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5

값싼 은혜는 이제 그만! No More Cheap Grace!

누가복음 9:23-27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도(discipleship)’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방식을 제자도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자도’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강단에서 ‘값싼 은혜’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죄와 단절하지 못하고 계속 죄를 짓는 삶을 살면서도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고 복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자’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정말 끔찍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처음부터 읽어보면 이 사건이 사전에 기획된 사건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외 없이 이 사건에도 율법학자들이 등장하고,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율법학자(teacher of religious law)’는 율법을 두루마리에 필사(筆寫, copy)하는 전문가를 말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서기관(書記官, scrib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고대에는 지금과 같은 인쇄술이 없었기 때문에 일일이 손으로 써서 사본(寫本)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필사할 때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이 이 일을 했습니다. 말씀을 필사하다보니 이 사람들은 말씀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는데 늘 앞장을 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말씀에 정통해도 인간성이 변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쓴 편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할례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It doesn't matter if you are circumcised or not. All that matters is that you are a new person).” (갈라디아서 6:15,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바울은 믿음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간음(姦淫, adultery)’은 율법에서 금하는 것입니다. 간음한 사람은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붙잡힌 여자의 사건이 기획된 사건처럼 보이는 이유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8:6). 이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이런 여자는 율법에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이 여자를 어떻게 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를 돌로 치라.” 신기하게도 예수님의 이 말씀 한마디에 사람들은 한 사람 두 사람 슬그머니 자리를 떴습니다. 이 여자를 끌고 왔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도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I don’t condemn you. Go and sin no more).” (요한복음 8:11) 

이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여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죽음의 현장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아시잖아요? ‘은혜(grace)’라는 말은 ‘God’s undeserved favor(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까? 단순히 그 여자가 불쌍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이 여자에게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아 영적으로 죽은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It is only by God's grace that you have been saved).” (5절) 또 이 말씀을 조금 더 읽어가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God saved you by his grace when you believed. It is a gift from God).” (8절)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또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이제 전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받은 사람 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이 희미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능력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제자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이제 이렇게 살아야 하겠구나 하는 결단이 없는 것입니다. ‘결단(決斷)’이라는 말은 ‘결단할 결’자와 ‘끊을 단’자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후에, 예전의 삶과 단절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마음의 결단을 내린 분이 계십니까?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제자도’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제자도는 다른 것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의 말인데요. 대표작 본회퍼는 천재 신학자였습니다. 21살에 베를린 대학에서 ‘신자의 공동생활’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때 그를 지도한 사람은 신학계의 거장 칼 바르트(Karl Barth)였습니다. 그리고 24살에 ‘존재와 행위’라는 논문으로 교수 자격논문이 통과되어 교수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음 글은 그의 대표작 ‘The Cost of Discipleship(제자직의 대가)’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 말로는 ‘나를 따르라’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The life of discipleship can only be maintained so long as nothing is allowed to come between Christ and ourselves—neither the law, nor personal piety, nor even the world. The disciple always looks only to his master, never to Christ and the law, Christ and religion, Christ and the world. He avoids all such notions like the plague. Only by following Christ alone can he preserve a single eye (제자도는 율법도, 개인의 경건도, 세상도, 그 밖에 어떤 것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들도록 허용되지 않아야 유지될 수 있다. 제자는 항상 그의 주인만 바라보지 그리스도와 율법, 그리스도와 종교, 그리스도와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마치 전염병을 피하듯이 그런 개념을 피한다. 제자는 오직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눈을 지켜 나갈 수 있다).” 

여러분, 본회퍼가 말한 ‘하나의 눈을 보존한다 혹은 지킨다(preserve a single eye)’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에게 두 개의 눈이 있는데요. 이 두 개의 눈을 가지고 각각 다른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두 개의 눈을 가지고 하나의 대상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회퍼가 말하는 ‘a single eye’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의 눈을 가지고 하나의 대상 즉 주님만 바라보는 것’ 이것이 ‘제자직’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대부분의 번역 성경들은 이 말을 “You must deny yourselves”라고 번역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이 말씀이 “You must turn from your selfish ways(너희들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야 한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에 대하여 “아니요(No)”라고 대답하고,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예(Yes)”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우리 주님의 뜻 안에서 가까운 시일 안에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보내려고 합니다. 여러분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면, 내 마음이 위로받을 것 같습니다. 디모데만큼 여러분에 대해 걱정하고 마음 쓰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디모데의 인품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2:19-22) 이기주의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인간의 본능(本能, nature)입니다. 원래 우리가 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위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연단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우리가 이기주의를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Timothy has proved himself. Like a son with his father, he has served with me in preaching the Good News(디모데는 자기 자신을 증명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나와 함께 섬겼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심지어 디모데를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디모데후서 1:4). 그리고 바울은 그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디모데에게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디모데후서 4:9, 21).

