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7/2020 | 송년예배/In Times Of Trouble 38

팬데믹에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 God’ Word In The Midst Of A Pandemic

마태복음 10:29-31, 누가복음 13:1-5, 로마서 8:28

오늘은 일년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주일입니다.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시작해서 코로나바이러스로 마치는 해가 되었습니다. 몇 몇 회사에서 백신이 나왔고 접종을 시작했다는 뉴스가 들리는 가운데 미국도 그렇고, 유럽도 그렇고, 한국도 감염자들이 폭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 변이(變異)가 나왔다고 해서 걱정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변이된 코로나바이러스는 원래 코로나바이러스보다 전파력이 훨씬 강하다고 합니다.

지금 현재 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망한 사람이 1,800,000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1918년 스페인 독감 때도 전세계적으로 감염자가 나왔습니다. 감기에 걸린 듯한 증상을 보이다가 폐렴으로 발전하는가 싶더니 환자의 피부에서 산소가 빠져나가면서 검은 빛으로 변해 죽어가는 병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 사망자 수가 50,000,000명이었습니다. 사망자 수를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1918년과 2020년은 전혀 다른 세상이니까요. 지금은 의학적인 지식의 수준이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도 발달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코로나바이러스로 1,800,000명이 죽었습니다. 이 숫자는 병원에서 확인된 사망자만 카운트한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검사도 받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을 감안하면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봐야 합니다. 

팬데믹 초기에는 조심스럽게 성찰의 말들이 나오는 것 같더니만, 지금은 팬데믹 기간이 길어져서 그런지 더 이상 성찰의 말들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꼭 들어야 세 개의 성경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로 나눌 말씀은 마태복음 10:29-31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을 때 제자들은 상당한 박해를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죽고 사는 일에도 하나님께서 관계하신다. 그런데, 너희들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들인데, 너희들이 받고 있는 박해를 하나님께서 모르시겠느냐?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여기서 참새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생명을 말합니다.

“God is in control”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통제(統制)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빛도 만들고 어둠도 만든다. 나는 평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재앙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한다(I form the light and create darkness, I bring prosperity and create disaster; I, the LORD, do all these things).”(이사야 45:7) 우리가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고 믿고 고난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찾는 이유는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고난이 하나님의 통제 속에서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세계가 고통을 받고 있는 팬데믹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이 팬데믹을 보는 크리스천의 시각은 어떤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팬데믹에 하나님께서 관계하고 계실까?” 이렇게 질문하면서 서로 의견들이 분분합니다. 팬데믹에 하나님께서 관계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사망자들이 나오는지 이유를 설명해야 합니다. 팬데믹으로 사망한 사람이 몇 명이라고 객관적으로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망자 속에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있고, 나의 친구가 있을 때는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요. 이미 사망자 수가 1,800,000명에 육박하는 이 엄청난 일에 하나님께서 관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관계하시는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망자가 나오는 엄청난 일에 당연히 하나님께서 관계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을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없어서 답답할 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깊은 뜻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은 참으로 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아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로마서 11:33)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마치 깊고 깊은 심해(深海)와 같아서 얼마나 깊은지 바닥을 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생각할 말씀은 누가복음 13:1-5입니다.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지는 바람에 18명이 깔려 죽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죽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마치 이번 팬데믹으로 죽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선하게 살지 않았던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조심성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불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죽음을 도구로 사용해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죽음을 이용하실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거든요? 여러분은 누구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내 삶을 반성해 본 적이 없습니까? 그 사람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좀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죽음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사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성경에 그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기 위해서 이집트 사람들의 장자들이 죽게도 하셨습니다. 바로의 특수 군대가 모두 홍해 바다에 빠져 죽게도 하셨습니다. 모압, 에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는 군사력이 절대적으로 열세했던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하심으로써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에서의 삶을 이용하시기도 하셨습니다(로마서 9:11-13). 하나님은 첫째 아들 에서를 버리고 둘째 아들 야곱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족보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지 전부터 그런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고 하지 않습니까?(창세기 25:23, 로마서 9:12).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걸 아세요? “모압은 나의 목욕통이다. 에돔 땅 위에 내가 신발을 던질 것이며, 블레셋에 대해 내가 큰 소리로 승리를 외친다.” (시편 60:8, 108:9)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Moab, my washbasin, will become my servant, and I will wipe my feet on Edom and shout in triumph over Philistia.” 여러분, 모압 에돔, 블레셋은 엄연히 주권을 가진 나라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 나라들을 목욕통으로, 신발장으로, 늘 전쟁에서 지는 역을 맡은 나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번 팬데믹으로 죽은 1,800,000명에 이르는 사망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참 아픕니다. 여러분들도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 속에 우리의 사랑하는 부모님이 있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형제들, 친구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죽음이 전혀 가치 없는 죽음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벌써 하나님께서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엄숙한 교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셨고, 삶에 대한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 설교문을 작성하면서 예수님께서 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을 때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우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누가복음 13:34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그 때 예수님께서 우신 이유는 이제 조금 있으면 멸망할 예루살렘이 그것을 모르고 회개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전히 예루살렘은 교만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안타까워서 우셨습니다. 저는 그 예수님의 눈물 속에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희생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안타까워하셨던 마음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로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시면서 2,000년 전에 예수님의 흘리셨던 눈물을 흘리고 계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내 주신 분입니다. 성경은 그 아들을 ‘begotten Son’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외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아들을 희생해서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자기 외아들을 내 주신 하나님의 아픔과 눈물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말씀에서 자기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 주신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주신 분께서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은혜로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서 8:31)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그만큼 소중한 존재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까지 희생하시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더 이상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눌 말씀은 로마서 8:28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계하고 계십니다. 빛도, 어둠도, 재앙도 모두 하나님께서 관계하시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분입니다. 저는 이것이 팬데믹을 보는 성경적인 시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서로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는 이 설교를 하고 있는 저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팬데믹이 이 세상을 나쁜 쪽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서 팬데믹이 끝나서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 제1차 대전을 겪고,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이 생겼습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인류는 엄청난 가치와 의식의 변화를 경험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팬데믹도 우리의 삶을 그렇게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팬데믹과 같은 엄청난 재난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하나님께서 팬데믹을 통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Fran Bunn이라는 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제목은 “God can bring blessings out of COVID-19 pandemic(하나님은 코비드19 팬데믹을 통해서 우리를 축복하실 수 있다)”입니다. 한번 들어 보세요. “COVID-19 is a bad thing, but there are good gifts that God can bring even from this. As I think about my own life, and maybe this is true for you, through COVID-19, I have been reminded that I do not control my life. COVID-19 has shown me that I am utterly and completely dependent on the living God. If I think I am in control of things, that is merely a pleasant illusion.” 어떻습니까? 나의 삶을 내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제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쉽게 일어나지 않는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팬데믹을 통해서 교회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C. S. Lewis가 많은 책을 썼습니다만, 제일 힘들게 쓴 책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 1942)’라고 합니다. 그만큼 그 책을 공을 들여 썼다는 말입니다. 그 책은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 ‘웜우드(Wormwood)’를 교육한 책입니다. 어떻게 교회를 파멸시키고 크리스천들의 믿음을 파멸시킬 수 있는지 ‘노하우’를 전수해 주는 내용의 책입니다. ‘웜우드’가 관리하던 한 사람이 최근에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스크루테이프’는 매우 화가 났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 절망할 필요는 없다. 현재 교회는 우리의 가장 큰 협력자 중 하나니까.” 루이스가 보고 있던 교회는 교회 안에 진실한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이 없고, 참된 회개가 없고,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겸손을 가장한 위선자들이 넘쳐나는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본질을 추구하지 않고 큰 건물, 많은 교인 수, 엄청난 교회 예산, 이런 것들에 마음을 쓰고 있는 한 교회는 이미 악마의 협력자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팬데믹을 겪고 있으서도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때를 기다리는 목사나 교인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들에게 ‘a pleasant illusion’이 될 것입니다. 이제 그런 것을 자랑하던 때는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팬데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교회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교회에 대한 설교는 2021년 1월 3일 새해 주일 설교로 이어집니다.) 

