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전서 15:35-49

35 ○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몸을 갖고 다시 온다는 거야? 36 어리석은 사람이여,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 줄 아십니까? 그대가 땅에 씨앗을 뿌릴 때, 그 씨앗이 죽지 않으면 싹이 돋아나지 않습니다. 37 그대가 씨앗을 뿌릴 때는 장차 이루어질 몸을 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씨앗을 심는 것뿐입니다. 밀이라든가 다른 여러 종류의 곡식 씨앗이 있지 않습니까? 3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합당한 몸을 주십니다. 그래서 각각 씨앗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고유한 몸을 받게 됩니다. 39 육체라고 해서 모든 육체가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육체가 있고, 동물들도 저마다 다른 육체가 있으며, 새들과 물고기들도 저마다 다른 육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40 또 하늘에 속한 몸도 있고, 땅에 속한 몸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속한 몸의 영광이 다르고, 땅에 속한 몸의 영광이 서로 다릅니다. 41 태양에는 태양의 영광이 있고, 달과 별에도 각기 다른 영광이 있습니다. 그리고 별들 하나하나에도저마다 다른 영광이 있습니다. 42 ○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비록 썩어질 몸이 묻히지만, 장차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43 비록 비천한 몸으로 묻히지만, 장차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납니다. 연약한 몸으로 묻히지만, 강건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44 자연적인 육체의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자연의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45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 라고 했지만,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 온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먼저 왔고, 그 후에 영적인 것이 옵니다. 47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에 속한 사람이지만, 둘째사람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48 따라서 흙에 속한 사람들은 흙으로 지어진 첫 사람 아담과 같고,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하늘에서 오신 둘째 사람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49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흙에 속한 첫 사람 아담의 형상을 입은 것과 같이, 또한 장차 우리는 하늘에 속한 둘째 사람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쉬운말 성경)

 

 

35 But someone may ask, “How will the dead be raised? What kind of bodies will they have?” 36 What a foolish question! When you put a seed into the ground, it doesn’t grow into a plant unless it dies first. 37 And what you put in the ground is not the plant that will grow, but only a bare seed of wheat or whatever you are planting. 38 Then God gives it the new body he wants it to have. A different plant grows from each kind of seed. 39 Similarly there are different kinds of flesh—one kind for humans, another for animals, another for birds, and another for fish. 40 There are also bodies in the heavens and bodies on the earth. The glory of the heavenly bodies is different from the glory of the earthly bodies. 41 The sun has one kind of glory, while the moon and stars each have another kind. And even the stars differ from each other in their glory. 42 It is the same way with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Our earthly bodies are planted in the ground when we die, but they will be raised to live forever. 43 Our bodies are buried in brokenness, but they will be raised in glory. They are buried in weakness, but they will be raised in strength. 44 They are buried as natural human bodies, but they will be raised as spiritual bodies. For just as there are natural bodies, there are also spiritual bodies. 45 The Scriptures tell us,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person.” But the last Adam—that is, Christ—is a life-giving Spirit. 46 What comes first is the natural body, then the spiritual body comes later. 47 Adam, the first man, was made from the dust of the earth, while Christ, the second man, came from heaven. 48 Earthly people are like the earthly man, and heavenly people are like the heavenly man. 49 Just as we are now like the earthly man, we will someday be like the heavenly man.(New Living Translation)

부활절 세번째 주일입니다. 보스턴에도 봄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땅속 깊이 심겨져 있던 씨가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듯 교우들의 삶에 하나님의 생기가 충만해 지기를 소망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견뎌야 할 때가 옵니다. 견디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이 지닌 강인함입니다. 땅속 깊이 심겨진 씨가 겨울을 견디고 다시 소생하듯이 인생의 모호한 시간을 지나는 이들과 꿈을 위해 현재의 시간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단비가 우리 안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씻어내기를 소망합니다. 몇천년전 고대 이집트 시대에 있었던 씨가 발견되어 싹을 띄우는데 성공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수천년 동안 생명을 품고 있던 씨앗의 강인함이 느껴집니다. 수천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딱딱한 껍질 안에 있던 생명이 충분한 환경조건을 만나니까 발아(germination) 되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부활의 몸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사실 부활을 살아내는 것은 현재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부활의 몸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만일 가능하다면 어떤 몸으로 부활하냐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35 ○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몸을 갖고 다시 온다는 거야?”