디모데가 이기주의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위에서 소개했던 본회퍼는 어떻습니까? 독일의 나치주의가 극성을 부릴 때 본회퍼를 잘 아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를 비롯한 미국의 신학자들이 본회퍼를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로 초빙했습니다. 그들 생각에 본회퍼를 독일에 그냥 두면 결국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감했기 때문입니다. 본회퍼로서는 정말 좋은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그 때가 1939년, 그의 나이 33살 때였습니다. 교수 초빙을 수락하고 독일로 돌아가지 않으면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독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 때 그가 라인홀드 니버에게 쓴 편지가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줍니다. 그가 쓴 글 속에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 글을 한번 보세요. “I have come to the conclusion that I made a mistake to coming to America. I have to live through the difficult period of our national history with the Christians in Germany. I will have no right to assist with the restoration of Christian life after the war in Germany if I do not share the trials of this period with my people(내가 미국에 온 것이 실수였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사의 어려운 시기를 내 조국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겪어야 합니다. 이 시련의 시간을 내 민족과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나는 전후 독일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회복을 도울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기 위해서는 매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고,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23, 26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통과 전쟁과 질병과 가난이 끊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고난을 우리와 상관없다고 외면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고난에 참여한 것처럼, 우리도 세상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주님의 말씀의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직’입니다. 제자의 삶 그 어디에도 이기주의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cheap grace)’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본회퍼의 말을 들어볼까요? “Cheap grace is grace without discipleship, grace without the cross, grace without Jesus Christ, living and incarnate(값싼 은혜는 제자직이 없는 은혜이고, 십자가 없는 은혜이고, 살아 있고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이다).”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을 완전히 희생해야 하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불가능하게 보여도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밭에 묻힌 보물(마태복음 13:44)’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땅 속에 많은 보물이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람은 집으로 돌아와 자기 전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그 밭에 엄청난 보물이 묻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제자의 삶’이 꼭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자직을 선택한 사람들은 어찌보면 그 전 재산을 팔아 밭을 산 사람처럼 어리석게 보입니다. 주님은 제자직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얼핏 보기에 ‘자기 생명을 잃는 사람들(those who lose their lives)’처럼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자기 생명을 건지는 사람들(those who save their lives)’이라고 하셨습니다(24절). 

여러분이 잘 아는 C.S. 루이스(C.S. Lewis, 1998-1963)가 그의 대표작 ‘Mere Christianity(순전한 기독교, 1952)’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Until you have given up yourself to Him, you will not have a real self(그리스도에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드릴 때까지 당신은 진정한 당신 자신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직’을 굉장한 것으로 말할지 모르지만, ‘제자직’은 소수의 사람들만 살 수 있는 특별한 삶이 아닙니다. ‘제자직’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인간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6/26/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4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Jesus The Good Shepherd

요한복음 10:9-15

‘Seven I AM Statements in the Gospel of John(요한복음에 나오는 7개의 I AM)’이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I AM’이라는 말은 출애굽기 3:14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는 말을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셨습니다. BC 3세가 중엽에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번역된 성경을 ‘셉투아진트(Septuagint, 70인 역)’라고 합니다. 이 때 출애굽기 3:14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는 말을 ‘εγώ εἰμί(ego eimi)’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I AM’이 됩니다.

