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7:33-38

33 ○ 먼동이 트기 시작하자, 바울은 모든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했다. “여러분은 긴장 속에서 마음을 졸이느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지가 열나흘이나 됩니다. 34 이제 음식을 좀 드시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기운을 차리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구도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35 이렇게 말하고, 바울은 빵을 들어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 떼어서 먹기 시작했다.36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용기를 내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37 때에 우리와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276명이었다. 38 모두 배가 부르게 음식을 먹고 나자, 선원들은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실었던 양식을 모두 바다에 던졌다. (쉬운말 성경)

33 Just as day was dawning, Paul urged everyone to eat. “You have been so worried that you haven’t touched food for two weeks,” he said. 34 “Please eat something now for your own good. For not a hair of your heads will perish.” 35 Then he took some bread, gave thanks to God before them all, and broke off a piece and ate it. 36 Then everyone was encouraged and began to eat— 37 all 276 of us who were on board. 38 After eating, the crew lightened the ship further by throwing the cargo of wheat overboard.(New Living Translation)

올해 5월부터 시작된 사도행전 강해가 다음주일이면 마치게 됩니다. 사도행전 27장의 말씀은 누가가 정밀화를 그리듯 로마로 가는 바울의 항해 여정을 세밀하게 그려 놓았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으로 부터 떠나온 청교도인들이 신대륙에 와서 드린 추수 감사 주일 유래를 생각나게 합니다27장 본문의 말씀을 추수감사 주일에 전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항해하는 배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평화롭고 잔잔한 바다를 만나기도 하지만 거대한 풍랑을 만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항해하시며 어떤 날을 보내고 계시는지요?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바울이 탄 배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타 있었습니다. 여러 죄수들, 바닷길에 대해서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주, 로마 군대 장교인 백부장 율리오와 군인들, 장사하기 위해서 물건을 갖고 탄 상인들입니다. 가이사랴에서 출발한 그들은 그레데섬 미항이라는 작은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바울은 금식하는 절기가 지났으니 더 이상의 항해를 만류하고 미항에서 겨울을 머물다가 출항하자고 했습니다. 유대력으로 속죄일이 710일이니까 오늘날로 910월경에 해당합니다. 당시 지중해는 9월 중순 이후에 항해하는 것이 위험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항해를 멈춰야 했는데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충고 보다는 바닷길의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주의 의견대로 무리한 출항을 하게 됩니다. 한 죄수의 말보다 선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겠지요. 결국 얼마 가지 못해서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유라굴로 광풍 앞에서는 선장의 경험과 지식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조금 더 빨리 가려고 했던 백부장 율리오와 선장과 선주의 교만이 부른 역경인 것입니다. 겨울에 출항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선장과 선주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에 빨리 가고자 하는 조바심이었을까요? 아니면 바울보다 자기들의 지식이 더 풍부하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했던 교만이었을까요? 결국 수많은 곡물과 276명의 인원을 싣고 출발한 알렉산드리아호는 풍랑 앞에서 표류하게 됩니다. 방향을 잃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앞둔 제 눈에 들어 온 말씀은 35절입니다. 바울이 빵을 들어 사람들 앞에서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떡을 떼어 먹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이 감사기도를 드린 시점은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해 14일 동안 대략 800km를 떠밀려 온 때였습니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해와 별도 보이지 않은 채, 사나운 폭풍만 거세게 휘몰아 쳤고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니까 살 소망을 잃어 버리고 최후의 순간만을 기다리며 있었습니다.

 

한번 말씀속으로 들어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디베랴 호수가에서 풍랑을 잔잔케 했던 예수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만 점점 더 깊어 졌습니다. 거센 바람으로 인해 파도가 계속 몰아 칩니다. 어둠은 깊어져 가고 흔들리는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뒹굴며 상인들의 물건은 배 안에서 부서지고 배의 돛은 이미 찢어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성경은 2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해와 별도 보이지 않은 채, 사나운 폭풍만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보고 완전히 소망을 잃었다.”

 

온 세상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배와 같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풍랑을 만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멈추지 않는 전쟁의 소식과 재난의 소식들은 희망조차 사라져 광풍을 만난 모습들입니다. 사실 인생의 짐을 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진 배 안에서 바울이라고 두렵지가 않았겠습니까? 아마도 자기 앞에서 죽어간 스데반 집사님의 모습이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다메섹에서의 주님의 음성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날 밤 바울은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서 말씀을 해 주시는데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틀림없이 황제 앞에 서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너와 함께 항해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너에게 맡겨 주셨다.

 

바울은 사명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그대로 되리라 믿었습니다.(24) 그 평안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믿음이었습니다.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바라 본 것입니다.

 

(1)  감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열쇠입니다.

 

우리는 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 사람입니다. 누가가 바울의 항해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이유는 바울의 회심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는 회심이 끝이 아니라 온전한 제자로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변화라는 것은 회심되는 것보다 더 큰 의미의 영역을 담고 있습니다. 인생의 주인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회심의 시작이라면 변화의 삶은 지속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인생을 맡기기 시작했다면 세상의 것을 내려 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내 뜻과 내 경험을 내려놓는 연습입니다. 불안과 두려움, 세상의 욕심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이제껏 쌓아 올린 경험은 점 하나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만이 아니라 유대인과 헬라인, 애굽인 등 많은 이방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삶속에서 어떤 사람과 연결이 되어 있다면 그것 자체가 전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유대지역과 사마리아를 넘어서 로마에 까지 이동하고 있지만 바울이 거쳐 갔던 모든 지역에서 동시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선교의 대표성을 띠는 것이지 하나님이 바울만 통해서 일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거쳐 간 전도여행의 여러 지역에는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동시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적 용어 중에 Glocalization이라는 합성어가 있습니다. 글로벌(Global)+로컬 (Local)를 합쳐서 지역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일하는 선교적 교회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시대는 지역의 한계를 넘어 공존의 시대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한 지역의 예배를 한국과 여러 나라에서 동시적으로 함께 참여하여 은혜를 받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한 사람의 신앙을 넘어 공동체를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지상의 교회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어디서 부터 변화를 시켜야 하고, 어떤 방법으로 선교를 해야할까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 되게 하시는 섬김과 사랑으로 일치해 나아갈 때에 교회는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내게 됩니다. 우리는 매년 추수감사주일 헌금의 일부를 지역의 목회자를 돕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가며 걸어가고 있는 귀한 사역이지요.

