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편

1 행복한 사람은 나쁜 사람들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죄인들이 가는 길에 함께 서지 않으며,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2 그들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깊이 생각합니다.
3 그들은 마치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새가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입니다.
4 나쁜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바람에 쉽게 날아가는 겨와 같습니다.
5 그러므로 나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을 견뎌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죄인들은 착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6 착한 사람들이 가는 길은 여호와께서 보살펴 주시지만, 악한 사람들이 가는 길은 결국 망할 것입니다.

1 Oh, the joys of those who do not follow the advice of the wicked, or stand around with sinners, or join in with mockers.
2 But they delight in the law of the LORD, meditating on it day and night.
3 They are like trees planted along the riverbank, bearing fruit each season. Their leaves never wither, and they prosper in all they do.
4 But not the wicked! They are like worthless chaff, scattered by the wind.
5 They will be condemned at the time of judgment. Sinners will have no place among the godly.
6 For the LORD watches over the path of the godly, but the path of the wicked leads to destruction.

요즘엔 사방 어디를 보든지 가을이 완연합니다. 나뭇잎들이 예쁘게 물들었습니다. 하도 색깔이 예뻐서 사진을 찍어 제 facebook에 올렸더니, 캘리포니아에서 목회하는 후배 목사가 댓글을 달았습니다. “목사님 가을을 보여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꿈과 같은 사진들입니다.” 우리는 사방 어디를 보나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끼고 있는데, 캘리포니아만 해도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가 없습니다. 날이 좋으면 MIT 다리에서 다운타운 쪽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좀 찍어야 하겠습니다. 학생들은 날마다 책 읽어야 하고, 과제를 해야 하고, 시험 준비를 해야 하겠지만, 잠시라도 시간을 내서 아름다운 뉴잉글랜드의 가을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한번은 아침 일찍 일어나신 예수님께서 몹시 시장하셨습니다.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있어서 열매를 하나 딱 먹으려고 가 봤더니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다시는 아무도 네 열매를 먹지 못할 것이다!” (마가복음 11:14) 그러자 즉시 이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작다면 작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고, 별 것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 무화과나무 사건 바로 뒤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너희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분노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같은 말씀에 이런 말씀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이것을 다시 세우겠다.” (요한복음 2:19)

별 것 아닌 것 같은 무화과나무 사건이 성전 구실을 못하는 성전을 허물어 버리고 다시 짓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연결되어 엄청난 의미를 갖게 됩니다. 나무나, 성전이나, 사람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사느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인생을 사느냐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편 1편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을 쓴 사람이 다윗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성서학자들은 이 시편 1편을 다윗이 쓴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의 연구를 통해서 그렇게 주장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1편을 누가 썼는지 모르니까 그냥 저자를 ‘psalmist (사미스트)’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편 1편의 사미스트는 두가지 길을 시의 형식을 빌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죄인들이 가는 길 (the path of the wicked, 1, 2절)’이고, 다른 하나는 ‘착한 사람들이 가는 길 (the path of the godly, 6절)’입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에게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면서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생명과 복, 죽음과 멸망의 길을 내 놓았습니다. 부디 여호와를 사랑하십시오.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살고 번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따르지 않고 다른 신들에게 섬기면,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여러분은 망할 것입니다.” (신명기 30:15-20) 참 이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신 일을 모두 목격(目擊)했습니다. 그 모세가 마지막 고별 인사를 하면서 자기 백성들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백성들 앞에서 설교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명과 복의 길을 외면하고 죽음과 멸망의 길을 선택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문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가는 문은 넓고 그 길이 쉬워, 많은 사람들이 그 곳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생명으로 가는 문은 작고 그 길이 매우 좁아, 그 곳을 찾는 사람이 적다.” (마태복음 7:13-14)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문은 큰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거절하고, 멸망으로 가는 넓은 문을 선택합니다.

모세도, 예수님도, 시편 1편을 쓴 사미스트도 우리 앞에 두 길을 보여줍니다. 어느 길을 갈 것인지 결정하라고 합니다. “생명과 복의 길을 갈 것이냐? 아니면 멸망의 길을 갈 것이냐?” “좁은 문으로 들어 갈 것이냐? 넓은 문으로 들어갈 것이냐?” “경건한 사람들이 걷는 길을 걸을 것이냐? 죄인들이 걷는 길을 걸을 것이냐?” 하고 묻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미스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꼬임을 따르고 (following the advice of the wicked, 1절)’ ‘죄인들이 다니는 길에 서 있고 (standing around with sinners, 1절)’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는 (joining in with mockers, 1절)’ 사람들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말은 진짜 같습니다. 그들의 말은 진짜처럼 위장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님이 늘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진광불휘(眞光不輝)’라는 사자성어입니다. 참된 것은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것은 빛이 납니다. 화려합니다. 그 화려한 빛에 모두 속아 넘어갑니다. 죄인들은 밝은 곳으로 다니지 않고 어둠 속으로 다닙니다. 죄인들이 다니는 길에 서 있다는 말은 죄인들이 하는 일에 관계하고 끼어든다는 말입니다. ‘빈정댄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다른 사람의 흉을 보고 험담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 죄성(罪性, sinful nature)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멸망의 길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가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죄인의 길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 때문입니다.

