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7/21/2024 | (성령강림후 제 9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2 쉼이 필요한 당신에게 For Those Who Need Rest
마가복음 6:30~34
'Retreat'이라는 단어는 ‘후퇴하다’, ‘물러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Retreat을 피정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상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침묵기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몇년전 목회자 영성 수련회를 위한 리트릿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회장에 도착해서 보니 모든 일정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며 기도하는 수련회였습니다. 소리 내지 않고 식사하며, 서로가 대화도 하지 않고 침묵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첫날에는 답답함도 있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가 되자 분위기를 위해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사라지고 말을 해야한다는 책임감도 내려놓으니 오히려 리트릿 기간 동안 내면의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살아가는 자리에서 수많은 말들과 생각들을 듣고 살아가다가 반드시 침묵해야만 하는 시간속에 있으니 평소에 말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던 바람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새소리가 아름답게 들렸습니다. 말을 줄이며 마음의 쉼을 갖게 되니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어색하고 답답했지만,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더 명확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우는 나의 이야기가 차오를 때마다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침묵이 더욱 어렵습니다. 인정과 내 생각의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 사람을 만나 말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말이 우리의 마음을 쉬지 못하게 할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제자들은 전도여행을 하고 돌아 와서는 두가지를 보고합니다. (막6:30) 한가지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들이 귀신들린 사람들을 치유하고 억눌린 자들을 자유케 했던 일들이고, 또 한가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쳤던 경험입니다. 예수께서 권세를 주셨으니 얼마나 많은 믿음의 경험들을 하고 돌아왔을까요?
첫째, 예수님이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고 하신 것이 어떤 뜻일까요? (31절)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고 하셨습니다. 행간에 담긴 주님의 생각을 묵상하며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사역 후에 느끼는 내면의 감정들을 아셨을것입니다. 가르치고 치유하느라 육신이 피곤하고 지쳐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잠시 한적한 곳에 가서 쉬도록 하자"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리더십 분야에서 40년이 넘는 경력을 지닌 게리 매킨토시(Gary L. McIntosh, 1947-present) 교수가 쓴 "리더십의 그림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매킨토시는 영적 리더들이 실패 앞에 무너지는 이유를 성공에 대한 강박적 집념, 인정 받으려는 욕구, 열등감 등 다양한 형태로 설명합니다. 그는 그림자가 탁월한 성과를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되지만, 동시에 파멸로 이끄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흔한 예로 유명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추락하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마음의 균열을 감지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그림자의 악영향에 휘말리게 됩니다. 우리는 내면의 그림자를 인정해야 하며,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다스림 받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 선지자와의 영적 승리를 경험했지만, 이세벨의 말에 의해 두려움에 휩싸여 광야로 도망쳤고, 광야에서도 하루를 더 걸어서 로뎀나무 아래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40일 밤낮으로 먹이시며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강한바람과 지진, 불 같은 힘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종교적 열심으로 가득했던 엘리야에게 세미한 소리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가 혼자가 아님을 확인시켜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명의 사람들을 남겨 두셨음을 알려 주십니다. 엘리야의 모습은 우리 모습이기도 합니다. 숨겨져 있지만 내면의 강한 자아들이 어떻게 깨어지고 그 틈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엘리야를 영적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경험, 기준과 판단을 내려놓고 바알에게 입맞추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잠시 동안 침묵의 자리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침묵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을 다스리고 훈련하는 시간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초대 교부들은 침묵을 위해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늘날에도 침묵하는 시간은 분주한 일상 속에서 영적인 사막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침묵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내면의 많은 소음이 들려옵니다. 내면의 결핍감, 분노, 잊고 있던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깊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을 지니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갈망할수록 더 큰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더 깊이 뿌리 내리기 위해서 영적인 침체 속에서도 그분을 믿고 갈망해야 합니다.
태초의 시간은 깊은 침묵의 시간이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영혼의 고통과 괴로움을 통과하며 깨어짐을 통해 만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놀라운 영적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을 아껴야 합니다. 대부분의 분열과 갈등은 말로 인해 일어납니다. 사람을 살리고 회복하는 말보다는 부정적인 소리, 실패의 속삭임, 완벽주의로 인한 강박적인 요구들, 지나친 책임감으로 인한 부담감, 관계의 경계선이 무너져 생기는 오해의 말들이 세상에 넘쳐 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라고 했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면 완전한 자라는 표현은 그만큼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된 쉼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의 사건과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날이 저물어 갈때, 빈들에서 양식 다 떨어졌을때 모인 무리들을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십니다. 인생의 밤이 오고 마음이 허전할때 군중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가의 표현을 보며 다윗의 고백을 떠올리게 됩니다. 마가복음 6장 38절과 시편 23장의 구절이 오버랩됩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6: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6: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주님은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푸른 잔디는 목자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해줍니다. 다윗은 목자가 양을 푸른 초장에 누이듯이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심을 노래합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무리를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양 떼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양떼 가운데 어린 아이가 드린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는 교회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나눔 가운데 나타난 은혜의 사건입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속에서 쉼없이 달려가는 우리에게 참된 쉼은 공동체의 나눔을 통해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병을 고치러 오는 사람들, 아픈 사람들 데리고 온 사람들, 예수의 소문을 확인하려고 온 사람, 기적을 바라고 온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34 배에서 내린 예수께서는 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셔서, 여러 가지로 많은 가르침을 베풀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언제나 치유와 가르침에 있었습니다.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 물 위를 걸으신 일들, 게네사렛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병자들의 회복 사건들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6장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자는 다 회복을 얻으니라”라고 마칩니다.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 만족함을 얻기 위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면 됩니다. 우리가 구원이라고 여기며 움켜진 손을 펴면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움켜쥔 손에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과 내가 경험했던 것, 나의 것들이 가득합니다. 믿음생활을 해도 나의 방법으로 주님을 움켜 쥐려고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데 내 경험과 방식으로 주님을 이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움켜쥔 손을 펴야합니다. 실패할 것 같고, 죽을 것 같아서 힘을 주어 잡고 있었던 것들이 내려 놓아질 때 우리 앞에 주님이 계심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깨어진 인생의 조각들을 맞추시고 예수로 사는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알게 해 주십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그분의 품에서 참된 평안을 쉼을 누리게 됩니다.