 


12/20/2020 | 크리스마스예배/In Times Of Trouble 37

목자들의 이야기 The Story Of The Shepherds

누가복음 2:8-19

오늘은 크리스마스 예배입니다.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팬데믹 상황에서 맞는 크리스마스 예배입니다. 벌써 우리의 의식구조와 일상생활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그것이 ‘new normal’이 되고 있는 때에,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성탄예배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말씀이 신명기 8장에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난 사십 년 동안, 여러분을 광야에서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시오. 주께서 그리 하신 까닭은 여러분을 겸손하게 만드시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가, 여호와의 명령은 지키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소.” (2절) 광야생활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감사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이 광야생활을 통해서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너희가 겸손하게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600년 전에 있었던 출애굽 때의 상황과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학교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지금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은 누구보다도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마스라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팬데믹을 핑계 대면서 나에 대해 감사할 것이 없다고 불평을 하고 있는지,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크리스마스를 기뻐하고 있는지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맞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내려 놓고 성탄의 은혜와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찬송이 어느 찬송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찬송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이 찬송을 들으면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듭니다. 이 찬송은 181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오스트리아의 ‘오벤도르프 (Obendorf)’라는, ‘잘스부르크(Salzburg)’에서 가까운 작은 마을의 한 성당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습니다. 그 성당의 신부였던 ‘조셉 모르 (Joseph Mohr)’가 가사를 쓰고, 그 교회 성가대 지휘자였던 ‘프란츠 그루버 (Franz Gruber)’가 곡을 썼습니다. 교회 오르간이 고장이 나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도록 심플한 멜로디로 작곡한 노래입니다. 이 찬송은 현재 300개 이상의 언어로 불려지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찬송이 되었습니다. ‘오벤도르프’는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조용하다고 합니다. 24일 전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거나 부르는 일도 없는, 인구 3,000명의 작은 마을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여행객들과 마을 주민들이 ‘Silent Night Chapel’에 모여 예배 드리는 것이 전부일 정도로 작고 조용한 마을입니다. 

