당부를 드립니다.' 라는 말씀에서 바울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목회의 여정에서 소중한 관계를 맺은 교우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한국으로 돌아갈 때, 단순히 작별 인사를 넘어서 그들의 새로운 여정을 축복하며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모든 만남에는 시작과 헤어짐이 있습니다. 이는 유한한 인간의 본질이자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예외는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서 함께 하게 하시는 삶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더 깊어지고 성장할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자녀를 유학보내는 부모님들의 편지를 받게 될 때가 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낯선땅으로 향하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자녀를 떠나보내는 것은 삶의 주인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며 부모의 품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품으로 맡겨 드리며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모세가 태어난 시기는 바로가 히브리 민족의 번성을 막기 위해서 산아제한 정책을 내렸습니다. 신생아이들 중에 남자아이의 경우에는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히브리서의 기록에 의하면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 하지 아니하였으며” 모세의 어머니는 암울했던 시대에도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뢰와 그 뜻이 아들에게 이뤄지기를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장면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진하게 교차되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세상도 영적인 일들이 일어납니다.
첫째로, 영적전쟁의 성격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11-13)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치열한 현실 속에서 갈등과 어려움을 겪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싸워야 할 적들은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들은 어둠의 권세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세상에서 돈의 힘이 엄청납니다. 돈은 성도들의 삶에도 철저하게 침투해서 믿음의 대상을 혼탁하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은 세상을 초월해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속에서 의식주를 포기하며 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가능한 세상속으로 들어가서 그리스도인의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라 하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구를 하나님을 향한 방향으로 초점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에서 세상은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믿음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또한 요한일서에서 전하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세상속에서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죄의 유혹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한 영은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 잘 파악하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교회와 성도를 유혹합니다. 결과에 대한 강박적인 집념, 인정 받으려는 욕구, 서로의 부족함을 느끼도록 하는 내면의 소리들, 믿음을 억압하는 현실의 문제들 하나님 보다 커 보이게 하는 생각들은 우리의 영혼을 위축되게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복음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거룩한 마음으로 마음의 균열을 감지하고 제어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제어가 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이 악한 영의 영향에 휘말리게 되는 거에요.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절제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에 대해서 너무도 분명하게 전해줍니다. 영적인 예배는 우리 안에 없는 또 다른 차원의 믿음의 실천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지체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도 예배의 연장입니다. 마귀의 계략에 맞서는 것은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막아 주고 품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악한 생각으로 부터 보호해 주시고, 내 옆의 사람을 잘 섬기는 일에 굳게 서도록 하는 힘이 됩니다.
둘째, 영적전쟁을 위해 성도들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4-17)
우리는 영적 전쟁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영적 전쟁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존재이기에 인간의 본성과 연약함으로는 악한 자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실존은 악의 세력 아래 있기에 어둠의 권세를 이기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비유적으로 표현한 전투 상황은 자신의 힘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싸워할 할 영적 싸움은 무한 경쟁시대에 사람이 소유의 대상이 아닌 품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수까지도 은혜의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다윗에게 실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기회였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신실한 왕이 되어지는 과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영적인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무한 경쟁사회속에서 진정한 승리의 의미가 무엇인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살아 가는 것이 어떤 삶인지, 우리를 보스턴에 정착해서 살도록 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용사가 되어 하나님의 무기로 온몸을 무장하라고 하십니다.
(1)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갑옷입니다.
NLT 성경은 ‘On the belt of truth’ 로 번역했습니다.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이기는 길은 정직함입니다. 이번 올림픽 기간에 배드민턴 금메달을 딴 한 어린 선수가 협회의 비리를 공개했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은 선수들에 대한 불합리한 대우와 불공정한 일들이 운동계 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정직은 하나님의 허리띠와 갑옷입니다. 바울은 진실과 성실함으로 행동하라고 말씀합니다. 진실이라는 의의 갑옷을 입고, 사단의 공격으로 부터 여러분의 거룩한 심장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2) 평화의 복음입니다.
평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복음의 내용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평화는 성도들이 평생 추구해야 할 가치입니다. 신발을 신고 걸을 때마다 가는 곳마다 성도들이 가는 곳에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평화가 회복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납니다. 부부 사이가 매일 다툼과 갈등이 있다면 그곳에 주님이 거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관계 가운데 임하는 나라입니다. 평화의 복음을 널리 전하는 자가 되길 바랍니다.
(3) 믿음의 방패입니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정금같은 믿음은 악한 자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패입니다. 악한 영의 불화살을 피하도록 막아주는 믿음의 방패를 소유하고 계십니까?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져도 일어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문제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도구가 됩니다. 신실하시고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의심과 불신의 불화살, 두려움과 불안의 불화살을 막아낼 믿음의 방패가 우리의 손에 들려 있어야 합니다.