셋째, 주님 안에는 긍휼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입니까? 목자가 없어서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쫓아 다녔지만 여전히 강한 자아를 지닌채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께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앞에 계시지만 여전히 허전함과 공허함으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목자가 없는 양이라 여기며 많은 가르침을 베풀기 시작하셨습니다.
노년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바울은 고난 가운데 로마 감옥에서 인내하고 있는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0절입니다. "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첫째는, 믿지 않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였으며, 두번째 이유는 주어질 영원한 영광 때문이었습니다.
제주도는 한세기 전만해도 왜적의 침입이 끊이질 않는 섬이었고 정치범들의 마지막 유배지였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도시로 변모했지만 제주의 역사에는 선교사들의 생명이 담겨져 있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때 예수를 믿고 회심하고 난 후 긍휼한 마음으로 제주에 발을 디딘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기풍 선교사 (1865- 1942) 입니다. 그는 평안도 평양에서 태어나 대부흥 운동때 회개하며 영혼을 향한 마음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는 당시 제주는 천대 받던 지역이고, 어둠의 땅이며 우상들이 가득한 땅이었던 제주로 들어가 7년 동안 그 땅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그곳에 최초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기풍 선교사는 주님을 만나고 정치적 유배지에 온 사람들이나 자신이 별반 다를게 없는 불쌍한 존재임을 깨달았을때, 긍휼한 마음을 지녔을 것입니다. 어둠속을 헤매던 자신에게 긍휼함을 베풀어 주신 주님이 살아 계시니까 유배지들이 살던 땅으로 들어갈 용기를 내었을 것입니다.
하나의 곡이 완성되려면 음과 음 사이에 쉼표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고난은 아름다운 삶의 노래가 만들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주기의 반복적 과정들 보다 영적으로 주어진 시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성도들도 죄로 부터 해방시킨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쉼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에 뿌리를 두며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8장으로 가면 예수께서 맹인 한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의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신 후에 무엇이 보이냐고 묻자,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다는것 같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또 한번 그의 눈에 안수하시니 그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어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어도 자신의 실존을 걸어 다니는 나무 정도로 밖에 볼 수 없어서 평생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목자가 되시는 주님을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 말씀의 권위를 온전히 받아 들이고 다시 눈을 떠야 합니다. 신앙이 깊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실존을 정확히 바라볼때에 영생을 얻게 됩니다. 참된 본질을 본 사람은 인간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수 없고, 새로운 삶은 하나님께서 긍휼의 마음으로 베풀어 주신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8:25 예수께서 다시 한 번 그 맹인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어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마땅이 보여야 할 만큼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단계에 있습니까?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최종적 쉼의 때를 향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며,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회복과 안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아픔과 외로움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 나가면 됩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치유와 가르침의 사역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게 하는 중요한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말씀하셨습니다. 배움을 통해 너희가 마음의 쉼을 얻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깊이 알고 배우고 계십니까?
복음이 깊어 질수록 사람을 대하는 것이 달라지고 변화되고 있으신가요? 우리의 신실한 기도와 신실한 행위는 일부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이정표를 바라보시며 주어진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시길 축복합니다. 삶에 진정한 변화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뜻이 우리의 삶속에 임하는, 그 거룩한 힘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7/21/2024 | (성령강림후 제 9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2 쉼이 필요한 당신에게 For Those Who Need Rest
마가복음 6:30~34
'Retreat'이라는 단어는 ‘후퇴하다’, ‘물러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Retreat을 피정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상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침묵기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몇년전 목회자 영성 수련회를 위한 리트릿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회장에 도착해서 보니 모든 일정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며 기도하는 수련회였습니다. 소리 내지 않고 식사하며, 서로가 대화도 하지 않고 침묵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첫날에는 답답함도 있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가 되자 분위기를 위해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사라지고 말을 해야한다는 책임감도 내려놓으니 오히려 리트릿 기간 동안 내면의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살아가는 자리에서 수많은 말들과 생각들을 듣고 살아가다가 반드시 침묵해야만 하는 시간속에 있으니 평소에 말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던 바람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새소리가 아름답게 들렸습니다. 말을 줄이며 마음의 쉼을 갖게 되니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어색하고 답답했지만,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더 명확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우는 나의 이야기가 차오를 때마다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침묵이 더욱 어렵습니다. 인정과 내 생각의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 사람을 만나 말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말이 우리의 마음을 쉬지 못하게 할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제자들은 전도여행을 하고 돌아 와서는 두가지를 보고합니다. (막6:30) 한가지 일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들이 귀신들린 사람들을 치유하고 억눌린 자들을 자유케 했던 일들이고, 또 한가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쳤던 경험입니다. 예수께서 권세를 주셨으니 얼마나 많은 믿음의 경험들을 하고 돌아왔을까요?