며칠 전에 한 기사를 읽었는데요.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라는 시리즈 기사였습니다. ‘레오폴트 코어(Leopold Kohr, 1909-1994, 오스트리아)’라는 사람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레오폴트 코어’는 경제학자이며, 법률가 (Jurist)이며, 정치학자이며, 철학자입니다. 그 시대의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1937년에 프리랜서 특파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면서 조지 오웰, 어니스트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의 친구가 되었고, 2차 대전 중에는 뉴욕 저널에 반 히틀러에 대한 글을 기고하면서 파시즘과 싸웠습니다. 그가 쓴 대표작은 ‘국가의 붕괴(The Breakdown of Nations)’라는 책입니다. 그의 주장은 중앙집권적인 거대한 정부는 필요 없고 소규모의 사회조직을 구성하여 공동체적인 기능만 유지하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구 10만명 정도의 대학 도시인 잘스부르크나 인스부르크(Innsbruck) 정도의 소도시가 인간이 살기에 가장 알맞은 규모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그의 음악에서 인간의 삶과 자연의 조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모차르트의 고향 잘스부르크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레오폴트 코어는 1983년에 인류의 삶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킨 사람들에게 주는 Alternative Nobel Prize를 받았습니다.

이 글을 쓴 박홍규씨의 주장은, 이 레오폴트 코어의 고향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작고 조용한 마을 ‘오벤도르프’라는 것입니다. 작은 마을 ‘오벤도르프’에서 불후의 크리스마스 찬송이 나왔고, 이 작은 마을에서 레오폴트 코어 같은 사상가가 나왔고, 바로 옆 마을 잘스부르크에서 모짜르트가 나왔고, 그리고 레오폴트 코어에게서 영감을 받은 프리드리히 슈마허 (Ernst Friedrich Schumacher, 1911-1977, 영국) 같은 사람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슈마허가 1973년에 쓴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autiful: A Study of Economics As If People Mattered)’라는 책은 그가 레오폴트 코어의 집에 머물면서 썼다고 할 정도로 슈마허는 레오폴트 코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큰 건물이나 호텔도 없고, 번쩍번쩍한 쇼핑 센터도 없는 작은 마을, 자동차 보다는 자전거가 어울리고, 걷는 것이 어울리는 작은 계곡의 마을 ‘오벤도르프’에서 처음 불려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하는지 보여 준다고 했습니다. 가난하고 소박한 밤에 구세주를 찬양하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시끄럽고 화려한 파티의 크리스마스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 덕분에 파티 없는 조용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읽은 본문 말씀 속에 나오는 ‘목자들의 이야기’는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의 무대는 베들레헴 근교의 들판입니다. 한 밤중에도 목자들은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목자들이 지키고 있는 양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부자들의 소유이거나,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될 양들일 것입니다. 갑자기 천사들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둘러 비췄습니다. 이 목자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놀라 무서워했습니다. 천사들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10-12절) 천사들이 말을 마치자 하늘 군대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14절) 사방이 조용해졌을 때 목자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어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합시다.” (15절) 목자들은 서둘러 그 밤에 베들레헴으로 달려갔고, 거기서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았습니다. 목자들이 이 아기에 대하여 들은 것을 말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이 목자들의 이야기 속에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에는 성탄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사람들이 목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목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예수님 당시에 목자의 사회적인 지위는 어떠했는지 잘 모릅니다. 한마디로 목자는 매우 낮은 신분이었습니다. 작년 ReNEW에 세미나 강사로 왔던 김동문 선교사의 글에 의하면 그 당시에 목자는 ‘극한 직업 (extreme job)’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목자는 아주 천한 직업이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1979, 독일)의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 (Jerusalem in the Times of Jesus)>에 의하면, 당시 목자는 낙타몰이꾼, 당나귀몰이꾼, 마부, 뱃사공, 의사, 푸줏간 주인 등과 함께 천직으로 취급받았다. 베들레헴 지역의 양떼들은, 대개, 예루살렘의 권력자들, 부자들의 것이었다. 양떼의 주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양떼를 지켜야 하는 목자들의 삶은 다분히 독립적이었다. 그리고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야 하는 거친 직업이었다. 광야의 맹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양떼를 지켜야 하고, 양을 훔치는 도둑들로부터 양을 지켜야 하는 목자의 직업은 낮과 밤, 뜬 눈으로 지내야 하는 험한 직업이었다. 이런 평판 때문에 목자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설 수 없는 쓸모 없는 존재들이었고, 목자의 사회적 신분은 '죄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들었던 증인으로 목자들을 내세운 것은 하나님의 충격적인 인물 캐스팅이었다.”

재미있는 글입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는 목자라는 직업이 나쁜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목자였고, 이삭도, 야곱도 목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훈련시키기 위하여 미디언 광야로 보내 40년간 목자로 살게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님 당시에는 가업(家業)으로 양을 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이 목자를 고용해서 양을 치는 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자는 남을 속인다, 남의 것을 훔친다, 거짓말을 잘한다는 식의 사회적인 편견이 생겨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목자의 사회적인 신분은 ‘죄인’이었습니다.  재판장에서 증인으로 설 수 없을 만큼 신용이 없는 사람들로 취급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목자들에게 구세주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둘째로, 목자들이 들은 성탄 메시지는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준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1969-현재)가 부른 ‘Jesus Born On This Day(오늘 예수께서 나셨네)’가 생각납니다. 이 노래는 머라이어 캐리가 어린이 합창단과 같이 부른 아름다운 성탄 노래입니다. 