(4)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머리에 쓰는 것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행동은 사고하는 능력인 머리의 지시를 따르게 됩니다. 악한 자들은 실패와 염려, 부정적 생각을 주입하지만 하나님은 기대와 소망으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분을 향한 마음의 초점을 분명히 할때에 우리는 바른 길로 인도함 받게 됩니다. 구원의 투구는 인간의 삶의 가치를 변화시키십니다. 성령의 생각은 우리의 악한 생각을 끊게 해 주시고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켜 나갑니다. 성경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여러분이 소유한 말씀의 검은 몇구절이나 되십니까? 믿음으로 말씀을 묵상할때에 성경의 구절들은 하나님의 언어가 되고 하나님의 음성이 됩니다. 말씀은 우리는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글자에 불과하지만 믿음의 안경으로 말씀을 보면 기록된 말씀, 선포되어지는 설교는 하나님의 소리가 되어 마음에 새겨지게 됩니다.
셋째, 영적인 일을 이뤄나가야 합니다. (18-20)
9월이면 많은 청년들이 보스턴으로 오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여름 학기의 시스템에서 이제 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한 가을 학기로 시스템을 전환하게 됩니다. 낯선땅에 오는 청년들은 대부분 정착하는 시간속에서 불안하기도 하고, 외로움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현실을 잘 알기 때문에 보스턴을 찾아오는 청년들이 주님의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는 것이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보스턴은 잠시 들리는 인생의 정거장이 아닙니다. 우리의 교회는 영적 훈련소가 되어야 합니다. 삶의 변화를 경험하고 다시 태어난 영적 고향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 희미했던 비전을 하나님 안에서 찾아가고 자신의 분야에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지는 인생이 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깨어 기도하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땅 보스턴과 교회와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 성령 안에서 간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 두려움 없이 복음의 비밀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십시오. 건강한 교회는 서로가 맞는 말 옳은 말을 하기 전에 깨어 기도하고 복음의 비밀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크신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항상 깨어 모든 일을 참고 견뎌내야 합니다. 맞는 말, 옳은 말도 자주하면 상처가 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깨어 기도함으로 마귀와의 영적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깨어 있지 못함으로써 예수를 부인하는 지경에 이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주어진 모든 삶이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됩니다. 아픔과 외로움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 나가세요.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몸이었지만 하나님은 바울의 모든 삶을 통해 일하고 계셨습니다. 에베소 교우들에게 바울의 권면은 주의 강한 능력으로 담대해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살아가며 삶을 지탱해줄 것들을 찾게 되는데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게 되면 삶의 방향이 주님으로 부터 멀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깨어 모든 일을 참고 견디면서, 모든 성도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세상속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때는 진짜 믿고 진짜 복음을 경험하여 전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주의 강한 능력으로 믿음의 방패와 성령의 검을 손에 들고 세상에 들어가 굳게 서는 성도들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8/18/2024 | (성령강림후 제 13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6 주의 깊게 살피라 Careful Discernment
에베소서 5:15~21
오늘은 성령강림후 열세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평화와 위로가 이곳에 모인 우리에게 가득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설교자에게 일주일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것은 말씀을 주의 깊게 살피는 일입니다. 본문을 연구하며 주의 깊게 살피다 보면 씨름하는 일이 되지만 말씀 묵상이 가져다 주는 열매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다가 어느 구절에서 마음이 머물게 되면 그 행간을 헤집고 다니며 숨겨진 보화를 찾기 위해 여러 참고 자료들을 탐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 안에서 영적인 목마름이 해소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유진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여러분의 발걸음을 살피고, 머리를 쓰십시오. 지금은 긴박한 때라고 번역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에베소 교우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주의 깊게 살피라고 편지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음으로 존재감을 확인하게 되고, 사랑을 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점검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묵상하게 됩니다.
첫째는 지혜를 얻기 위함입니다.
5:15 ○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주의 깊게 살펴, 어리석은 사람처럼 살아가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처럼 살아가십시오.
지혜는 이론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지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지혜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모두 담을 수 없으며, 인간의 논리로 완벽히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서신서에서 생각하라, 분별하라는 말을 자주 언급합니다. 이 두 단어가 대략 48번이 나옵니다. 우리가 믿는 바를 자주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증언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갑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아갑니다. 어리석은 길로 가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아는 더욱 강해지고 내면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점점 더 공허해지게 됩니다. 비록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우리가 믿는 대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구도자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의 깊게 살피라'는 뜻의 '블레페테'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살아가라'는 뜻의 '페리파테오'는 성도의 일생의 삶의 태도를 정하고, 걷고 행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지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말씀에 순종할 힘을 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게 하십니다. 성도는 마음의 본능적인 끌림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 안에서 모든 일을 협력하여 선을 이뤄 나가야 합니다. 모든 일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 눈에 재앙처럼 보이는 고난과 상한 감정까지도 결국 유익함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전 구절에서 잠자는 자의 상태와 깨어 일어난 자의 상태를 서술합니다. “잠자는 자들아, 깨어나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환히 비추어 주실 것이다.” 사람이 영적으로 깨어 일어 난다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신비이기에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 계획을 통해 우리는 놀라운 세상을 보게 됩니다. 밤이 지나고 해가 떠오르듯, 하나님의 말씀은 죄의 욕망에 빠져 살던 사람을 치유하고 회복시켜 새생명을 누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나 중심의 본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새롭게 빚어 가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주시고 꾸짖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말씀합니다. 인간은 깊고도 풍성한 하나님의 지혜를 전부 공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 깨닫지 못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로 세월을 아끼기 위함입니다.