‘I AM’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가리켜 ‘I AM’이라고 말씀하신 일곱 개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복음 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복음 8:12).” “나는 문이다(요한복음 10:9).” “나는 선한 목자다(요한복음 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6).” “나는 포도나무다(요한복음 15:1, 5) 요한복음에만 ‘I AM’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4:27에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Jesus spoke to them at once. "Don't be afraid," he said. "Take courage. I am here!①" / ①Or The `I AM' is here; Greek reads I am. See Exod 3:14 “I am here”라는 말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주(note) ①에 있는 대로 “I AM is here(I Am이 여기 있다)” 이렇게 번역해야 정확한 번역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I AM’이라는 말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낸 말이기 때문입니다.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치고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주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태복음 13:33)”라고 고백했습니다. 제자들이 그 때 경험했던 예수님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만났던 ‘스스로 있는 자’ 그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오늘 제가 ‘I AM’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나는 선한 목자다(I am the good shepherd, 11절)” 이 말씀이 ‘I AM’ 구절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I AM is the good shepherd”라고 해야 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바로 ‘I AM’, ‘스스로 계시는 분’ 오늘 우리가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부르는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스스로 계시는 분’을 발음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네 개의 자음으로만 되어 있거든요. 나중에 모음을 붙여서 ‘여호와(Jehovah)’ 혹은 ‘야훼(Yahweh)’라고 발음을 했습니다. 발음을 할 수 없으니까 ‘주님’이라는 뜻을 가진 ‘아도나이(Adonai)’라는 말에서 모음 네 개를 빌려와 발음을 했습니다. 그렇게 발음한 것이 ‘여호와’ 혹은 ‘야훼’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이 말보다 더 잘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윗이 쓴 시편 23편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시편 23:1-2)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He makes me to lie down in green pastures; He leads me beside the still waters.” (NKJV) 위대한 시인이었던 다윗은 이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만족(滿足, satisfaction)’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한자 ‘만족’이라는 말을 설명하면서 ‘만(滿)’자는 ‘가득차다’는 뜻인데, 왜 여기에 ‘발(足)’이라는 말을 붙였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아무튼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가득하다’는 말에 ‘발’이라는 말을 붙여 ‘만족’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도 그 설명을 들을 때는 왜 ‘발’을 뜻하는 ‘足’자를 썼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다가 ‘발(足)’자를 붙인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발은 우리 몸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만족하다'는 말은 위로 머리에서부터 우리 몸 맨 끝에 있는 발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곳에도 부족한 것이 없는,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만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람들은 ‘만족’을 느끼는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만족’을 얻느냐 하는 것입니다. “Contentment should be the hallmark of my life, as I put me affairs in the hands of God(나의 일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때 반드시 만족이 주어진다).” 필립 켈러(W. Phillip Keller, 1920-1997, 케냐)의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삶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필립 켈러는 선교사의 아들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직접 8년 동안 목자의 삶을 경험하면서 발견한 것들을 책으로 썼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A Shepherd Looks at Psalm 23(한 목자가 본 시편 23편, 우리 말로 ‘양과 목자’로 번역됨)’이라는 책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양들이 목자의 인도를 받음으로써 배불리 먹고, 물을 마시고, 만족을 얻는 것처럼, 우리도 목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 삶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Blessed are the people whose God is Yahweh).” (시편 144:15) 야훼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하는 사람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과 저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참 복 있는 사람들인 것을 아시나요? 왜냐하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는 만족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시편 95편에 있는 말씀인데요. “다 와서 엎드려 주를 경배합시다.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이며 그분이 기르는 양 떼들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에게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6-7절)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장에서 사는 하나님의 양떼들이고, 하나님의 백성들(the people of His pasture)이기 때문입니다.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 미국)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best and most beautiful things in the world cannot be seen or even touched-they must be felt with the heart(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들은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마음을 느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들은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헬렌 켈러는 볼 수 없는 ‘시각장애자’였고 들을 수 없는 ‘청각장애자’였습니다. 하지만 헬렌 켈러는 해가 넘어가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마음으로 느껴 알고 있었고,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장관을 눈으로 본 적은 없었지만 마음으로 느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95편 말씀도 마음으로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7절, 개역성경) 이 말씀이 가슴으로 느껴지시나요? “하나님이 기르시는 그 손의 양이라”는 말씀이 정말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까? 갓난 아기들이 엄마의 손에서 무럭무럭 자라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자랍니다. 이 하나님이 누구인가요? 스스로 계시는 분, 모세가 호렙산에서 만났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제 그 야훼 하나님,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자신을 ‘삯꾼(a hired hand)’과 구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삯꾼’은 돈을 받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 주인은 양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마리 수를 세어서 모자라는 것은 목자가 물어내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사나운 짐승의 공격을 받아 양이 잡혀 먹히거나 할 때는 목자가 그 양을 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를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10절)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My purpose is to give them a rich and satisfying life(나의 목적은 양들에게 풍요롭고 만족한 삶을 주기 위한 것이다)”라고 나와 있고, Amplified Bible에는 “I ca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in abundance [to the full, till it overflows]”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에게 차고 넘치도록 풍성한 생명을 주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풍성한 생명’은 삶의 의미와 목적과 관계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 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조금 전에 소개했던 필립 켈러의 말인데요. “No pastor, no spiritual leader, is ever able to take his people any further than he himself has gone with God(어떤 목사나 영적 지도자도 그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 이상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갈 수 없다).” 그의 말을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목사나 영적인 리더도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가 될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왜냐하면 어떤 목사도, 영적인 리더도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온전하게 하나님께로 인도할 ‘선한 목자’는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로마서 5:8)”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다윗은 나이가 어리고 전투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골리앗과의 싸움이 허락되지 않자 사울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양 떼를 지키던 사람입니다. 사자나 곰이 나타나 양을 물어 가면, 저는 그 놈들을 공격하여 그 입에서 양을 구해 냈습니다.” (사무엘상 17:34-35) 다윗은 양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선한 목자(a good shepherd)’였습니다. 그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칠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이신 예수님의 ‘모형(a copy)’ 혹은 ‘그림자(a shadow)’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잘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양들에 대한(about sheep)’ 정보를 안다는 말이 아니라, 양들의 특징을 알고, 그들의 버릇을 알고, 그들의 건강 상태를 알고, 심지어 양들의 이름까지 안다는 뜻입니다. 양들을 인격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필립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It takes some of us a lifetime to learn that Christ, our Good Shepherd, knows exactly what He is doing with us. He understands us perfectly(우리 중 어떤 사람들에게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아신다는 것을 배우는데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계신다).”