오늘 본문은 부활의 몸에 대해서 묻는 회의론자들을 향한 바울의 설명이며, 부활의 몸에 대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첫째, 성경은 인간의 몸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몸은 아무리 관리해도 시간이 지나면 약해지고 노화가 됩니다.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관리하고 노력해서 노화를  늦출 있을지 몰라도 근원적으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우리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받아들인다면 약해진 몸도 영광스런 일부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가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가고 있는 단단한 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중세시대 신학자들은 부활에 대해 육체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 간의 균형을 찾는 관심을 가졌습니다. 부류의 신학자들은 사도신경에 기록된 대로 부활이 신체의 실제 부활을 의미한다고 믿었고, 다른 신학자들은 영적인 부활을 강조하여, 부활은 영혼의 삶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며 몸의 부활보다는 영혼의 부활에 많은 중점을 두었습니다. 유대 랍비들 같은 경우에는 인간이 죽음에 처할 때에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육은 땅의 먼지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헬라 철학의 이분법적 사고 개념은 영과 육을 대립적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몸을 씨앗이 속에 심겨지는 하나의 그림과 죽은 몸이 무덤 속에 장사되는 하나의 그림을 오버랩시키며 설명합니다. 36절로 38절입니다. 36 어리석은 사람이여,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 아십니까? 그대가 땅에 씨앗을 뿌릴 , 씨앗이 죽지 않으면 싹이 돋아나지 않습니다. 37 그대가 씨앗을 뿌릴 때는 장차 이루어질 몸을 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씨앗을 심는 것뿐입니다. 밀이라든가 다른 여러 종류의 곡식 씨앗이 있지 않습니까? 3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씨앗에 합당한 몸을 주십니다. 그래서 각각 씨앗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고유한 몸을 받게 됩니다.

땅속에 심긴 씨가 새로운 형태로 변화되어 껍질을 찢고 새로운 생명을 밀어내듯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새로운 몸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비유는 영혼은 선하고 육은 무조건 악하다는 헬라 철학자들의 사상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몸을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창조의 대상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땅속에 심겨진 각각의 씨앗이 하나님의 주권적 디자인으로 인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생명이 나타나는 것처럼 부활의 몸도 각기 다른 고유한 몸을 받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39 육체라고 해서 모든 육체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육체가 있고, 동물들도 저마다 다른 육체가 있으며, 새들과 물고기들도 저마다 다른 육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씨가 종류대로 알맞는 형체로 디자인이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몸의 신비입니다. 자연속에 동물과 새들, 물고기들, 작은 개미 한마리도 하나님의 창조의 몸을 지녔습니다. 우리는 자연속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느끼고 하나님의 창조적 숨결을 깨닫게 될때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깊은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육체는 단백질로 구성된 몸을 의미합니다. 몸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새나 물고기든 피조물들의 몸은 죽고 썩을 몸이며, 유한한 몸이지만 각기 다른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몸에 대한 부정적 의미와 긍정적 의미의 구절들이 모두 있습니다. " 많은 육신에 따라 사는 사람은 오직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지만,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8:5) 라는 구절은 몸을 부정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자체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자체가 악하고 부정하다면 우리가 살면서 몸으로 섬기고 사랑하고 예배하는 모든 행위를 악하다고 규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우리의 섬김과 헌신이 그릇에 담겨질 때에 본질이 드러나고, 주의 사랑을 나타낼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간을 구성하는 몸과 영혼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지 않습니다. 몸은 전인격인 통합을 지칭하기에 사실 몸과 영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관념적으로 구분을 해서 설명하고 이해할 뿐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몸에 대한 또 다른 구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 6 19절입니다. "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집입니다. ,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성령이 상주하고 계시는 성령의 집인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몸의 약함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약한 몸으로 인해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갈라디아서 4 13절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내가 처음으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게 것은 육체의 병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며 받으실 거룩한 제물로 바치십시오. "(로마서 12:1) 오늘 본문인 고전 15 43절입니다. "비록 비천한 몸으로 묻히지만, 장차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납니다. 연약한 몸으로 묻히지만, 강건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고전 15:43)