5:16 부디 세월을 아끼도록 하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17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시간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공평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주어진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고, 일상 속에서 주님의 관심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며, 주님의 마음을 깊이 알고자 하는 태도로 살아갑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돈을 아끼고 시간을 아끼는 차원이 아닙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주고 우리를 악한 자의 손에서 속량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지불하고 성도의 세월을 구입한 것이라면, 새사람을 입는 성도의 삶은 믿음을 지닐 때 이전의 삶과는 다른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급격히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세속적 가치에 휘둘릴 가능성이 갈수록 커집니다. 우리는 여러 분야에 둘러 싸여 살아가지만, 세월을 아끼지 않을 때 세상에 길들여진 삶을 살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흡수성이 있어서 죄로 인해 오염되고, 죄에 대해 무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월을 아끼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새 마음을 허락해 주십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5).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그 생명이 주님께 달려 있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줄기는 비록 얇아 보일지라도, 주님의 능력으로 강력하게 지탱됩니다. 은혜의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의 노력과 결단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얻은 구원의 깊이를 시간을 들여서 더 진하고 깊게 맛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을 끈질기게 신뢰하고 의지하며,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진정한 제자의 길입니다."
대학교 1학년때 욥기서를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마음을 지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 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소유한 부자였으며, 열 명의 자녀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날까 염려하여 항상 그 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경건함을 칭찬하셨습니다. 이에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탄은 욥의 경건이 조건부 경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탄은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다'고 말합니다. 이후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욥을 시험하기 위해 땅으로 내려갑니다. '땅'을 마음으로 해석해 보니, 사탄은 갈대아 사람, 스바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욥의 재산과 종들을 강탈했습니다. 그 구절을 읽으며 마음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사탄이 땅을 두루 돌아다니며 스바 사람을 통해 욥의 종들을 해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사탄의 힘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감정들, 마음의 그늘, 상처와 아픔을 아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악에서 떠나는 걸음을 게을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노력없이 얻어지는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앞에 머무를때 성령의 인도함 받은 우리의 삶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셋째, 성령의 충만한 사람이 되기 위함입니다.
18절 술에 취해 살지 마십시오. 그 길은 방탕의 길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주님은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성령을 보낼 줄 것이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돕고, 묵상하는 말씀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없던 생각도 넣어 주시고, 무질서한 마음을 정리해 주시는 역할을 하시기도 합니다. 때때로 만남을 통해서나 삶의 영역에서 묵상하는 말씀이 마음 안에 들려지도록 도우십니다. 이때 우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령에 충만하라는 것은 성령의 기운을 힘입어 살라는 뜻입니다. 성령충만을 헬라어로 '플레로오'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흘러 넘치다, 가득 차다'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수많은 종류의 술이 전시된 장소에 들어가서 아무리 오랜 시간을 머문다고 해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술에 취하지 않습니다. 성령도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 믿음생활을 해도 믿지 않으면 성령의 일하심을 느끼지 못합니다. 성령충만은 성령의 주도하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지속적인 믿음의 반응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술에 취함과 성령의 충만함을 대조함으로 우리에게 알기 쉽게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당시 로마사회에서 박카스(Bacchus)는 술의 신으로 유명했습니다. 이 신은 사교의 축제에서 필요한 요소였습니다. 바울은 술에 취함의 의미를 무절제하고, 방탕한 것이라 표현합니다. '방탕의 길'로 번역된 '아소티아'라는 단어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한 생활을 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즉 술에 취함은 하나님을 떠나서 내 뜻대로 살아가는 무절제한 삶이고 방탕한 삶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말씀에 순종할 힘이 생기고, 성령의 열매가 삶속에 나타남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성령충만한 사람의 특징을 19절로 21절에 소개합니다.
5:19 시와 찬송과 거룩한 노래를 부르고, 마음속에서 우러난 노래를 주께 불러 드리십시오.
5:20 모든 일에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5:21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순종하십시오.
첫째로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시와 찬송과 거룩한 노래 부르게 됩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서 주님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19) 이 시는 시편의 노래입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지만 현실속에서 만난 두려움의 외침과 거친 탄식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시편의 기자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아프고 상한 감정도 하나님께는 노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한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 주십니다. 모든 감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노래하게 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줍니다. 견디지 못할 슬픔과 아픔도 성령께서는 하나님께 노래가 되도록 바꾸십니다. 때로는 내 이성과 지적으로 동의되지 않는 불편한 마음도 내려놓게 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더 가깝고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바울은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라고 권면합니다.(20)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이 감사를 부탁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진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으니 회복된 삶에 나타나는 감사는 모든 환경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태도라고 권면합니다. 감사의 삶은 성령충만한 바울의 삶속에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에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21절).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근거는 바로 예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바울은 이 경외심을 이웃과 세상으로까지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의 삶의 주체가 되어,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끌어 주시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미 우리 안에 성령께서 계시며,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믿음의 결단을 원하십니다. 이번 한 주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성도들의 모든 시간 속에 주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8/11/2024 | (성령강림후 제 12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5 새사람의 평화 Peace of the New Nature
에베소서 4:25~5:2
오늘은 성령강림절 열두번째 주일입니다. 매주 교회력의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하게 되는데요. 이번주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주일입니다. 우리나라는 벌써 광복의 기쁨을 누린지 79년이 되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날인 광복절은 光 (빛 광) , 復 (돌아올 복)으로 '빛을 찾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잠시 평화로운 땅이 되었지만 한반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아직까지도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분단된 조국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마음 아픈 기도제목 입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역사적으로 서로의 땅을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테러와 전쟁을 겪어왔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함을 느낍니다.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성경이 언급하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많은 혼란과 갈등을 겪기도 하고 단순히 사회적 갈등에만 국한되지 않고, 개인의 삶에서도 평화로운 마음의 질서가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약의 주요 용어 가운데 샬롬은 평화입니다. 대략 350번 정도 나오는데, 신약에서 평화의 복음은 구약의 샬롬의 약속들을 토대로 평화를 소개합니다. 한가지 예가 로마서 14장 17절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중심부에 평화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시켜서 새창조의 상태 즉 새사람을 입게 될때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누린다고 보았습니다. 구약의 이사야가 예언한 평강의 왕의 오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평화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평강입니다.