첫째, 예수님이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고 하신 것이 어떤 뜻일까요? (31절)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고 하셨습니다. 행간에 담긴 주님의 생각을 묵상하며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사역 후에 느끼는 내면의 감정들을 아셨을것입니다. 가르치고 치유하느라 육신이 피곤하고 지쳐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잠시 한적한 곳에 가서 쉬도록 하자"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리더십 분야에서 40년이 넘는 경력을 지닌 게리 매킨토시(Gary L. McIntosh, 1947-present) 교수가 쓴 "리더십의 그림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매킨토시는 영적 리더들이 실패 앞에 무너지는 이유를 성공에 대한 강박적 집념, 인정 받으려는 욕구, 열등감 등 다양한 형태로 설명합니다. 그는 그림자가 탁월한 성과를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되지만, 동시에 파멸로 이끄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흔한 예로 유명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추락하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마음의 균열을 감지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그림자의 악영향에 휘말리게 됩니다. 우리는 내면의 그림자를 인정해야 하며,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다스림 받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 선지자와의 영적 승리를 경험했지만, 이세벨의 말에 의해 두려움에 휩싸여 광야로 도망쳤고, 광야에서도 하루를 더 걸어서 로뎀나무 아래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40일 밤낮으로 먹이시며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강한바람과 지진, 불 같은 힘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종교적 열심으로 가득했던 엘리야에게 세미한 소리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가 혼자가 아님을 확인시켜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명의 사람들을 남겨 두셨음을 알려 주십니다. 엘리야의 모습은 우리 모습이기도 합니다. 숨겨져 있지만 내면의 강한 자아들이 어떻게 깨어지고 그 틈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엘리야를 영적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경험, 기준과 판단을 내려놓고 바알에게 입맞추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잠시 동안 침묵의 자리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침묵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을 다스리고 훈련하는 시간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초대 교부들은 침묵을 위해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늘날에도 침묵하는 시간은 분주한 일상 속에서 영적인 사막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침묵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내면의 많은 소음이 들려옵니다. 내면의 결핍감, 분노, 잊고 있던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깊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을 지니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갈망할수록 더 큰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더 깊이 뿌리 내리기 위해서 영적인 침체 속에서도 그분을 믿고 갈망해야 합니다.
태초의 시간은 깊은 침묵의 시간이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영혼의 고통과 괴로움을 통과하며 깨어짐을 통해 만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놀라운 영적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을 아껴야 합니다. 대부분의 분열과 갈등은 말로 인해 일어납니다. 사람을 살리고 회복하는 말보다는 부정적인 소리, 실패의 속삭임, 완벽주의로 인한 강박적인 요구들, 지나친 책임감으로 인한 부담감, 관계의 경계선이 무너져 생기는 오해의 말들이 세상에 넘쳐 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라고 했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면 완전한 자라는 표현은 그만큼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된 쉼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의 사건과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날이 저물어 갈때, 빈들에서 양식 다 떨어졌을때 모인 무리들을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십니다. 인생의 밤이 오고 마음이 허전할때 군중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가의 표현을 보며 다윗의 고백을 떠올리게 됩니다. 마가복음 6장 38절과 시편 23장의 구절이 오버랩됩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6: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6: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주님은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푸른 잔디는 목자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해줍니다. 다윗은 목자가 양을 푸른 초장에 누이듯이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심을 노래합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무리를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양 떼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양떼 가운데 어린 아이가 드린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는 교회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나눔 가운데 나타난 은혜의 사건입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속에서 쉼없이 달려가는 우리에게 참된 쉼은 공동체의 나눔을 통해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병을 고치러 오는 사람들, 아픈 사람들 데리고 온 사람들, 예수의 소문을 확인하려고 온 사람, 기적을 바라고 온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34 배에서 내린 예수께서는 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셔서, 여러 가지로 많은 가르침을 베풀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언제나 치유와 가르침에 있었습니다.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 물 위를 걸으신 일들, 게네사렛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병자들의 회복 사건들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6장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자는 다 회복을 얻으니라”라고 마칩니다.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 만족함을 얻기 위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면 됩니다. 우리가 구원이라고 여기며 움켜진 손을 펴면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움켜쥔 손에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과 내가 경험했던 것, 나의 것들이 가득합니다. 믿음생활을 해도 나의 방법으로 주님을 움켜 쥐려고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데 내 경험과 방식으로 주님을 이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움켜쥔 손을 펴야합니다. 실패할 것 같고, 죽을 것 같아서 힘을 주어 잡고 있었던 것들이 내려 놓아질 때 우리 앞에 주님이 계심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깨어진 인생의 조각들을 맞추시고 예수로 사는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알게 해 주십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그분의 품에서 참된 평안을 쉼을 누리게 됩니다.
셋째, 주님 안에는 긍휼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입니까? 목자가 없어서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쫓아 다녔지만 여전히 강한 자아를 지닌채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께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앞에 계시지만 여전히 허전함과 공허함으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목자가 없는 양이라 여기며 많은 가르침을 베풀기 시작하셨습니다.
노년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바울은 고난 가운데 로마 감옥에서 인내하고 있는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0절입니다. "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첫째는, 믿지 않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였으며, 두번째 이유는 주어질 영원한 영광 때문이었습니다.
