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7-24

 

17 ○ 밀레도에 닿자, 바울은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오도록 전갈을 보냈다. 18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도착하자, 바울이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아시아에 첫발을 들여놓은 그 날부터 오늘까지 여러분과 함께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19 나는 모든 겸손과 많은 눈물로 주님을 섬겨 일해 왔습니다. 유대인들이 나를 해치려고 음모를 꾸민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20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중 앞에서나 여러분의 가정에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왔습니다.
21
나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모두가 회개하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강조했습니다. 22 이제 나는 거역할 수 없는 성령의 강한 힘에 이끌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무슨 험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23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가는 도시마다 투옥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내게 알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4 그러나 주 예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일,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 일을 완수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유명한 배우 행크스를 아시지요? 지난 5 하버드 대학교 졸업식에 연설자로 선정되어 왔는데요. 하버드 총장 로렌스 바카우는 톰행크스가 타고난 공감능력과 깊은 이해심을 보여준 인물이기에 선정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연설을 시작하며 자신을 "하버드 졸업생, 교수진 또는 저명한 동문들과 관련이 있기 위해 일한 적도 없고, 수업에 시간을 보낸 적도 없고, 도서관에 번도 들어가지 않은 채로, 나는 그런 일을 사람으로 연기하며 살고 있다 소개하며 웃음을 자아냅니다. 그는 새로운 사명감으로 사회속에서 새출발하는데 있어서 진실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시대는 진실이 점점 위협받고 있고 앞으로 참여하게 사회의 전투는 끝이 없는 싸움이라고 강조하며 졸업생들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삶의 모든 날들에 있기를 축복하며 연설을 마쳤습니다.

 

행크스의 연설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생의 원리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세상이 잃어버린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현대사회는 19세기에 비해생산성이 천배 이상 높아졌다고 합니다. 과거와는 달리 개인이 직접 휴대전화로 컨텐츠들을 송출합니다. 개인이 기자(記者)도 되고 사장(社長)이 되기도 합니다. 개인방송으로도 세상과 소통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보의 홍수시대에 앎의 대한 욕구는 채우기가 매우 쉬워 졌지만 진실한 사람들의 삶은 갈수록 상실 되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성경의 가치를 앎에서 삶으로, 삶속에서 주의 말씀의 가르침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세상과 믿음 사이에서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지, 어떤 목표를 향해 가야 하는지 바울의 삶에서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사명자에게는 믿음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사명(使命)의 사전적인 의미는 맡겨진 의무입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순종하며 나아가는것이 사명입니다. 그래서 사명자는 언제든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운명을 미리 예측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고 구원을 믿음으로 갈망하며 입술로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에게 성령을 주시는데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우리안에 성령님을 확신할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용하는데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혼인 잔치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심부름 하는 하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특별한 일을 보았습니다. 말씀에 순종했을 때에 물이 변해서 포도주로 된 사건을 유일하게 본 사람들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는 한층 더 깊어지는 힘이 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밋밋한 인생이 말씀대로 순종할때 포도주로 변하는 향기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교만은 십자가에 부딪일때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산산조각이 납니다. 하나님의 확증된 사랑이 부어질때에 사명자에게는 필요한 것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의 과정을 이뤄갈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왜 힘든 것일까요? 타락한 자유의지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봄이 와야 얼음이 녹게 되듯이 진심으로 믿고 죄를 회개할때 은혜로 구원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 옆에 달린 강도는 십자가에서 그를 믿고 진실로 고백하여 죽음 직전에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의롭다는 위장된 주인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아무리 선한행위도 하나님의 거룩함에 비할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인생의 주도권을 맡길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사도행전 20장은 3차 전도여행의 경로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머물 수 없게 되자 2차 전도여행에서 개척한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기로 결정합니다.(1-3) 누가는 구체적인 도시 이름을 사도행전에서 거론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바울이 그만큼 분주하게 예루살렘으로 가야하는 일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서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웠던 마게도냐의 지역인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의 공동체를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굳게 설수 있도록 권면하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누가는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야 이르러라는 말씀으로 마게도냐에서의 3차 전도 여행의 사역을 짧게 요약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항구 도시인 겐그리아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을 거쳐 안디옥으로 가려던 2차 전도여행과 비슷한 일정을 계획했지만 유대인들이 자객을 보내서 바울을 해하려고 공모하고 있었습니다. 고고학자이며 신학자인 윌리엄 램지(William M. Ramsay :1851-1939)의 주석을 보면, 당시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절기를 맞아 수리아로 가는 배를 많이 이용하게 되었는데 바울이 이 배를 타게 탈 때에 바다에 던져 버리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를 해치려는 음모는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서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여 다시 육로를 통해 마게도냐 지역으로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수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바울은 드로아에서 7일간의 사역을 마치고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육로를 택하게 됩니다. 디모데와 일행들은 배를 타고 가지만 바울은 홀로 25마일 정도를 걸어서 밀레도에 도착합니다. 바울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을까요? (13) 바울은 이제 3차 전도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 밀레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는 3년 동안 사역했던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오라고 청했고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바울의 설교가 대부분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향한 설교였다면 밀레도에서의 설교는 서로 함께 주의 길을 걷는 사명자들에게 하는 설교입니다.