첫째, 새사람에게 주시는 증거가 평화입니다.
찰스 버틀러(Charles F Butler:1804–1892)의 '내 영혼이 은총'입어' 찬송가는 한사람의 마음의 고백이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찬송가가 되었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고, 세상을 이기신 주님 안에서 발견됩니다. 우리를 살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은 마음의 평화로 임하게 됩니다.
이 찬양은 버틀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난 후 그의 삶의 변화를 고백한 것인데 가사를 한번 보실까요? “1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 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곳이 그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모든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는 찬양을 통해 천국과 하늘나라를 고백합니다. 천국하면 죽어서 가는 좋은 곳이고 내세로 생각나게 되는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의미로 전달이 됩니다. 신약에서도 보면 천국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나오는데, 다른 복음서에는 하나님 나라로 번역을 했습니다. 바울서신도 보면 천국대신 하나님 나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태복음만 천국이라는 단어로 번역했을까요?
유대인이었던 마태는 1차 독자인 유대인들의 시선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도 안된다는 율법의 기록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하늘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해서 하늘 나라 하면 하나님을 가르키는 것이었습니다. 천국과 하늘나라는 같은 뜻입니다. 새사람을 입는 성도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다가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들이고, 하나님의 통치에 삶을 맡기며 약속 믿고 굳게 서는 것입니다. 새사람은 옛본성을 버리고 주안에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새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시겠습니다.
25 ○ 그러므로 새 사람을 입은 여러분은 무엇보다 거짓을 버리고, 각자 이웃에게 진실만을 말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26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마십시오.” 아무리 분한 일이 있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다 풀어 버리십시오. 27 사탄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28 도둑질을 해왔던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땀 흘려 자기 손으로 힘껏 벌이를 해서, 도리어 궁핍한 사람들에게 뭔가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29 남을 헐뜯는 나쁜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기회가 닿는 대로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는 선한 말을 해서,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도록 하십시오.
본문에서 바울은 율법적인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사람이 된 성도들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삶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거짓이 없으니 거짓을 버리고, 사랑으로 이웃에게 진실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거짓은 평화의 공동체를 깨트리는 바이러스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부당하게 나의 이득만을 취하는 것도 도둑질하는 삶입니다. 남을 헐뜯고 나쁜 마음을 품는 일도 다른 이의 삶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새사람을 입은 성도는 기회가 닿는 대로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워 선한 말로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 분한 일이 있어도 해가 지기전에 풀고,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서로가 한 몸의 지체이기에 그렇습니다. 성도는 매일 새옷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라고 말을 하고 있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새옷을 입지 않으면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평강의 주님이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실 것 이라는 약속을 믿고 그 위에 서는 것이 새옷을 입는 것입니다. 평화의 공동체에는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거짓, 분노, 죄를 짓는 것, 분한 일, 도둑질, 남을 헐뜯는 말, 나쁜말이 있을 자리가 없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평화의 증언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둘째, 평화는 말과 행동에서 나타나는 향기입니다.
30 또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 주신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십니다. 31 모든 독설과 분노와 성내는 버릇과 말다툼과 비방하는 말을 삼가고, 모든 악의도 함께 던져 버리십시오. 32 오직 서로에게 친절히 대하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가 서로에게 먼저 용서를 베푸십시오.
일평생 교회를 뜨겁게 사랑한 존스토트 목사님은 교회론을 분명히 하라고 말씀합니다. 요즘은 대중적인 교회론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인데 그 이유는 현대 문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고,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존 스토트(John Robert Walmsley Stott, 1921-2011) 목사님은 '살아있는 교회'라는 그의 책에서 교회의 본질을 네가지로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배우는 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사도들을 교사로 부르신 것을 인정하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학교에도 임명한 교사가 있듯이 예수님은 성령학교를 세우시고, 훈련시킨 사도들을 통해 3천명의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우고 알아가야 합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성경을 통해 주님을 배울때 성령께서 이해되도록 도우십니다.