사미스트는 죄인의 길을 걷는 삶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그들은 마치 바람에 쉽게 날아가는 겨와 같습니다 (They are like worthless chaff, scattered by the wind).” ‘chaff’는 곡식의 껍질을 말합니다. 우리 말로 ‘겨’라고 합니다. 우리 말로 ‘키질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곡식을 키 (winnow) 넣고 키질을 하면 무거운 곡식은 남고 가벼운 겨는 날아갑니다. “바람에 날아가는 겨와 같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죄인의 길을 따르는 결과는 허무합니다.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겨처럼 다 날아가 버립니다.

오늘 시편 말씀을 계속 읽어 보십시오. 이제 사미스트는 경건한 사람들이 걷는 길을 따라 사는 삶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사미스트는 이런 사람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대신 하나님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But they delight in the law of the LORD, meditating on it day and night”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설교자인 제 눈에는 ‘delight’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기뻐하다’ ‘즐거워하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중에 장로교 출신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어른들은 교파를 많이 따졌었는데, 요즘 청년들은 교파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참 잘된 일 같습니다. 장로교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 (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교리를 문답식으로 만들어 놓은 책입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질문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The chief purpose for which man is made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입니다.

시편 1편에서 사미스트가 말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말입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사미스트는 “Those who delight in the law of the LORD, meditating on it day and night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밤낮으로 깊이 묵상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즐거우니까 밤낮으로 묵상을 해도 싫지 않습니다. 지겹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 성경을 읽다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For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라는 말씀을 본 적이 있습니까? 구약 느헤미야 8:10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을 해도 즐거운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에게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은 인생의 행복을 어떤 환경이나 물질과 연결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행복을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그 뜻을 생각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목적은, 그 말씀의 뜻을 깨닫고, 그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미스트는 다시 경건한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마치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새가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입니다.” (3절) “They are like trees planted by streams of water, bearing fruit each season. Their leaves never wither, and they prosper in all they do.”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니, 이 나무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마셔도 마셔도 물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냥 ‘water’라고 하지 않고 ‘streams of water’라고 했잖아요? 우리 말로 번역하면 ‘물줄기’입니다. 그냥 물 옆에 심긴 것이 아니라 물줄기가 흐르는 마르지 않는 강 옆에 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물이 부족합니다. 강이라고 해야 요단강 하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지역에는 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마르지 않는 강가에 심긴 것입니다. 강가에 심긴 나무가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 지금 사미스트가 말하고 있는 것이 ‘강가에 심긴 나무’에 대한 말씀같이 보이지만, 정말 사미스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사람이 강가에 심긴 나무 같은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미스트는 죄인의 길을 따르지 않고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사람들이 바로 강가에 심긴 나무 같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7:37-38 말씀입니다. “축제가 절정에 달한 명절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대로,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다.’” “Whoever believes in me, as the Scripture has said, streams of living water will flow from within him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서 말한 것처럼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될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장소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성전 뜰이었습니다 (요한복음 7:28). 성전 뜰에서 초막절을 지키려고 온 사람들을 향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데도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내버려 두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성전은 유대교의 심장부입니다. 그 심장부에서 누구든지 목마른 사람은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 성전은 전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역할을 못하고 있으니 수명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교의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나를 믿는 사람들에게 내가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참 성경 말씀이 오묘하지 않습니까? 사미스트가 말하고자 했던 ‘물가에 심긴 나무’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They prosper in all they do (그들은 무슨 일이든지 하는 일들이 잘 될 것입니다).” (3절) “For the LORD watches over the path of the godly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의 길을 지켜 주십니다).” (6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미스트는 ‘의인들만 들어가는 모임 (the assembly of the righteous, 5절, NIV)’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 모임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죄인의 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이 모임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개역개정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Sinners will have no place among the godly).” 이 말씀을 읽다가 안타까운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의인들이 모이는 곳에 와서 어디 앉을 자리가 있을까 하고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이 사람이 앉을 자리는 없습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고, 작은 일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 차이가 별로 심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형통한 인생을 살게 되고, 의인들의 회중에 들어가게 되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결국은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