(1절) Today a child is born on earth/(Today a child is born on earth)/Today the glory of God shines everywhere/For all the world (오늘 세상에 한 아기가 나셨어요/오늘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비쳐요./온 세상을 위해)

(합창) 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our light and salvation/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the King of all nations (오, 예수님이 오늘 나셨어요./그는 우리의 빛이시고 구원이예요/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그는 모든 민족들의 왕이예요)

(2절) Behold the lamb of God has come/(Behold the lamb of God has come)/Behold the Savior is born/Sing of His love to everyone (보세요. 하나님의 어린양이 오셨어요/보세요. 구세주가 나셨어요/모든 사람을 위한 그의 사랑을 노래해요)

(합창) Oh Jesus born on this day/Heavenly child in a manger/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our Lord and Savior (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구유에 누인 하늘의 아기/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그는 우리의 주님이시고 구세주예요)

(3절) Today our hearts rejoice in Him/(Today our hearts rejoice in Him)/Today the light of His birth/Fills us with hope/And brings peace on Earth (오늘 그를 기뻐해요/오늘 그의 탄생의 빛이/희망으로 우리를 채워요/그리고 세상에 평화를 주네요)

(합창) 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our light and salvation/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the King of all nations (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그는 우리의 빛이고 구원이예요/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그는 모든 민족들의 왕이예요)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사람들에게 ‘good news that will bring great joy to all people’입니다. 이 성탄 소식은 누구나 다 듣고 기뻐해야 하는 소식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성탄절을 축하하고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Let the Christmas catch you in a good mood!” 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May the magic of Christmas fill your heart all year long!”이란 말도 있고, “As for me, I like to take my Christmas a little at a time, all through the year.” “With joy-filled hearts, let’s continue the Christmas celebration all season long.” 어느 누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은 큰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팬데믹으로 고생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크리스마스는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들의 우울한 마음을 단번에 날려 줄 기쁜 소식입니다.

셋째로, 천사들의 메시지에 이어 하늘의 군대 (the armies of heaven)의 합창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Glory to God in highest heaven, and peace on earth to those with whom God is pleased).” (14절) 이 말씀에서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그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실까요? 구세주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소식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FKCC 교우들이, 그리고 지금 팬데믹으로 고생하는 온 세상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평화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성탄의 소식을 들은 목자들이 그 시간에 베들레헴으로 달려갔다는 말씀이 우리 마음에 큰 감동을 줍니다. 목자는 사회에서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고, 재판장에 증인으로 설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목자들이 자기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목자들은 그런 것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현장을 떠나면 양들은 누가 지킬까 하는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목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서 베들레헴 마을에 가서 천사들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목자들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All who heard the shepherds' story were astonished).” (18절) 'astonished'라는 말은 단순히 놀랐다는 의미가 아니라 번개를 맞아 충격을 받은 것처럼 놀랐다는 뜻입니다. 구세주가 탄생하셨다는 소식 앞에서 목자들에 대한 어떤 불신도, 편견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목자들에게서 나는 양 냄새에 코를 막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목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시선은 오직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메시지입니다. 이 성탄의 메시지를 듣는 우리에게도 모든 편견과 불신들이 해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메시지입니다. 


12/13/2020 | 대강절 셋째 주일/In Times Of Trouble 36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말하라 Go, Tell The People What You Have Heard And Seen