제주도는 과거에 왜적의 침입이 끊이질 않는 섬이었고 정치범들의 마지막 유배지였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도시로 변모했지만 제주의 역사에는 선교사들의 헌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때 예수를 믿고 회심하고 난 후 긍휼한 마음으로 제주에 발을 디딘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기풍 선교사 (1865- 1942) 입니다. 그는 평안도 평양에서 태어나 대부흥 운동때 회개하며 영혼을 향한 마음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는 당시 우상들이 가득한 어둠의 땅, 제주도로 들어가 7년 동안 그 땅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최초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기풍 선교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를 경험합니다. 어둠속을 헤매던 자신에게 긍휼함을 베풀어 주신 주님이 살아 계시니까 하나님은 그를 통해 선할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지역이기에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성경을 가르치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진 구원의 신비로 부터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하나의 곡이 완성되려면 음과 음 사이에 쉼표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고난은 아름다운 삶의 노래가 만들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주기의 반복적 과정들 보다 영적으로 주어진 시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성도들도 죄로 부터 해방시킨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쉼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에 뿌리를 두며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8장으로 가면 예수께서 맹인 한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의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신 후에 무엇이 보이냐고 묻자,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다는것 같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또 한번 그의 눈에 안수하시니 그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어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어도 자신의 실존을 걸어 다니는 나무 정도로 밖에 볼 수 없어서 평생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목자가 되시는 주님을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 말씀의 권위를 온전히 받아 들이고 다시 눈을 떠야 합니다. 신앙이 깊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실존을 정확히 바라볼때에 영생을 얻게 됩니다. 참된 본질을 본 사람은 인간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수 없고, 새로운 삶은 하나님께서 긍휼의 마음으로 베풀어 주신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8:25 예수께서 다시 한 번 그 맹인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어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마땅이 보여야 할 만큼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단계에 있습니까?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최종적 쉼의 때를 향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며,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회복과 안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아픔과 외로움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 나가면 됩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치유와 가르침의 사역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게 하는 중요한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말씀하셨습니다. 배움을 통해 너희가 마음의 쉼을 얻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깊이 알고 배우고 계십니까?
복음이 깊어 질수록 사람을 대하는 것이 달라지고 변화되고 있으신가요? 우리의 신실한 기도와 신실한 행위는 일부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이정표를 바라보시며 주어진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시길 축복합니다. 삶에 진정한 변화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뜻이 우리의 삶속에 임하는, 그 거룩한 힘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7/14/2024 | (성령강림후 제 8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1 고독한 믿음, 빛나는 은혜 Lonely Faith, Shining Grace
마가복음 6:14~29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순교 기사입니다. 마가는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소개되는 플래쉬백(Flash back)기법을 사용하여 세례 요한의 순교 사건을 소개합니다. 플래쉬백(Flash back)기법은 17절에서 시작됩니다. ‘일전에’ 라고 하면서 마가는 세례 요한의 순교 사건의 전말을 전해줍니다. 등장인물을 보면, 숭고한 희생자 세례요한, 세속적 권력의 대표자 헤롯, 권력의 희생자 헤롯의 동생 빌립, 악독한 헤롯의 불륜녀 헤로디아,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헤로디아의 딸이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에서 등장하는 헤롯왕은 우리가 잘 아는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헤롯대왕은 예수가 탄생 시기에 새로운 왕의 탄생을 막고자 2세 이하의 유아학살 명령의 내렸던 포악한 왕입니다.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는 B.C. 4년부터 A.D.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으로 통치했습니다. 마가복음 6장의 전체 문맥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분봉왕 헤롯도 그 소문을 들었다."라고 시작합니다. 예수의 사역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알려졌을 텐데 그 소문을 듣고 헤롯은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의 영이 예수께 들어가서 다시 살아 났을거라 여기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가 한 독백을 보면 "내가 목을 벤 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중얼거리며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도 양심을 파고드는 진리의 앞에서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마가는 플래쉬 기법을 사용하여 당시 헤롯왕가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2가지 사건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세상 권력의 핵심인 왕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륜사건이고, 두번째는 하나님의 나라의 의로운 사람에 대한 살해사건입니다.
마가가 소개하는 헤롯가문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헤롯왕이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습니다. 1세기 유대 역사학자이며 로마 시민이었던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 안티파스는 로마를 방문하는 도중 동생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사랑에 빠졌고, 동생과 이혼시키고 아내로 맞이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로 인해 세례요한은 헤롯의 재혼을 두고 “그 일은 잘못된 일이오!” 하면서 입바른 말로 충고했습니다. 헤롯왕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인 요한의 말을 두려워 하고, 내적으로 괴로워 했지만 그를 옥에 가뒀습니다. 그런데 헤롯왕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가 요한에게 앙심을 품었습니다. 그런던 중에 좋은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을 맞아 고관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 지역의 유지들을 모두 초청하여 큰 잔치를 열게 되는데 헤로디아와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춤을 선 보이게 됩니다. 그 자리에 공주가 친히 들어와 춤을 추는 일은 특이한 일로서, 헤롯을 유혹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당시 헤롯 왕은 헤로디아의 딸의 유혹에 빠져 자신의 생일 잔치를 즐겁해 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원한다면, 내가 떼어 주겠다."라고 잔치에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인 약속을 합니다.
그러자 헤로디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딸에게 요한의 목을 베어 가져 달라고 시킵니다. 딸은 어머니의 요청을 그대로 전하게 됩니다. 이 일로 헤롯왕은 근심과 후회가 되나 앉아 있던 자들 앞에서 왕의 말의 책임과 무게가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경비병을 시켜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했습니다. 우리는 헤롯 왕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1세기나 지금이나 세상은 혼탁합니다.