그러므로 성도는 주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아가는 연습을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몸을 통하여 드러내야 합니다. 죄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면 우리의 몸은 불의의 도구가 되고, 성령을 거슬러 살아가게 됩니다.  인간의 기원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넣어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 몸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자를 지으실 때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갈비뼈 하나를 뽑으시고 자리에 몸을 채워주셨습니다. ( 2:21) 오늘 본문도 몸의 고유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도 몸을 지니고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제 40절을 보시겠습니다. 성경은 하늘에 속한 , 땅에 속한 몸을 말하고 있는데 영광이 각각 다르다고 합니다. 40 하늘에 속한 몸도 있고, 땅에 속한 몸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속한 몸의 영광이 다르고, 땅에 속한 몸의 영광이 서로 다릅니다. 41 태양에는 태양의 영광이 있고, 달과 별에도 각기 다른 영광이 있습니다. 그리고 별들 하나 하나에도 저마다 다른 영광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몸은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 해와 달과 별을 가르킵니다. 하늘에 속한 창조물 가운데 보여지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음을 뜻합니다. 땅에 속한 몸은 땅에 존재하는 피조물들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적 디자인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각각의 형체들 안에 하나님의 신비를 담아서 디지인하셨음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신은 현재는 불완전한 몸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성령의 충만한 삶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소망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살아가며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삶을  만나는 특별한 여정입니다.

둘째, 부활의 소망은 우리에게 변화된 삶을 요구합니다.

42 ○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비록 썩어질 몸이 묻히지만, 장차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43 비록 비천한 몸으로 묻히지만, 장차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납니다. 연약한 몸으로 묻히지만, 강건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44 자연적인 육체의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자연의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부활의 몸은 지금의 육체가 지니는 영광과 다른 영광을 지니게 것임을 말해 줍니다. 썩어질 몸이 썩지 않는 몸으로, 비천한 몸과 연약한 몸이 영적인 강건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소망이 우리를 풍성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약한 몸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오히려 연약한 몸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강하고 모든 것이 준비되었을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지만 우리가 약할 우리가 무너져 있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간절히 만나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상실의 감정들과 거절의 순간들, 이루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불안과 두려움은 부활의 소망을 만날때 영원한 상실이 아닌 우리 안에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소망의 자리를 채우는 기회가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쉽게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을 그들은 영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 가셔서 당신의 몸을 보여주시며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고 질문하시고 생선 한토막을 잡수셨습니다. (누가복음 24:36~39)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자신이 단순한 영이 아님을 제자들에게 증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 잡혀 다락방 문을 겹겹이 걸어 잠그고  있었는데 예수가 들어 가셔서 위로와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제자에게는 자신의 십자가의 흔적을 만져 보라고 하시며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몸은 이전의 육체의 속성을 지니고 계셨지만 지금의 몸과는 다른 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19~21) 사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의 몸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믿음으로 당하는 고통과 수고를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삶이 헛된 것이 아니라 그날에는 옳은 삶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계십니다. 분명 풀과 꽃이 마르고 육체의 몸도 썩어질 것이나 우리가 살아가며 실천한 모든 삶이 기억되고 남는다면, 믿음의 헌신들,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일들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일들이 그대로 남게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부활의 때에는 이상 사망도 없고 애통함이 없는 성도가 누리게 것이라 기록합니다. 하늘의 영광이 우리의 몸에 새겨질 것입니다. 계시록 21 4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몸소 닦아 주실 것이니, 이제 이상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우는 것도 아픈 것도 절대로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땅에 보내신 목적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몸으로 믿음의 일들을 많이 심어야 것입니다. 믿음의 법칙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심는 이들은 적당히 거두겠지만 육신의 한계를 넘어 믿음으로 살며 씨를 뿌리는 성도들은 기쁨으로 열매를 거두는 날이 있게 됩니다. 이제 45절로 4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5 성경에 기록된 대로, “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 라고 했지만,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먼저 왔고, 후에 영적인 것이 옵니다.