마태복음 11:1-11

오늘은 대강절 셋째 주일입니다. 희망의 촛불과 평화의 촛불에 이어 오늘은 기쁨의 촛불을 켰습니다. 희망이 없고, 평화가 없고, 기쁨을 없던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심으로 말미암아 희망과 평화와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사랑의 촛불을 켭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은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우리는 진실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형제를 위하여 우리 생명을 내어 줌이 마땅합니다 (We know what real love is because Jesus gave up his life for us. So we also ought to give up our lives for our brothers and sisters).” (요한일서 3:16)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예수님 때문에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참 사랑을 안 사람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위한 삶으로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지시하기를 마치시고, 여러 마을에서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 그 곳을 떠나셨을 때의 일입니다 (1절)”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마치 생생하게 그 때 상황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지시(指示)’라는 말씀이 예수님께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번역성경들을 보면 ‘지시’ ‘명령’ ‘분부’라고 나와 있습니다. 모두 위 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무슨 일을 시키는 강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말들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Jesus had finished giving these instructions to his twelve disciples”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할 때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고, 이런 일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제자들을 교육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그러나 너희는 ‘선생’이라는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선생님은 오직 한 분이고, 너희 모두는 형제들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 누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인데, 하늘에 계시다. 너희는 ‘지도자’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지도자는 오직 한 분뿐인 그리스도시다.” (마태복음 23:8-10) 세상 사람들은 ‘선생’이라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고, 아버지라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고, 지도자라는 말을 듣기를 좋아하지만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선생이라고 불릴 수 있는 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불릴 사람도 없고, 지도자라고 불릴 사람들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같은 동일선상(同一線上)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시다. 그분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ou must have the same attitude that Christ Jesus had. Though he was God, he did not think of equality with God as something to cling to. Instead, he gave up his divine privileges; he took the humble position of a slave and was born as a human being.” 제가 처음으로 NLT 성경을 읽고 놀랐던 것이 ‘as something to cling to (뭔가 거기에 집착할 것으로)’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난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는 교만한 말이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시를 받고, 모욕을 받을 때도 “난 하나님의 아들인데, 감히 나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예수님에게서 이런 ‘겸손’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마을에서 가르치고 전도하신 그 시간에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께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정말 예수님이 메시아(그리스도)인지 알아 오라고 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오신다고 했던 분이 바로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가서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께서 “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6절)”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 잘못된 해석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의심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서 그렇게 물어보라고 한 것은 확인을 위한 것입니다. 요한에게 확인이 필요했던 이유는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이 그려왔던 메시아 상과 너무 달랐습니다. 요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용사의 모습으로 오실 메시아를 꿈꿔왔는데, 막상 예수님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심정적으로는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겠는데, 예수님의 모습은 그 시대가 기다렸던 메시아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확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말하여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고, 문둥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보았고, 우리 귀로 들었습니다)” 라고 너희가 보고 들은 대로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회복(restoration’입니다. 원래 자리로 돌려 놓는 것입니다. ‘희년(禧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희년’은 50년째 되는 해마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제도입니다. 종은 자유인으로 돌아가고, 땅은 본래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은 자유를 얻습니다. 그래서 이 ‘희년’을 ‘Jubilee (기쁨의 해)’라고 불렀습니다. 누가복음 4:19에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to proclaim the year of the Lord’s favor, NIV)” 이런 말씀이 나오는데요. 이 말씀에 나오는 ‘주의 은혜의 해’가 곧 ‘희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희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21)”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설교들 듣고 나사렛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의 말씀의 권위에 한 번 놀랐고, 그의 설교의 내용에 두 번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희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게 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었습니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잘못된 삶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의 삶이 회복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의 참 기쁨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앞을 못 보던 사람이 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는데,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전에는 보지 못하는 사람을 소경, 맹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봉사라고도 불렀습니다. 심청이의 아버지 이름이 심봉사 아닙니까? 판소리 심청전의 클라이맥스는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입니다. 한번 들어 보세요. “심황후 거동 보아라. 이 말이 지듯 말 듯 산호주렴을 거들 처 버리고 버선 발로 우루루루루 부친의 목을 안고 아이고 아버지, 심봉사 깜짝 놀라 아버지라니 누구요. 아이고, 나는 아들도 없고 딸도 없소. 무남독녀 외딸 하나 물에 빠져 죽은 지가 우금 삼년인디, 이것이 웬 말이오. 아이고,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 인당수 풍낭 중에 빠져 죽던 청이가, 살아서 여기 왔소. 어서 어서 눈을 떠서 소녀를 보옵소서. 심봉사가 이 말을 듣더니 어쩔 줄을 모르난디, 에이 내 딸이라니. 아니 내 딸이라니. 내가 죽어 수궁천지를 들어 왔는냐. 내가 지금 꿈을 꾸느냐. 이것 참말이냐. 죽고 없는 내 딸 심청, 여기가 어디라고 살아오다니 웬 말 인고. 내 딸이면 어디 보자. 아이고, 내가 눈이 있어야 내 딸을 보제. 아이고 갑갑하여라. 어디 내 딸이면 좀 보자. 눈을 끔적 끔적끔적 끔적끔적 끔적끔적 끔적끔적 끔적끔적 끔적허더니 만은, 그저 두 눈을 번쩍 딱 떴던가 보더라. 옳지 인제 알것구나. 내가 분명 알것구나. 내가 눈이 어두워서 내 딸을 보지 못했으나 갑자사월 초파일날 꿈속에 보던 얼굴 분명헌 내 딸이라. 죽은 딸을 다시 보니 인도 환생을 허여는가? 내가 지금 꿈을 꾸느냐?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꿈과 생시 분별을 못허것네. 어제까지만 해도 맹인이 되여 지팽이를 집고 다니면 어데로 갈 줄 아느랴. 올 줄을 아느랴. 오늘부터는 새 세상이 되었으니, 지팽이 너도 고생 많이 허였구나. 너갈데로 잘 가거라. 피루루루 내던지고, 얼시구나, 절시구나, 좋구나, 지화자 자자자 좋을시고.”

심봉사가 눈을 떠서 사랑하는 딸의 얼굴을 본 것이 이렇게 기쁜데요.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전에는 봐야 할 것을 못 보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하여 알았습니까?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알았습니까? 인생의 참 목적과 의미를 알았습니까? 사명을 알았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비로소 이런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회복의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기쁨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삶에 희망이 생기고,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예수님 때문에 기쁨을 알게 되고,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기쁨과 감사를 잊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데비 분 (Debby Boone, 1956-현재)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데비 분은 ‘You Light Up My Life (내 삶을 밝혀 준 당신)’라는 노래로 유명한 가수입니다. 이 노래로 빌보드 차트에 10주 동안 #1 자리를 지켰습니다. 400만 장이 넘는 앨범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1978년에 Grammy Awards ‘The Best New Artist’ 상을 받았습니다.