 

사명자에게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울의 설교에서 사명자의 간절한 겸손과 눈물의 길을 볼 수 있습니다. (19)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바울은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사명자들에게 눈물이 언제 납니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간절할때 눈물이 납니다. 성령께서 울게 하시니 울고, 부족한 죄인을 살려 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울지 않습니까? 눈물은 주님과 우리의 마음을 이어줍니다. 사명자는 아픔과 상처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몇주전 예배 마지막 찬양 찬송가 272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찬양을 부르는데 찬양의 가사에 우리의 삶이 있더라구요. 부르는 내내 눈물이 흘렀습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갑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빈궁한 삶이 부해지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갑니다슬픈자를 위로하게 하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는 그 구원의 기쁨이 우리의 삶에 찾아와야 합니다.

 

바울은 겸손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겸손으로 세워집니다.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보혈만큼 뜨거운 섬김은 없습니다. 사명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함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평생을 쓰임 받았던 테레사 수녀는 자신을 몽당연필이라 여겼습니다. 그녀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아무리 불완전한 도구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하나님은 창조의 손으로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는 닳고 싶지 않아합니다. 섬김에 있어서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많이 쓰인다고 해서 몽당 연필이 색을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진한 색을 내게 됩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만년필이라 해도 사람의 손에 들려지지 않으면 가장 초라한 도구가 되어질 뿐입니다. 때론 약하고 보잘 것 없어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임 받게 되면 그것이 가장 완벽한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각성마다 그에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3)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간계로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았습니다. 사명자의 길은 매순간 중단될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의지를 성령에 매여 걷도록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의 의지는 성령에 매여 있습니까? 도대체 성령에 매여 가고자 한 바울의 사명감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 온 이유를 잃어버린 양들을 구하기 위해서 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뜻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릴레이 경주는 일정 구간을 나누어 달리는 경기입니다. 먼저 뛴 사람은 배턴을 넘겨주고 같은 마음으로 다음 주자가 달려가는 길을 뜨겁게 응원합니다. 자신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전 주자가 전달하는 배턴을 꼭 받아서 뛰어야 합니다. 혼자 뛸수가 없는 경기이지요. 우리는 모두가 함께 뛰는 러닝 메이트입니다. 이제 가을과 겨울이 오면 여름의 뜨거움도 그 자리를 내어 줄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이치입니다. 주님의 사명은 그날에 약속의 소망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나고 나니까 눈이 열려집니다. 예수가 오셔서 역사의 중심, 인생의 중심에 있음을 깨닫는 눈이 열려진 것입니다. 구원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꿈이 생긴 것입니다. 세상은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할때에 그 가치가 올라가지만 바울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영광은 순식간에 빛을 잃는 것들이며 그의 표현을 빌리면 배설물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예수를 믿는 자들을박해하는 자로 살던 그가 사명에 눈을 뜬 것입니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진 것입니다. 이제 나는 거역할 수 없는 성령의 강한 힘에 이끌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거기서 무슨 험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23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가는 도시마다 투옥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내게 알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4 그러나 주 예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일,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 일을 완수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거룩한 삶에 초대되는 것 보다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요?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의 계절이 찾아오고, 매일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모든 세대가 그리스도의 꿈을 꾸는 일에 참여하는 일 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주님이 곁에 찾아 오셨음에도 저 멀리에서 지켜 보려고 했던 마음을 내려 놓고 결단합시다. 예수께 받은 사명은 고난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매인 바 되어 보호하시는 은혜에 이끌려 가는 일입니다. 바울이 십자가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않겠다고 하는 의지 가운데 생명의 빛이 그의 영혼을 강하게 비추고 있었던 것입니다.성령께서는 바울을 성령으로 인쳐 주시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참된 기쁨과 능력을 허락하신 것이지요.

 

스코틀랜드인으로 1924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중국 선교사로 사역했던 에릭 리델(Eric Liddell 1902-1945)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렸던 사람입니다. 에릭 리델(Eric Liddell)은 많은 영국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1924년 제8회 파리 올림픽에 출전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 종목인 100미터 경기 예선전이 주일로 확정되자 과감히 경기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주일은 주님을 위한 날이라는 확고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의 결정은 달리는 목적이 자신의 우승과 야망이 아닌, 분명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릭의 불참 소식이 영국 전역에 전해지자, 국민들은 그를 두고,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 ‘조국의 명예를 버린 자’, ‘광신주의자라며 일제히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왕세자까지 나서 리델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주님의 법 안에서, 주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켰습니다. 갖은 비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리델은 기적적으로 400m 경기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됐고, 금메달을 따고 세계신기록을 세웠습니다.

 

리델은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달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명자는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가상과 현실이 같아 보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참된 사명과 위장된 사명이 모호하고, 참된 겸손과 위장된 겸손도 온전히 구별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홍수가 나서 집에 엄청난 물이들이닥쳤는데 살기 위한 길을 위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늘나라를 경험한 사람은 진실로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모두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고난 속에서도 즐겁게 노래하고 찬송했습니다. 고난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거운 짐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고난의 길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눈물과 참된 겸손으로 맡겨주신 사명자로 부르실 뿐입니다. 성령은 그 길을 걷는 자를 보호해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생명의 영이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주도 호흡을 주시는 하나님의 생기 가운데 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