1세기 헤롯 왕궁에서의 불륜 사건과 딸을 이용해 왕을 유혹한 사건을 보면 당시 왕실의 타락상을 보여줍니다. 또한 세례요한의 살해 사건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가 얼마나 추락했는지도 알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진리를 말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허용되는 상황적 윤리나 가치 기준으로 인해 기독교의 진리는 희망사항 정도로만 여겨집니다. 성경의 진리를 지키는 사람들은 내면의 신앙적 갈등으로 기독교적 진리가 충돌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적 진리를 전하는 일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성적으로는 얼마나 타락된 세상을 살아갑니까? 헤로디아의 딸은 소녀티를 벗은 결혼 적령기에 이른 처녀를 가르키는 '코라시온'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헤롯왕은 헤로디아 외에도 그의 딸까지 아내로 삼으려 했다고도 합니다. 그만큼 성적으로 타락한 왕이었음을 유대 역사의 기록들이 전하고 있습니다.
헤로디아가 앙심을 품고 요한의 머리를 요구한 사건은 오늘날에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사람이 앙심을 품으면 그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혈기와 욕심, 교만의 죄가 상황만 만나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다스림 받지 않고 앙심을 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죄에 이끌려 가게 됩니다. 헤롯왕의 내적갈등은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안에서 겪게 되는 갈등처럼 보여집니다. 왕의 자리에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의식하는 헤롯은 연약한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보여주는 메타포적 인물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께 기억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기억해 주신다면 고독하게 믿음의 길을 정진하며 갈 용기가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얻게 되는 고통을 견뎌낼 믿음이 있으신가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마태복음 12장 47절에서 5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7 어떤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하려고 밖에 와 계십니다.” 하고 전하자, 48 예수께서 물으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요?”49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보시오,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 형제요 내 자매요 내 어머니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지키는 자가 내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삶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고독한 믿음의 길을 걷더라도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혼탁한 세상속에서 성도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믿음의 눈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없이 구조적 변화만 추구한다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은 계속되는 과제만 만들어 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는 성찰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의 빛을 바라보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스스로 질문하시며 존재를 변화를 일으키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요한은 세상의 권력자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세상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고,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라고 추종할때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자신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자 그는 스스로 사라졌습니다. 그는 목베임을 당하며 고독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예수의 길을 예비한 그의 외침은 살아 있었습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순교의 피로 인해 확장이 됩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적지 않는 충격을 받고 슬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쳤던 말은 그가 순교 한 후에 요한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마음에 더 묵직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요한은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졌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 많은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조선땅에서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1840~1866)를 소개합니다. 그는 27살 마지막 생명의 불꽃이 꺼지는 순간까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칼을 높이 쳐든 조선의 관군에게 성경을 전하며 생애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는 토마스가 타고 온 배였습니다. 1866년 8월 20일 토마스가 탄 배는 대동강 하류에 도착합니다. 당시 조선은 철저한 쇄국정책 아래 경계가 심했고, 경계를 서던 병사들은 지휘아래 사격을 가했습니다. 불에 타는 배에서 어떤 사람은 불에 타죽고, 겨우 헤엄쳐 나온 사람들은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불을 피해가면서 배에 있던 성경을 계속 던지며 한권의 성경을 품에 품은채 강 언덕 위로 끌어 올려져 병사의 칼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품에서 성경을 꺼내어 자기를 치려는 병사에게 주면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병사가 주춤하는 사이에 그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기도를 올렸고, 마침내 그 병사의 칼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토마스를 죽인 병사는 성경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에게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때에 그는 두손을 마주 잡고 무슨 말을 한 후 이 책을 가지고 나에게 받으라고 권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죽이기는 하였느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 왔노라…”
이 글을 읽는데 제 눈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영국의 웨일즈의 어느 시골에서 태어난 한 사람의 마음에 복음을 향한 씨가 심겨졌고, 그 복음의 씨는 그를 죽인 조선의 한 관군의 마음에 떨어진 것입니다. 당시 제너럴 셔먼호에서 던진 책을 습득한 사람 중에 11세 최치량이라는 소년은 불온한 책을 불태우라는 포고령에 성경을 없애 버렸고, 당시 박영식이라는 사람은 남들이 버리는 성경을 모아다가 자기 집벽에 도배지로 사용합니다. 훗날 최치량이라는 사람이 그 집을 사서 여관으로 경영했는데 벽에 바른 성경을 보고 한국 개신교 교단의 최초의 목사가 나오게 됩니다. 최치량도 나중에 전도를 받아 평양 대부흥 운동의 시작이 된 장대현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신앙심이 깊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 마음에 흐르는 것입니다. 그 피의 의미가 깊어져야만 우리 안에 있는 혈기를 참아 낼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선지자로 하나님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한 세례 요한의 순교의 무게감이 느껴지시나요?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아도 세계 곳곳에는 지금도 세상에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시선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멈춘 것 같아도 그때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멈추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 시간에도 희망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믿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해줍니다.