So many nights I'd sit by my window (수많은 밤을 창가에서 기다렸어요)

Waiting for someone to sing me his song (그의 노래를 불러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So many dreams I kept deep inside me (내 안 깊은 곳에 두었던 수많은 꿈이 있었죠)

Alone in the dark but now you've come along (홀로 어둠 속이었지만 이제 당신이 내게 왔어요) 

And you light up my life (그리고 내 삶을 밝혀주었어요)

You give me hope to carry on (나에게 간직할 희망을 주었죠)

You light up my days and fill my nights with song (당신은 나의 낮을 밝혀주고, 나의 밤을 노래로 채워주었어요)

매우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가사입니다. 데비 분은 지금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데, 지금도 현역 가수로 활발하게 공연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Episcopal Church의 목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데비 분의 삶에 불을 켜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이 되도록 예수님께서 불을 밝혀 주시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요한의 삶을 높게 평가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요한을 그렇게 칭찬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요한이 철저하게 예수님을 높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해바라기 꽃이 태양을 따라 돌 듯이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분수를 잘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하고요. 그 때 요한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He came right out and said, ‘I am not the Messiah.’” (요한복음 1:20, 3:28) 그는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가치 있고, 아름다워지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무엇을 많이 소유해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높은 지위에 앉게 되어서도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의 삶은 가치 있고, 아름다워지고,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예수 그리스도는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분인지, 그를 알고 난 후에 내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우리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다음 세대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팬데믹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희망과 평화와 기쁨과 사랑의 대강절 촛불이 환하게 켜졌으면 좋겠습니다.


12/6/2020 | 대강절 둘째 주일/In Times Of Trouble 35

새 날이 온다 New Days Are Coming

이사야 9:1-7

오늘은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대강절 촛불 2개를 켰습니다. 전주에는 희망의 촛불을 켰고, 오늘은 평화의 촛불을 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희망이 생겼고, 평화가 주어졌습니다.

구약성경은 말라기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탄생하심으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약속의 시대가 열립니다. 그런데요. 구약 마지막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약 400년의 기간이 있습니다. 이 기간을 ‘신구약 중간시대(Intertestamental Period)’라고 합니다. 두 약속의 중간 시대라는 뜻입니다. 이 중간 시대는 영적인 암흑기(暗黑期)였습니다. 이 때에는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아모스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이 땅을 주리게 할 것이다. 주 여호와의 말이다. 빵이 없어서 배고픈 것이 아니며, 물이 없어서 목마른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서 배고플 것이다. 그 날에 아름다운 여자들 젊은 남자들이 목이 말라 지칠 것이다.” (아모스 8:11, 13) 물론 이 말씀은 아모스가 북왕국이 멸망하기 전에 한 말이니까 중간기하고는 약 350년의 시대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서 하신 이 말씀은 신구약 중간기에 살던 사람들의 영적인 상황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우리는 흔한 것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잘 모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도 늘 남편이 잘해 주면 아내는 고마움을 모릅니다.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고마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는 상황을 만나보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잘 모릅니다.

신구약중간 시대가 그랬습니다. 예언자의 소리가 그치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영적으로 고갈되었습니다. 지금 팬데믹으로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기 영혼이 황폐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 절대로 소홀하게 여기면 안 되고요. 개인 기도에 힘써야 하고요. 성경읽기에도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영적인 침체(a spiritual depression)’가 찾아오면 우리 삶에 어떤 힘든 일들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희랍어에 시간을 나타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χρόνος, cronos)’라는 말인데요. 특별한 의미가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καιρός, Kairos)’라는 말입니다. ‘카이로스’는 어떤 결정적인 기회의 타이밍 (the right, critical or opportune timing)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때가 차매 (4:4)’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when the fulness of the time came(꽉 찬 시간이 되었을 때)’ 이런 뜻이거든요? 바로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가리키는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모든 사람들이 영적으로 침체되어 지쳐 있을 때, 그 때가 하나님의 ‘카이로스’였습니다. 이 때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가뭄의 단비처럼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었고, 달래 주었고, 채워주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Amazement gripped the audience, and they began to discuss what had happened. ‘What sort of new teaching is this? It has such authority! Even evil spirits obey his orders!’” (마가복음 1:27)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런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를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의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옮기시고, 거기서 사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언자 이사야의 말이 이루어졌습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호수로 가는 길목, 요단 강 건너편, 이방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 이 곳 어둠에 사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늘과 같은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취었다.’” (마태복음 4:13-16)마태는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환호하는 것을 보면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사역의 본부로 삼으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차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사회적으로 약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사회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marginal people(주변 인간들)’이 큰 희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전 어둠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새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고통의 땅에 그늘이 걷힐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지역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어둠 속에 살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짙은 그늘의 땅에 살던 백성에게 환한 빛이 비췰 것이다.” (이사야 9:1-2)

이사야 선지자는 이 모든 일이 ‘한 아기(a child)’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기원전 745-695년까지 약 50년간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의 예언 속에 이런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All right then, the Lord himself will give you the sign. Look! The virgin① will conceive a child! She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which means ‘God is with us’).” (이사야 7:14)/①Or young woman 이 말씀을 잘 보면, ‘virgin(동정녀)’이란 단어에 ‘young woman(젊은 여자)’이라는 주(footnote)가 붙어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은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알마(almah)’로 되어 있는 것을 70인 역에서 희랍어로 번역할 때 ‘파르테노스(Parthenos, 동정녀)’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virgin’이라는 말에 ‘young woman’이라는 주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걸림돌로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동정녀 탄생이라니? 말도 안 돼!”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동정녀’라는 말을 꼭 ‘virgin’으로 번역하지 않고 ‘young woman’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젊은 여자의 몸에서 내어 나셨다” 이렇게 생각하면 별 문제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분,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성경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런 잘못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인 ‘인카네이션(incarnation)’의 교리,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한복음 1:14)”는 말씀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대속(代贖)의 교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교회는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이 교리를 지켜오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읽어보면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태어나느냐 하는 말씀인데요. “The children of God are born not of natural descent, nor of human decision or a husband's will, but born of God(이는 혈통으로도 아니고, 인간의 결정으로도 아니고, 남편의 의지에 의해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다).” (요한복음 1:13)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태어나듯이 예수님의 탄생도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태어나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다윗의 가문을 선택하신 것뿐입니다. 인간의 결정에 따라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사도신경의 의미입니다.