둘째는 돌보는 교회입니다. 돌봄은 주안에서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초대교회는 서로의 물건을 통용했습니다. 물론 현대사회에 옆집의 물건을 편하게 빌려 쓰고 빌려주는 것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개인생활이 침해당하거나 무례하게 침범하는 것에 대해 민감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주안에서 서로의 필요를 따라 재산과 소유를 필요에 따라 나눠주는 일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셋째는 예배하는 교회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모여서 예배하는 제도적 교회를 없애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완성시키 위해 오셨고 주 안에서의 예배를 통해 평화의 공동체는 끊임없이 새로워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교회는 살아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예배를 드려 보면 알수 있습니다. 예배에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임합니다. 반면에 건강하지 않는 교회는 모이면 분쟁하고 다투고, 의심하고, 서로의 힘을 모으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경계하는데 그 힘을 다 쏟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 힘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전도하는 교회입니다. 예배 드리고 나면 우리에게는 삶의 예배가 시작됩니다. 흩어진 삶의 자리에서 전도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는 것은 그들이 예배하고 그 예배가 확장되어 전도의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지만 세상의 소리에 귀가 열려져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지만 세상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받은 사랑으로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을 돌보고, 모이기에 힘쓰며 예배 드린 후에는 그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성령의 탄식 소리는 말할수 없는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마음에 독설과 분노와 화내는 버릇, 말다툼하고 비방하는 말을 그치게 합니다. 바울은 마음을 정결하도록 하고 모든 악의와 함께 던져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좋은 말은 맛있는 음식과 같고 좋지 않는 말은 상한 음식에 비유 할 수 있습니다. 비방하는 말은 사람들의 영혼을 쪼그라들게 하고, 평화를 사라지게 하지만 좋은 말은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성도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향기를 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좋은 말을 아낌없이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모델이 되는 방법입니다. 주님은 인류의 모델이 되어 새로운 옷을 선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 옷을 입었으니 그리스도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런웨이를 걷는 모델은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선보이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주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삶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 받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는 삶의 무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드러내는 삶은 좁은 길일지라도 반드시 그 길 위에서 생명의 향기가 날 것입니다.
셋째, 평화의 주님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5: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답게, 여러분은 하나님을 닮는 자들이 되십시오. 5: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서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살면서 평화에 관한 일을 얼마나 생각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만일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음에 다가오지 않는다면, 말씀을 절실하게 사모하기 보다는 세상의 다른 일들에 생각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평화를 원하며 살아간다고 하지만 정작 가정과 직장의 현장에서 평화의 주님을 기대하기 보다 마음을 힘들게 하는 일들에 더 집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듣게 되는 원망의 말들에 집중합니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말들이 멈추지 않는 세상이지만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있는 원망과 정죄하는 말들을 하나님은 듣고 계시며 하루 한순간도 갈등과 죄악이 멈추지 않는 세상에 자신의 아들을 보내 주셔야만 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삼아 주시고 새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예수는 죄의 권세를 이기셨고, 교회는 이 믿음의 고백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덮기에 충분하십니다. 그렇다면 솔직하게 질문하고 그 평화의 길이 되신 주님 앞에 마음의 상처, 죄책감, 배신감, 원망하는 마음으로 인한 마음의 풍랑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한시도 기도할 수 없느냐고 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육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를 따를 힘이 없음을 아시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집이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평화를 회복하는 길은 성도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며 평화의 주님을 믿고 더욱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참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평화가 있는 그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울고 있는 자, 지극히 작은 자 가운데 복음을 전하자는 가운데 주님이 계십니다. 누가 주님의 눈물을 닦아 주고, 작은 자에게 친절을 베풀며, 주의 복음을 함께 전하시겠습니까?
세상은 늘 우리를 갈등과 불안으로 살아가게 하지만 믿음의 성도들은 그 안에서도 평화의 도구가 되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믿음의 성도들의 삶에 깊이 자리잡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평안이 영혼까지도 덮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8/4/2024 | 성령강림후 제 11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4 그러므로, 하나됨의 신비를 풀다 Therefore, The Mystery of Unity Was Solved
에베소서 4:1-10
1985년에 발표된 "We Are the World"는 천재지변과 기아로 고통을 겪고 있는 아프리카를 돕기 위해 만든 노래입니다. 2차 대전 이후에 1990년 초까지 전 세계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로 국제 질서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무렵 1988년에 서울 올림픽이 열렸고, 6.25 전쟁 이후 분단된 조국땅에서는 올림픽 개최식 때 ‘손에 손잡고’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이 노래는 이념과 민족의 장벽을 넘어 하나됨을 위한 갈망의 노래였습니다. 이번 프랑스 파리 올림픽에서는 희소병을 겪고 있는 캐나다 퀘벡 출신의 셀린 디옹이 1년 7개월 만에 불굴의 의지를 보이며 개막식때에 ‘사랑의 찬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국제 대회인 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를 넘어서, 인류의 통합과 평화, 그리고 희망을 상징하는 플랫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가 간의 지나친 경쟁심은 하나되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경기를 보는 국민들도 민족주의적으로는 하나가 되는 시간이지만 세계인들의 하나됨을 이루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올림픽은 고대 세계에서 힘과 용맹을 과시하는 의식이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축제는 종종 종교적 행사와 결합되었고, 그리스에서는 그들의 신이던 제우스를 기리기 위해 종교적 축제를 벌이며 더 강한 사람을 뽑았습니다. 가나안에서는 풍요와 다산의 신과 관련된 종교적 축제를 열었고, 남성의 힘을 과시하는 종교 의식을 갖었습니다. 로마시대에 로마가 추구하던 코스모 폴리탄(cosmopolitan) 즉 세계시민의식과 바울이 추구하던 코스모폴리탄은 추구하는 목적이 달랐습니다.