셋째로, 고독의 자리는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6:29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스승의 시체를 거두어다 장례를 치렀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장례식에는 말할수 없는 고독감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인생에 고독감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 고독의 자리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없는 내 모습으로 서는 것입니다. 고독의 자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평안으로 자유함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니까 예수를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혼자 산으로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자리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마태는 예수께서 세례요한의 순교사건을 기록하고 죽음의 소식을 들으신 예수께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요한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애도의 반응임을 알수 있습니다. 주님도 고독의 자리로 가셔서 요한을 기억하셨던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0절로 13절입니다. "10 결국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목이 잘렸고, 11 그의 머리는 쟁반에 담겨 소녀에게 건네졌다. 그러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갖다 주었다. 12 이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한 뒤에, 예수께 가서 그 일을 알렸다. 13 그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그곳을 떠나 배를 타고 혼자 외딴 곳으로 물러나 계셨다." (마 14:10-13)
사명자는 반드시 용기를 지니고 고독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평생 살아가면서 이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 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습니다. 맡겨진 책임을 완수하는 과정이 버거울 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내 삶이 한없이 초라한 것 같을때, 예수께서 깨어진 세상에 오셔서 빛나는 은혜로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덮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연약할때에, 죄인되었을때에,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지 않았을때에도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함, 썩지 않을 소망을 세상에 드러내게 됩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무대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사명자로 살아간다는 것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열심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집나간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고독의 자리에 있을때 아버지는 아들을 잊지 않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 왔을때, 아버지는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다가 내가 얻었다고 즐거워 하셨습니다. 이땅에서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두가 함께 하는 성도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의 빛나는 은혜가 이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소망입니다.
7/7/2024 | (성령강림후 제 7주)
건강한 교회 시리즈 20 믿음없는 세상속에서의 사명 The Mission in a World Without Faith
마가복음 6:1~13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요 '고향의 봄'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이원수 시인(1912-1981)이 작사했습니다. 그래서 가사 안에는 조국의 독립을 그리워하는 독립운동가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노래는 외국에서 살고 있는 이민자들에게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낯선땅에서 주변인으로 살면서 고향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남모르는 설움과 외로움을 견뎌내며 현실의 무게가 짓누를때에 때를 따라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믿음이 더 깊어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땅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예수께서 어린시절 부모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던 곳이고, 유년 시기에는 친구들과 함께 뛰어 놀던 추억의 장소이며,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기까지 말씀을 배우며 성장하셨던 익숙한 동네입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함께 찾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꺼리고 복음을 배척하며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나라를 잃은 민족의 처절함과 고향을 잃어버린 예수님의 마음이 오버랩됩니다. 고향에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전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 앞에서 면목없이 그 권위가 철저하게 무시 당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를 열린 마음으로 경험하라
3절입니다. 3 저 사람은 한낱 목수가 아니던가? 또한 마리아의 아들이고,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여기서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꺼려하고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저 사람은 본래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의 동생들인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도 우리가 다 알고 있다." 마 13:55
하나님 나라의 힘은 복음이 상업주의화 되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뚤어진 세상 속에서 복음이 증거되면 배척 당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의 가르침, 지혜, 기적까지 보고 들은 사람들이 그들 안에 선입견으로 인해 예수의 가르침을 꺼렸습니다. 본문의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13장 55절은 '저 사람은 본래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오늘 본문에서는 '저 사람은 한낱 목수가 아니던가?' 라고 언급합니다. 두 구절의 말씀들을 비추어 보면 예수님은 목수 아들로 태어나서 목수의 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 안에 예수를 목수의 아들로만 여겼던 선입견이 있었고,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누군가의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은 그 아버지가 죽은 경우라고 해도 상대를 모욕하는 경우가 아니고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고향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꺼린 것은 목수에 불과한 예수 너가 우리에게 보인 지혜와 권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나사렛 사람들은 선입견을 지닌채 혈연관계속에서 예수의 존재를 파악하려고만 했습니다.
만일 우리도 선입견을 갖고 말씀을 들을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제한됩니다. 예수님을 지식으로 알고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배척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내가 저 사람을 다 알고 있다라고 선입견을 갖고 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다 알 수도 없고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심리학에서 조해리의 창(Johari’s window) 이론이 있습니다. 조해리의 창 이론은 조셉 러프트(Joseph Luft)와 해리 잉햄(Harry Ingham)이라는 두 심리학자가 1955년에 발표한 논문을 토대로 개발한 이론인대요. 조해리(Johari)는 두 사람 이름을 합성해서 만든 용어입니다. 간단히 소개하면 나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우리 안에 4가지 마음의 창입니다. 첫째는 자신도 알고 타인도 아는 ‘열린 창’, 둘째는 자신은 알지만 타인은 모르는 ‘숨겨진 창’, 세번째 창은 나는 모르지만 타인은 아는 ‘보이지 않는 창’, 마지막으로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미지의 창’ 입니다. 사람은 내가 보지 못하는 영역을 타인을 통해 보게 되기도 하고,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 있습니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판단하며 알았다고 생각하는 창은 그저 작은 영역일뿐입니다.
인간은 평생 내가 누군인지를 깨달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발견한 사람은 하나님과도 친밀한 교제를 하게 됩니다. 믿음생활에서 불신이 높아질수록 숨겨진 창이 더 넓어질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지고 깊어질수록 말씀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열어가는 열린 창이 넓어질 것입니다. 어쩌면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고 외면 당하는 일입니다. 볼수 없는 부분을 전하며 이해시키려고 하다 보면 영적인 공격은 언제든 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느끼는 장소였습니다. 에덴은 모든 인간의 고향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슬픔과 아픔도, 시기와 미움, 분열과 전쟁, 판단도 정죄함도 없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에덴의 평화로운 삶이 깨져 버렸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이후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에덴에 인간의 웃음소리는 끊어졌고, 인간이 떠난 자리에는 공허와 혼돈만 가득하고 하나님의 슬픔이 느껴집니다. 죄로 인한 불신은 고향땅을 찾아가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선입견이 하나님 나라를 제한한다면 우리는 겸손하게 그분의 다스림과 통치를 구해야 합니다. 에덴을 떠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이상적인 에덴을 만들려고 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수고와 슬픔,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바른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확신과 자기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설 때에 더해지게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없습니다. 선입견이 없는 열린 마음으로 세상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셨을까요?