지난 주간에 C. S. Lewis(1989-1963, 영국)의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루이스는 그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the Savior)’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둑에 서 있는 한 사람이 그에게 손을 내 밀어주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그의 손을 잡기를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한 발은 땅에 딛고 있으면서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논리를 가지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루이스의 이 말이 참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발이 모두 물에 빠져 있는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 한 분만이 물에 빠진 우리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장차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아기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7:14). 또 이사야 9:6에는 그 아기의 이름이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 천사가 요셉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의 아내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낼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주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예언하신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보라!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마태복음 1:21-23)

모든 말씀들이 한 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상은 영원히 평화가 이어지는 세상이라고요. 그는 절망에 빠진 세상에 희망을 주러 오신 분이라고요.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런 꿈을 가지고 메시아가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그 때, 그녀가 와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이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She talked about the child to everyone who had been waiting expectantly for the redemption of Jerusalem).” (누가복음 2:38)

2,000년 전에 살았던 그 소수의 사람들은 신구약 중간기의 절망적인 시간 속에서도 메시아 시대에 대한 기대와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꿈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어둠의 땅이 희망의 땅으로 바뀌고, 절망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새 날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우리 나라가 그런 나라입니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 항구에 첫 발을 내디딘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1858-1902, 미국)의 기도문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 맨 결박을 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십시오(We came here on Easter. May he who on that day burst asunder the bars of death, break the bands that bind this people, and bring them to the light and liberty of God's children).” 또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미국) 선교사는 이런 기도문을 남겼다고 합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어떻습니까? 주변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와 꿈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믿음생활은 오로지 자기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이기적인 도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교회는 복음 전파에 대한 꿈과 열정을 잃어버리면서 세상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대강절에 희망과 평화의 촛불이 켜진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다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과 기대를 지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이런 꿈과 열정의 회복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힘든 시간들까지 이기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1/29/2020 | In Times Of Trouble 34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 Give Thanks Always And For All Things

에베소서 5:15-20

오늘 다시 한번 감사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일년에 한번 추수감사주일을 지내고 그 후에는 감사를 잊어버리고 사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살자는 취지로 한번 더 감사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나오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감사는 항상 해야 하는 것입니다. “Give thanks always and for all things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상황이 좋을 때나 상황이 나쁠 때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이 말씀이 이해가 잘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마음먹고 계획한대로 되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감사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통치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 속에 있다는 것은 지금 당장에는 그 이유를 잘 모를 수 있지만,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선한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나의 삶을 보고 해석하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Be joyful always; pray continually;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데살로니카전서 5:16-18) 욥 같은 사람은 어떤가요? 그는 왜 자기에게 이런 고난이 주어지는지 이유를 몰랐습니다. 자기는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고난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의 의를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따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야 이 사실을 깨닫습니다. 욥이 깨달은 것은 비록 지금은 내가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지만,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욥기가 42장까지 있는데요. 욥은 욥기가 끝나가는 40장에 가서야 이 사실을 깨닫습니다.

어쩌면 오늘 여러분 중에도 욥과 같이 “내가 왜 이런 어려움을 겪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시간부터 나의 삶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속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 속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다스리십니다. 바울은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갈라디아서 2:20)”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십니까? “My thoughts are nothing like your thoughts, and my ways are far beyond anything you could imagine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나의 길은 너희들이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이다).” (이사야 55:8) 우리가 크리스천이 된 후 왜 나의 삶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나의 삶 속에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에베소서 5장 본문 말씀을 보실까요? 바울은 여기서 크리스천의 삶에서 중요한 여섯 가지 가치 (values)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의 삶을 잘 살펴서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합니다 (15절). 둘째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합니다 (16절). 셋째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합니다 (17절). 넷째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라고 합니다 (18절). 다섯째로,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라고 (Make music to the Lord in your heart) (19절)합니다. 마지막으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일에 감사하라 (Give thanks always and for all things to God)”고 합니다 (20절).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크리스천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중요하니까 이런 것들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다른 것들을 얻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 (the aroma of Christ)’가 나지 않고 ‘세상적인 냄새 (the aroma of the world)’가 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된 후에 크리스천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가치가 있는지 배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그 자리를 세상적인 가치들이 들어와 채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말하는 여섯 가지 가치 중에서 어느 것이 “아, 그렇구나!” 하고 마음에 들어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모두 중요하지만요. 저는 세 번째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말씀과 여섯 번째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약 성경 27권 중에 바울이 쓴 편지가 13권입니다. 이 13권은 한 개인이 교회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고 믿기 때문에 성경으로 인정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생의 말년에 쓴 편지들은 로마의 감옥에서 쓴 것들입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렇게 네 권의 성경입니다. 우리는 이 네 권의 성경을 ‘옥중서신 (The Prison Epistles)’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 때 바울이 무슨 이유로 감옥에 갇혔는지 아십니까?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들을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그를 유대인들이 고소했습니다. 고소의 이유는 바울은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 (a ringleader of the sect of the Nazarenes)’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가는 곳마다 이단 사상을 퍼뜨리고 유대인 사회에 분란을 조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4:5). 바울은 자기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니까 총독이나 왕에게 재판을 받지 않고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마칠 때까지 로마의 감옥에 있게 된 것입니다. 한번 바울이 당한 것과 같은 일을 여러분이 당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복음을 전파하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허무한 생각이 들겠습니까? 과연 그가 쓴 네 권의 옥중서신에 무슨 내용이 씌어 있을까요?