하나님의 창조한 모든 것들은 본래의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창조 질서에 따라 파종기와 추수기가 있듯이 부활의 추수때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먼저는 자연적인 것이 먼저 왔고, 있는 자로 살아가다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입게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인 ,부활의 몸을 입게 것임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간과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태어나서 병들고,죄짓고,죽고,썩는 것을 운명으로 안고 태어난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운명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래 계획데로 살아가지 못하게 죄의 도구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몸이 반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셋째, 육의 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의 몸을 입게 됩니다.

47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에 속한 사람이지만, 둘째사람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48 따라서 흙에 속한 사람들은 흙으로 지어진 사람 아담과 같고,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하늘에서 오신 둘째 사람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49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흙에 속한 사람 아담의 형상을 입은 것과 같이, 또한 장차 우리는 하늘에 속한 둘째 사람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쉬운말 성경)

49절의 형상은 인간 창조의 모델이라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아니라 '아담의 형상' 가르킵니다. 우리는 아들이 아버지를 닮는 질서 속에서 인간의 몸의 형태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형상은 바울이 이제껏 말한 몸이라는 형태입니다. 아담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형상이 대조되는 것은 지금 순간 우리의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됩니다.

마음과 눈의 시선이 주님께 있지 않은데 어떻게 나의 믿음 생활이 온전히 있을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가득해 지면 두려움이 줄고, 관계는 꽃을 피우고, 사랑은 커져 것입니다. 애쓰고 노력해도 안되는 용서와 사랑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갈 때에 우리의 마음이 정결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청결한 자는 거짓이 없이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며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하나님을 보게 되는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의 일부가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몸을 갖고 다시 온다는 거야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주님의 몸과 같이 부활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입게 것입니다. 억지로 믿으려고도 하지 마시고 억지로 부정하려고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회의론자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전히 말씀을 믿지 못하는 이들과 삶의 위기속에서 힘겨워 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마음으로 어떻게 다가아야 할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길을 만들어 가는데 마음과 시간을 쏟아야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이라고 하면 세상의 권력, 명예, 손에 쥐게 되어 내가 높아지는 것들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땅에서 존경과 영광만을 누리고 사셨습니까? 가장 화려한 곳으로 찾아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자리로 찾아가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섬김의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좋은 집에서 복음 전하지 않으셨고 예수님께서 걸어 가시는 모든 땅이 복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고통 없는 강인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죽으심 없이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신 영광의 일들을 믿는다면 부활의 일들을 알수 없어도 하나님을 보게 되고 인식하게 됩니다. 몸의 부활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며 삶의 태도를 분명하게 해주는 능력입니다. 성도는 현실에만 안주해서 적당히 믿고 적당히 거두는 삶이 아닙니다.

성경속에 인물들만 보아도 모든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에서 예수님의 형체를 입게 되어짐으로 흙의 비참함을 벗게 됩니다. 부활의 믿음은 삶의 현실속에서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홀연히 변화하여 거룩한 부활의 몸을 입게 것이라 말씀합니다. (고전 15:51)  이제 몸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소멸되어가는 몸도 아름다운 과정일뿐입니다. 성도는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현재의 삶의 기쁨이 되어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살아계신 주님이 삶속에서 강력하게 인식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