7 ○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둘씩 짝지어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시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신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1세기 팔레스타인 사회는 오늘날처럼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귀신 들림의 현상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학적 치료를 행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의사들은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환자를 의술로 치료하기보다는 영적인 충고자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모든 질병이 악한 영에 의해 생긴다는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육체적인 병을 의학적으로 분리해서 치료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영혼이 피폐해져 가는 이들은 마음에 더 큰 불안과 근심에 억눌렸을 것이고 사회적 고립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신 것은 이들의 영혼과 육체를 회복시키고 사회적으로 경계선 밖으로 밀려난 이들을 포용하고 돌보며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사랑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당시에 예수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마술을 사용해 귀신을 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었고, 자신을 우상화하려는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주어 낫게 해줍니다. 당시 기름은 상처를 치유하는 치료제였습니다. 현대인들은 관계에 지치고, 노동의 피로로 인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져 갑니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가 사라지고 공황장애를 호소하는 이들이 많아집니다.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어버리는 아이들, 거짓된 자아로 인해 불신을 조장하는 사람들, 믿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마음을 다치고 서로가 믿는 하나님이 다른것만 같은 마음조차 느끼게 됩니다. 인간의 구원은 영혼의 치유만이 아니라 마음 안에 상처의 가시를 뽑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권세로 집착과 억압으로 부터 풀려진 사람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고, 타인을 혐오하지도 않습니다. 용서받은 믿음은 우리를 열린 사고로 인도해 줍니다. 참된 삶은 수평의 세계에서 홀로 행복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수직적 세계관을 통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하나님 나라를 현실에 뿌리 내려,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게 하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마을을 떠날 때까지 한 집에서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당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필요를 아시고 미리 준비해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지혜로 모든 상황속에서 최상의 것을 응답해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결핍된 시대를 살아갑니다. 복음전도도 세속적인 것을 전하게 되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집니다. 전도는 예수를 팔아서 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시대속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받은 복을 나눠주고 흘려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은 많은 것을 소유한 삶이 아니라, 귀한 것을 나누고 베푸는 삶입니다.
상품화된 복음은 우리를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복음이 상품화 되는 시대에, 복음을 듣는 이들이 성도들에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더 깊이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그들의 집에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어느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마을을 떠날 때까지 한 집에서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 주님의 권면은 단순히 장소적 의미만이 아니라 그가 처한 상황에 참여하라는 뜻입니다.
수시로 변화되고 개인주의화되는 현대사회에서 오래 머무르는 것은 필수적인 영성입니다. 이 시대에 주님의 자녀들은 이러한 영성이 필요합니다. 오래 머무르는 영성은 단기적인 성과를 추구하기 보다 하나님의 시간 안에 거하며 머무르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 빨리 좋은 성과를 내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성실함과 꾸준함으로 일하기보다 효율을 높이고 보여지는 결과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교회일을 할때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묵묵히 하나님의 시간안에 머물러 겸손하고 성실하게 주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있도록 선택하셨다는 믿음으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니어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본문의 10절 말씀에서 한 집에서 계속 머무르라는 것은 복음 안에 있는 관계성을 실천하라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영향력은 오랜 시간 함께 머물며 서로의 관계가 깊어질 때 형성됩니다.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어떠한 일을 무리하게 해 나가다 보면 그 일들이 그르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건 방향이고 관계입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를 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필요한 사역과 복음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신앙 공동체는 함께 모여 예배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더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으로 서로가 연결되어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할때에 더욱 견고해 집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것 처럼 믿음 생활은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우리의 믿음을 진단하고 점검하여 우리의 영적 건강을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배 시간이나 기도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를 높이는 삶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속에서 사명은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구원은 편협한 사고를 버리고, 내 믿음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시는 전인격적인 삶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과 육를 지닌 존재로 창조 하셨기에 우리가 편안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만큼 죄의 유혹도 부지런히 따라오게 됩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부르신 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삶의 모든 행실에 거룩한 사람들이 되십시오(벧전1:15)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위기와 도전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까지 믿음의 여정을 지속하시길 바랍니다.
6/30/2024 |
우리는 왜 예수를 믿는가? Why Do We Believe in Jesus Christ?