옥중서신을 읽어보면 바울이 자신을 ‘Paul, a prisoner of Jesus Christ (바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갇힌 사람)’라고 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 1:1, 에베소서 3:1, 또 골로새서 4:3이나 빌립보서 1:13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이 나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한 번도 자신을 ‘죄수 (a prisoner)’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항상 자신을 ‘a prisoner of Jesus Christ’라고 생각했습니다. 직접 그가 쓴 편지 구절을 읽어 보시겠습니까? “나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여러분을 위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For this reason I, Paul, am the prisoner of Christ Jesus for you Gentiles.” (에베소서 3:1)

유명한 주석가 (commentator) 중에 매튜 헨리 (Matthew Henry, 1662-1714, 영국)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Even though Paul is in Roman captivity he refuses to think as a captive of men but applies it as a prisoner of Jesus Christ. Whence our grace comes- from our being apprehended of Christ Jesus. It is not our laying hold of Christ first, but his laying hold of us, which is our happiness and salvation. Paul literally states he is a captive of Jesus Christ. According to Paul, being a Christian saved by God has entered one into being captive. This captivity is comprised of and has led to grace, happiness, and salvation. Paul shows that even in the midst of a dark situation, through faith in the grace of God, it is possible to attain victory.”

어떻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는지 이 말씀에서 영감 (inspiration)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승리자로 만들었습니다. 그에게는 감옥 안에 있든지, 감옥 밖에 있든지 상관이 없었습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의 옥중서신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굉장합니다. 보세요. “Pray for us, too, that God will give us many opportunities to speak about his mysterious plan concerning Christ. That is why I am here in chains. Pray that I will proclaim this message as clearly as I should.” (골로새서 4:3-4)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힌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Give thanks always and for all things God the Father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십시오).” (골로새서 5:20) 왜 그는 이렇게 감사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있을까요? 그의 옥중서신을 읽어보면 왜 그가 감사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는지 세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감사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데살로니카전서 5:17-18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을 주의해서 보면 모두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Be joyful always (항상 기뻐하라)!” “Pray continually (쉬지 말고 기도하라)!”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라)!” 바울은 분명하게 세 가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말은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 올바른 삶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명령은 옵션이 아닙니다. 명령은 반드시 해야 하는 requirement (필수사항)입니다. 학생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잘 압니다. 학생들이 수업을 들을 때 선택과목이 있습니다. 선택과목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골라서 들으면 됩니다. 그런데,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필수과목이 있습니다. 그런 과목들을 ‘requirements’라고 합니다. 반드시 이 과목의 수업들을 듣고 학점을 따야 졸업을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에게 감사는 다른 두 가지, 기쁨과 기도와 함께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과목입니다.

둘째로, 감사는 하나님과의 소통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4:6-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Then you will experience God's peace, which exceeds anything we can understand. His peace will guard your hearts and minds as you live in Christ Jesus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 대신 모든 것을 위해서 기도하라.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말씀드리라. 그리고 그가 해 주신 모든 일을 생각하고 감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할 것이다. 그 하나님의 평화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가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줄 것이다).”

이 말씀 속에 ‘능력 있는 기도’와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이 나와 있습니다.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for you (그가 너를 위해서 하신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 말씀이 기도생활의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신 일에는 좋은 일도 있지만 궂은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궂은 일도 모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는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기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배도 그렇고, 찬양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고 찬양이 됩니다.

셋째로, 우리는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치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있으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가난을 이겨 낼 줄도 알고, 부유함을 누릴 줄도 압니다. 배부를 때나 배고플 때나, 넉넉할 때나 궁핍할 때나, 어떤 형편에 처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빌립보서 4:11-12) ‘감사하는 법’이라는 말이 개역성경에는 ‘만족하는 법 (how to be content with whatever I have)’이라는 말로 나와있습니다. 만족한다는 말은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Meister Eckhart (1260-1328, 독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자이며, 철학자이며, 신비주의자 (mystic)로 불리는 다양한 필드에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If the only prayer you ever say in your entire life is thank you, it will be enough (당신의 전 생애에 드린 유일한 기도가 ‘감사합니다’라면 이것으로 충분하다).” “감사합니다” 이 한 마디의 기도가 충분한 이유는 이 기도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humble’한 사람입니다. 물이 낮은 곳을 찾아 그곳에 고이듯이, 이런 사람은 항상 자기를 낮은 위치에 갔다 놓습니다.

이제 감사절은 지났습니다. 하지만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3:15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볼까요? “그러므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우리의 입술의 열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