그는 헬라 문화권인 다소라는 도시에서 성장하며 나는 유대인인가? 아니면 헬라인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외국에서 이방인 유대인으로 생활하면서 외국인로서의 경험을 직접 피부로 겪었습니다. 오늘날의 이민 2세대가 부모의 문화와 새로운 문화 사이에서 자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새로운 시각이 열렸습니다. 유대의 종교관을 초월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됩니다. 당시 로마 사회가 군사적 힘으로 '하나의 도시'를 추구했던 것과는 달리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에 그의 삶을 헌신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이 '그러므로' 안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복음의 연결 다리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두 문화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고,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구약 성경의 최고의 랍비였던 가말리엘에게 성경의 전통적인 관점을 배웠고, 이후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1장부터 3장까지 기독교 믿음의 교리, 즉 믿음의 이론에 대해서 서술했다면 4장 부터는 믿음의 실천편을 기록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언급한 하나의 공동체는 다원주의나 종교적, 사회적 통합, 전인류적인 사랑 차원의 하나됨이 아닙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구별됨에서 시작을 합니다. 출발점이 한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예수의 마음에서 확장되어 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까지도 감수하며 기뻐했고,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예수의 마음으로 연대했습니다. 바울은 진정한 하나됨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 연합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에 담긴 하나됨의 신비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23).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1절에서 주를 위해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몸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한다고 말합니다. 순교를 앞둔 바울의 이 권면은 힘이 있었고, 에베소 교인들에게도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빚진자들입니다. 죄사함의 은혜가 깊어질수록 누군가를 환대하고, 용납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누구나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뜻대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을 떠났던 아들의 결말이 어땠습니까? 모든 재산을 잃고, 그 삶이 궁핍해 졌습니다. 결국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를 먹는 지경에 이르러 비로소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은 내면의 결핍감이 있습니다. 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 받고 싶어합니다. 나를 증명하는 일,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 게다가 소비주의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부족함을 주입합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유대교적 성전의 의미를 뛰어 넘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과 종교적 형식 안에 갇혀 있다가 성령 안에서 내면의 충만함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변화가 됩니다. 그 새생명을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고,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일치와 하나됨도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며, 하나됨을 기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가 하나되게 하신 것을 믿고 지켜 나가게 됩니다. 신앙 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믿음을 통해서 하나됨을 경험하고 연습하며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4:2 곧,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시고, 많이 참으십시오.
4:3 평강의 띠를 매고서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바울의 권면들은 그리스도의 집을 튼튼하게 세우는데 필요한 재료들입니다. 겸손과 온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임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새 사람이 된 성도는 겸손과 온유함의 모델이신 그리스도께 길들여 져야합니다. 멍에를 매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께 배워 나가야 합니다. 배우라는 것은 훈련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의 기질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고유한 것이기에 상대방을 변화시킬 권리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용납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가 먼저 변화가 됩니다.
모세는 불평하는 백성들을 인내하며 하나님의 진노의 마음을 돌이키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했던 모세는 이땅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민 12:3) 성도는 단단한 자아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심겨질 때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내 것을 위해서 상대방을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용납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에 대한 심판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희생시키셨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한 뿌리가 됨을 증거하십니다. 우리의 내면에서는 인간의 욕구와 하나님의 성품이 충돌하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되게 하시는 평강의 띠가 되십니다.
계속되는 권면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4절로 6절입니다. 4 여러분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여러분 모두는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5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천지 만물의 아버지이십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해 일하시고, 만물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몸은 참 신비롭습니다. 우리의 눈이 하루에 몇 번이나 깜빡일까요? 인간의 뇌의 저장용량은 얼마나 될까요? 몸속의 세포는 몇 개나 되며, 피를 생성하는 심장은 하루에 몇 번이나 뛸까요? 물론 기본적인 지식은 검색하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몸의 신비로움입니다. 우리의 몸은 유기체적으로 여러 기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생각하며 믿음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했는지를 말입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가 한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이를 위해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한소망 안에서 부르십니다. 성령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입니다. 천지 만물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도 한분이십니다.
우리교회는 지역 특성상 신앙생활을 하다가 공부를 마치고 나면 보스턴을 떠나게 되는 교우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보여지는 지역 교회 안에서 한몸이 되려고만 한다면 시간이 흐르고 떠나는 교우들을 볼 때마다 허전한 마음이 들고 지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교우들이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세례가 하나라는 것은 한번 세례를 받음으로 일생동안 교회의 일원으로, 세상속에서 한 사람의 교회로 살아가게 됩니다. 날마다 자아가 죽어지고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의 믿음이 다르고, 예배하는 방법이 달라도 한 분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의 교회가 됩니다.