 

(2)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감사의 선물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만이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침울하다고 해도 성도는 구원의 소망을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338장을 보면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찬송을 작사한 플라워 아담즈(Flower Adams, 1805-1848)) 25세에 연기자로 무대에 설수 없게 되자 연기를 그만두게 되고 어느날 창세기를 읽다가 야곱이 벧엘에 있었던 이야기를 묵상하며 이 찬송의 가사를 작사하게 됩니다. 그 후 이 찬송은 1912414일 타이타닉 호가 침몰한 날 주일 저녁에 영국 감리교회 성도였던 바이오리니스트 하틀리(Wallace Hartley, 1878-1912) 악장이 생애 마지막 찬송으로 노래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울려 퍼진 이 찬양을 듣고 이어서 8명의 악사들이 함께 참여했고, 잠시 후 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함께 마지막 찬송을 노래했다고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깨어진 세상속으로 들어 오셔서 십자가에서 두팔 벌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그 손은 우리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괴롭고 지칠때 주님께서 구원의 손으로 붙들어 주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감사의 삶입니다.

침몰하는 갑판 위에서 마지막 감사의 찬양을 부른 이들의 고백이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인생 항로에 누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선장으로 있습니까? 주님의 손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그 손은 우리를 일으켜 주시고 가장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한 사람의 삶은 무엇을 믿고 바라보고 살아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매순간 인식되어 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기도가 고백됩니다. 오늘도 이 자리에 주님께서 계심을 믿는다면 예배를 드리는 교우들의 숫자만큼 주님께서 실제적으로 내옆에 계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 , 빛 조차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온 인생임을 깨닫고 살아갈 때에 조바심을 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소명에 집중하게 됩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안에 의심과 불안,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이 방황하는 이들을 주님은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십자가에서 부둥켜 앉으셨고 하늘로 승천하시며 지금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진정한 감사는 우리의 손끝과 발끝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 계시는 주님을 생각할 때에 흘러나오는 고백입니다.

 

개역개정은 바울이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 시작하매 라고(35) 기록합니다. 쉬운말 성경은 35 이렇게 말하고, 바울은 빵을 들어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 떼어서 먹기 시작했다. 36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용기를 내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3) 감사의 기도는 우리를 회복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죽음의 위협에 처해있으니 바울의 감사기도에 반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공개적으로 고백한 감사의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효과를 거두었을 것입니다. 14일이라는 시간동안 배 안에 일행들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는데 그제서야 다른이들도 안심하며 받아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떼어 먹은 것은 떡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이었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준비하다 보니까 사도 바울이 성만찬을 하듯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사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떼듯이 떡을 떼는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감사의 고백은 예배 드릴때에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행함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구별되었고 윤리적으로 볼때에도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 마음 안에 거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부정한 것으로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전통이 중요했고 형식이 중요했기에 주님은 그들 곁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형통해 보이나 하나님과 멀어져 있을 수 있고, 유라굴로 인생의 광풍을 만났지만 바울처럼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배는 손상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한일은 배에 남은 식량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무사히 육지에 내리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다면 마지막 비상 식량만큼은 끝까지 배에 남겨 두려 하였을텐데 배안에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비상 식량을 다 바다에 버립니다. 무사히 육지에 내리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두려움과 죽음의 바다에서 견져 주신 주님으로 인해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배에 탔던 276명의 사람들이 머리털 하나 상함이 없었습니다.

 

백부장은 죄수들과 군사들이 한 사람도 도망가거나 실종되지 않도록 파악한 숫자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시선에서 276명이라는 사람들의 숫자는 한사람의 생명과 그 영혼의 소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유라굴로 광풍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지식과 경험은 참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 되지 않을 때 나의 방법을 내려 놓기가 더 쉽지 않지만 내가 열고자 하는 문이 닫힐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문이 열려져 있음을 보게 될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는 우리를 삶의 모든 영역을 회복하게 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겸손히 느낄수 있게 합니다. 1918년 미국의 미네소타주 보베이라는 작은 탄광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엔스트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백발이 무성하고 몹시 지쳐 보이는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노인은 사진관에 들어와 잠시 쉬면서 차 한잔 얻어 마실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에게 빵과 스프를 주었더니 그 앞에서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진사 엔스트롬씨는 그 모습을 보고 큰 감동과 전율을 느꼈다고 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며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누추하고 연약해보이던 그의 모습이 큰 사람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구나를 느낍니다. 노인의 겉모습은 삶에 지쳐 있고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기도속에서 누구와도 비교할수 없는 마음이 부유한 자임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혹시 우리의 마음에서도 가진자와 갖지 못한자를 나누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진사가 찍은 노인의 사진은 후에 유화로 그려져서 작품이 되었습니다. 바로 감사 기도하는 노인의 은혜(The Grace)’ 입니다. 감사기도 드리는 저 깊은 마음의 사진이 우리의 삶에도 남겨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사의 고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를 담은 감사여야 합니다. 추수감사 주일에 사도 바울의 복음의 전도 여정을 통하여 그가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복음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삶에 항상 함께 했던 감사의 기도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은혜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