요한복음 3:16, 에베소서 2:10
“왜 크리스천들이 비난을 받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전문가들이 내놓는 중요한 것 두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크리스천들이 사회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마태복음 5:13-14)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크리스천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의 신앙이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고, 교회 밖에서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영어 단어에 무슨 뜻이 있는지 아십니까? 웹스터 영어 사전에 ‘One who professes belief in the teachings of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른 사전들도 약속이나 한듯이 똑 같은 크리스천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김대건(1821-1846)’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탄생(2022)’을 보았습니다. 아주 잘 만든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습니다. 이 영화의 압권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기 전 마지막 남긴 말입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주인을 알지 못하면 보람이 없고, 살아도 쓸 데가 없습니다. 천주께서 곧 나보다 더 착실한 목자를 끊임없이 보내 주실 것이니, 서러워 말고 큰 사랑 을 이루어 한 몸같이 천주를 섬기다가, 영원한 천주 대전에서 만나 길이길이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김대건’은 불과 15살에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현종(顯宗)은 라틴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지리, 측량 등 다방면에 박학했던 그의 재능을 몹시 아까워서 살리고 싶었지만 결국 김대건 신부는 25 세의 나이로 순교 했습니다. 저는 그가 마지막 남긴 말에서 강한 크리스천의 향기가 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이런 감동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그대는 나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가르치는 것과 살아가는 방식과 삶의 목적, 그리고 나의 믿음과 인내와 사랑, 끊임없이 노력하는 나의 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0) 바울의 삶은 분명했습니다. 그가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 그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제자 디모데가 보기에 바울의 삶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 세대에 와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는지, 왜 크리스천들은 세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비난을 받는지, 왜 크리스천들이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욕을 먹고 있는지, 한번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 이유가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잘못되었다면, 그 결과가 나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모든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소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 또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다 보면 병이 낫기도 하고, 어렵던 사업이 잘 되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를 믿는 모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식들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어서 자식들이 잘 되기만 한다면 자기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교회에서 권사직까지 받은 사람이었는데요. 하도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답답해서 그 사람에게 물어봤습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이 “저야 뭐.....” 하면서 말꼬리를 흐리더니 “제 와이프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하고 저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이유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이 질문은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질문(the foundational question)’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을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크리스천들은 철학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하고, 질문하고, 대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다행히 오늘 본문 말씀에 그 이유와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우리가 ‘영생’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맞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영생’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한자로는 ‘永生’이라고, ‘길 영, 날 생’자를 씁니다.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영생’이라는 말이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삶의 ‘길이’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영생은 곧 한 분이신 참 하나님과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 영어 성경에는 좀 더 분명하게 이 말씀의 뜻이 나와 있습니다. “And this is the way to have eternal life-to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the one you sent to earth (이것이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즉 오직 참된 하나님이신 당신을 알고, 당신이 세상에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알다’라는 말은 ‘γινώσκω(ginōskō)’라는 그리스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의 어원은 ‘지식’을 뜻하는 ‘γνῶσις(그노시스)’입니다. 그러므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지각을 이용하여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get a knowledge of perceive, feel). 단순히 ‘know’라는 영어 단어를 가지고는 그 뜻을 완전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영생’을 ‘길이’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인 개념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착한 일을 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이미 오래 전부터 선한 일을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선하게 되도록 그렇게 계획해 놓으셨습니다(For we are God's master- 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 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에베소서 2:10)
성경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저는 이 말씀이 로마서 3:21 말씀과 함께 복음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매스터피스’입니다. ‘매스터피스’는 작가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작곡가 헨델(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의 ‘매스터피스’는 ‘메시아(Messiah)’입니다. 헨델은 이 작품을 쓸 당시 끼니를 잊을 정도로 몰입했다고 합니다. 가끔씩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울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자필 악보에 “그는 멸시를 당하였다(He was despised)”는 부분에는 그의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메시아’ 악보의 맨 끝에는 자필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Soli Deo Gloria)”이라고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작곡가 헨델의 ‘매스터피스’가 ‘메시아’인데, 성경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매스터피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죄가 들어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대로 우리가 살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밀한 교제의 삶을 통해서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창조가 일어납니다.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창조가 우리 속에서 일어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삶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러분의) 옛 모습을 벗어 버리십시오. 옛 사람은 한없는 욕망으로 점점 더 눈이 어두워져 더 악하고 더러운 모습이 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모습처럼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십시오.” (에베소서 4:22-24)
누가 저에게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제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저의‘인간성'이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성’을 회복한다는 말은 ‘참 사람’, ‘참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거짓말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불의 앞에서 분노할 줄 알고, 눈 앞에 있는 작은 이익을 탐내지 않고, 사람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사람, 이런 사람으로 살기 위해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 수 있고,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생활의 성패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밀한 삶에 달려 있습니다. 그 밖에 다른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날마다 나누는 ‘펠로우십(fellowship)’ 에 모든 힘을 쏟아야 우리의 ‘인간성’이 회복됩니 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각이 어느 새 나의 생각이 되고, 성경이 제시하는 삶의 가치들이 어느 새 나의 가치관이 되어 그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끝으로,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배워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면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폴 워셔(Paul David Washer, 1961- 미국)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여러분의 삶을 비교하지 말고, 자신을 성경과 비교하십시오 (Stop comparing yourself with others who call them-selves Christians. Compare yourself to the Scripture).”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나는 저 사람보다 훨씬 낫다는 우월감 에 빠지게 쉽고, 반대로 열등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마땅히 행동을 해야 할 때에도 “저런 사람도 가만히 있는데, 내가 뭘......” 하면서 주저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성경과 비교하면, 자신을 반성하게 되고, 때로는 말씀을 통해 격려를 받기도 하고, 용기를 얻게 됩니다.
저는 요즘에 음악을 많이 듣습니다. 전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까 음악을 듣게 됩니다. 클래식도 듣고, 팝송도 듣습니다. 어느 채널에서 1970년 대에 유행했던 사이먼 앤 가펑클이 부른 ‘El Condor Pas(엘 콘도르 파사)’라는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가사가 전과는 다르게 들렸습니다. “나는 달팽이가 되느니 차라리 참새가 되고 싶다. 나는 못이 되느니 차라리 망치가 되고 싶다.” “차라리 참새가 되고 싶다” “차라리 망치가 되고 싶다” 라는 가사가 강력한 메타포(은유)로 제 귀에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느리고, 게으르고, 항상 제 자리를 맴도는 수동적인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소망하면서 오늘 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