또한 몸은 시간이 흐르면 녹슬게 됩니다. 어느 한 기능이 약해지기도 하고 아프기도 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모든 부서의 지체들이 함께 이루어 나갈 때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이고, 한몸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히려 연약한 지체들을 보호하라고 했습니다.
셋째, '그러므로' 교회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4:7 그러나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께서 나눠주신 분량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4:8 그래서 성경에 기록되기를 "그가 높은 보좌로 올라가실 때 포로들을 사로잡고, 자기 백성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셨다."라고 했습니다. 4:9 이처럼 그가 "올라가셨다."라고 하셨으니, 이 말은 곧 그가 낮은 땅으로 내려오셨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4:10 또한 이처럼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던 그 자신이 하늘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으니, 그것은 그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본회퍼 목사(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성도의 공동생활'의 책에서 “서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몸과 몸을 부대끼며 함께하는 것은 신자들에게 비할 수 없는 기쁨과 힘의 원천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옥에 갇힌 바울은 죽음이 임박하여 디모데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찾아와 달라고 부탁까지 했습니다. 다시 보길 원했으며 디모데를 보는 것이 바울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사귐을 갖는 것이 육신적이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도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세리와 죄인들과 친교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축복을 주고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각자가 그리스도께서 나눠 주신 은혜의 분량에 따라 은사를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서로의 다름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한 몸에서 손과 발의 역할이 다르고, 눈과 귀의 역할이 다르듯이, 교회 안에서도 각자가 맡은 역할과 은사가 다를 뿐입니다.
교회가 서로의 짐을 나누어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나치게 한 사람이 많은 짐을 지고 섬기다 보면 지치게 되고, 섬기는 사람들은 번아웃이 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서로의 은사를 존중하며 맡겨진 분량에 따라 서로에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며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3에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하며 사역 중 갈등이나 위기를 극복하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샐러드는 다양한 재료들이 각각의 맛을 내지만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요리가 됩니다. 서로 달라도 조화를 이루며 영혼을 살리는 일에 힘을 모을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부족하고 연약한 지체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은 서로의 다름이 기쁨이 될 것이며, 상대방의 부족함은 내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진심으로 다가가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의 신비를 경험하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7/28/2024 | (성령강림후 제 10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3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기도 Finding Light in the Darkness through Prayer
에베소서 3:14-21
팀켈러 목사 (Timothy J. Keller, 1950~2023)는 2001년 9.11사태로 인해 뉴욕 도시 전체가 어둠의 그림자로 몇주간 뉴욕을 짓눌렀다고 고백합니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크론병 증세로 씨름하고 있었으며, 그해 본인도 갑상선 암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야말로 외적으로 보면 그의 인생은 어둔 그림자가 드리운 것입니다. 기도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던 때에 기도를 깊이 묵상하며 세상에 나온 책이 우리가 잘 아는 "팀켈러의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3장 1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이라고 시작합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일로 죄수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 투옥된 지 4년 남짓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몸은 감옥에 있었지만 옥중에서 성경의 많은 서신서들을 남겼습니다. 외적인 환경이 바울의 마음 안에 있는 복음을 향한 열정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둠속에서 빛을 찾는 시간을 통해 바울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알게 되었고, 우리는 바울의 옥중서신들을 읽으며 하나님의 깊고 넓은 영적인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서 절실한 기도를 합니다. 당시 서서 기도하던 풍습속에서 무릎 꿇고 하는 기도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마치 예술가들이 처해진 상황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처럼 바울의 기도에서 창조의 힘으로 그를 깨우는 하나님의 에너지를 보게 됩니다 옥중에서 드리는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부르심의 기도였습니다. 바울의 기도를 묵상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 느껴집니다.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한 사명감과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드리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어진 현실로 인해 감사의 마음을 잃어가고, 마음이 불안하고 즐겁지 않다면, 어둠속에서도 빛 가운데로 초대하는 바울의 기도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실한 기도가 언제 시작될까요?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인식하는데서 시작됩니다.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며 그의 마음을 닮아가는 시간입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 대부분은 중요한 사람과의 만남을 앞두고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점검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몸과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첫째, 바울은 기도하는 대상이 분명했습니다. (15절)
3:15 정녕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에게 이름을 부여해 주신 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름을 부여해 주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면 자신의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줍니다. 다른 집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는 않습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은 아빠와 같이 친밀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사랑으로 품어 주시는 아버지로 인식하고 친밀감을 지니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아이가 다가와 부르는데 대답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면,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를 향한 갈망과 주어진 현실 사이에서 주님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방향과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보면서 정말 주님이 함께 해 주는 것이 맞는 것일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실수가 없는 분이 맞는 것일까? 의심하고 낙심하기 충분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이름을 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바울은 어둠속에서도 빛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어둔 골방의 감옥에 있었지만 바울의 마음만큼은 하늘과 땅과 모든 족속들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향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깊은 바다에 들어가면 바다의 세계가 펼쳐지듯이 기도는 우리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깊은 세계를 알게 해줍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잠잠히 구하면 구원의 기쁨을 베풀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시 62:1) 오히려 고난속에서도 우리를 깊은 기도속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깊은 기도속으로 들어가는 기쁨을 요한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말했습니다. 기도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해 질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기도하는 내용이 분명했습니다. (16-19절)
16 그분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풍성하신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사람을 굳세게 해 주시고,
바울은 성령 안에서 속사람을 굳세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기도의 힘이 바로 성령에 힘입는 기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육신의 몸은 갇혀 있지만 그의 영혼이 억눌리지 않았던 것은 성령 안에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겉모습은 웃고 있으나 내면을 들여다 보면 속사람은 참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사연들로 인해 고통과 괴로움 가운데 힘들어 하면서도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따뜻해 집니다. 잘 가고 있다고 믿어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들을 통해 용기를 지니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행복한 삶을 살면 좋겠지만 살아가는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겉으론 웃고 있지만 속사람은 억압받고 고통 받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데 불행함을 느끼고, 경제적 억압에서 벗아나기 위해 열심히 살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무지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배우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학문의 깊이 가운데 스스로의 존재가 주눅 들게 됩니다.
영성가인 리처드 포스터는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은 지능이 높거나 혹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고,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공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힘은 바울 안에 있던 것이 아니라 역사하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으니라"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건강하게 치유할 뿐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3:17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거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한 여러분이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서,
공동번역의 성경으로 보면,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라고 번역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마음의 집 주인으로 묘사합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의 집에 들어와 사실 수 있도록 믿는자의 몸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마음 안에 사는 것이 어떤 삶일까요?
마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고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바울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 안에 계시면 여러분이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게 될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마음 안에 두고 하나님의 사랑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삶이 사랑의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미워하는 방식에 더 익숙합니다. 시대정신이 경쟁의 원리로 돌아가고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마음에는 미움이 자리하게 됩니다. 사회에서는 마음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불편하면 만나지 않으면 되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사귐을 갖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3:18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크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3:19 나아가 모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우쳐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의 정도까지 여러분이 충만하게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에서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이 사랑과 신뢰는 돈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가치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교육도 돈을 주고 배우고 사랑도 돈의 가치로 평가되는 시대입니다. 사제 관계도 돈을 주고 배운 선생이고, 돈을 받고 가르치는 제자가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관계 보다 세상의 가치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대부분의 시간들을 그 안에서 보내게 됩니다.
우리의 죄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채워가야 합니다. 모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충만하심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깊이와 넓이, 높이와 길이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더 확장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사랑의 빚진자임을 기억할때에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셋째,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으로 마칩니다.
3:20 진실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3:21 교회 안에서와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이어지기를 빕니다. 아멘!
바울은 이전까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안에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막힌 담이 허물어 지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불문하고 모든 성도들이 연합되고 관계 맺을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교회 안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넓은 사랑, 끝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측량할수 없는 마음을 느껴야 합니다. 냉냉한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것 같을지라도 옥중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바울의 얼굴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일상 가운데 발견될 것입니다. 바울은 옥중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영광이 대대로 이어지기를 간구합니다. 이전세대로 부터 지금의 세대들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영광의 중심에 교회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영광이 나타나는 영역들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영광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간구합니다.
1995년에 개봉한 영화 스모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 폴은 어느 날 길거리에서 벌어진 깡패들의 총격전으로 임신 중이던 아내를 잃게 됩니다. 그는 깊은 슬픔에 빠져 불행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작가였던 폴은 펜을 내려놓으며 슬픔에 잠깁니다. 그러던 중 담배를 사러 동네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14년 동안 그 가게를 운영하던 주인은 매일 아침 8시에 같은 위치에서 사진을 찍어 스크랩하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계산대 위에 있는 카메라를 보고 대화 하다가, 폴은 가게 주인이 찍은 4000장이 넘는 앨범들을 보게 됩니다. 가게 주인은 매일 아침에 찍었던 사진들을 폴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폴은 매일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들의 비슷한 장면들을 보면서 황당해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담배 가게 주인은 다른 앨범들도 볼 수 있게 가져다 주며 이것이 내 인생의 프로젝트라고 말합니다. 사진 속에는 여름날의 밝은 빛, 가을날의 은은한 빛, 환했던 아침과 어두웠던 아침의 사진들, 주말과 주중에 찍은 사진들, 분주하게 지나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진속에 지나가는 계절이 담겨있었고 서로 다른 표정과 사람들의 움직임이 담겨있었습니다. 같은 앵글 속에 담긴 사진들은 각각 다른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앨범을 보던 폴은 갑자기 동작을 멈췄습니다. 그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온 것입니다. 바로 임신 중이던 자신의 아내였습니다. 매일 출근을 하는 아내의 일상의 모습이 사진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폴은 그리워하던 아내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며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아내입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참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눈물과 함께 내면의 슬픔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영화의 장면을 보면서 매일 반복되는 우리들의 삶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때로는 지루하고 사소한 것이라 여겨질때가 있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삶의 의미가 초라해 보일때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께 특별한 것을 구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함께하시며, 우리의 처해진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속에 우리는 관객이 아닙니다. 세상이 무대라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각본 가운데 인생의 한장 한장마다 하나님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언제나 우릴 향해 있음을 믿고, 흔들리는 마음까지도 주님께 드리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기도로 나만의 공간을 채워나갈때 주님과 더 깊이 연결될 것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을 기도로 채워 보시기 바랍니다. 한주간도 교우들의 일상과 모든 만남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넘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