이 시간, 여러분의 관심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에게 돌려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나를 알아본다(They know me).” (14절)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because they know his voice) 그의 뒤를 따른다.” (4절) 양들이 목자를 인격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도 우리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음성을 모르면 그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다가 정말 우연히 목자가 양떼를 인도하는 것을 현장에서 목격했습니다. 나이가 젊은 목자인데, 양 5-60마리를 데리고 왔습니다. 목자가 피곤했는지 잠깐 자리에 앉는 사이에 양들은 금방 여기 저기 흩어져 풀을 뜯기 시작했습니다. 양들이 멀리 가면 안 되니까 목자가 조약돌을 하나 집어 저만큼 던졌습니다. 그 이상은 가지 말라는 신호였습니다. 한참 있다가 목자가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니까 양들이 금방 목자에게 모여들었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신기한 광경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선한 양’이 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선한 양’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다른 사람을 위한 ‘선한 목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목사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Life’s most persistent and urgent question is ‘What are you doing for others(삶의 가장 지속적이고 긴급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6/19/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3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I Will Give You Rest

마태복음 11:28-30

오늘 마태복음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구약성경 이사야 55장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너희 목마른 사람아, 다 와서 마셔라.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마셔라. 포도주와 우유를 마시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마셔라. 어찌하여 너희는 진정한 음식이 못 되는 것을 위해 돈을 쓰느냐? 어찌하여 만족시켜 주지도 못할 것을 위해 애쓰느냐?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영혼을 살찌우는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내게 와서 귀를 기울여라.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살 것이다.” (이사야 55:1-3a)

이 말씀은 당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메시지를 그의 신실한 종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이사야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들이 없었거든요? “값없이 와서 마시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지, “너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할 음식을 위해서 애쓰느냐?”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이 말씀을 다시 듣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지친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예수님을 입을 통하여 다시 들음으로써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오늘날까지도 옛 언약을 읽을 때 수건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이 수건이 아직까지 벗겨지지 않고 있는 것은,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벗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3:14) 이 말씀이 NKJV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Until this day the same veil remains unlifted in the reading of the Old Testament, because the veil is taken away in Christ.” 여러분, 얼굴에 베일을 쓰고 사물을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물을 분명하게 볼 수 없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바로 구약성경을 읽을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마치 얼굴에 베일을 쓰고 사물을 보는 것처럼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어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베일을 벗겨 주신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구약성경을 읽을 때 답답하던 것이 분명하게 이해가 된다는 것 아닙니까? 구약성경은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읽어야 그 의미를 분명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모두 내게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말이 ‘수고하고’라는 말과 ‘무거운 짐을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한번 이른 아침에 센트럴 스퀘어에 나가 보시지요. 무표정한 수많은 사람들이 일터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탑니다. 그리고 오후 늦게까지 일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내일 또 그런 일을 반복합니다. 내일만이 아니고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고, 피곤하고, 지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오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이사야서에 있는 “너희 목마른 사람아, 다 와서 마셔라.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마셔라. 돈 없이, 값없이 와서 마셔라” 이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과 겹쳐 들리지(overlap) 않습니까?

2,000년 전,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마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When He saw the multitudes, He was moved with compassion for them, because they were weary and scattered, like sheep having no shepherd, NKJV).” (마태복음 9:36) 예수님의 눈에 비친 당시의 사람들은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목자가 없는 양같이 보였습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들의 길을 인도하는 목자가 없으니까 그들은 흩어져 제 각기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줄 목자가 없어서 사람들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보시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마가복음 6:34)”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가르쳐 줄 지도자들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맞습니까?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휴가나 여행이 아닙니다. 잠시 일을 쉬는 것이 도움은 될 수 있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지치고 피곤한 삶이 반복됩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삶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사는 사람은 영혼이 살아납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난과 배고픔을 이길 수 있고, 고난(고생)도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이라는 오스트리아의 신경 심리학자가 주창한 치료법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홀로코스트(The Holocaust)’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입니다. 그는 그 때의 생존 경험을 살려 ‘Man’s Search For Meaning(1946, 한국어 번역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주장한 것이 ‘로고테라피’입니다. ‘로고데라피’는 ‘logos’라는 말과 ‘therapy(치료법)’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logos’는 말, 의미 등으로 번역되는 말이지만, 신학(theology)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로고테라피’를 ‘의미요법”이라고 번역합니다. 

빅터 프랭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Life is never made unbearable by circumstances, but only by lack of meaning and purpose(인간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은 환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미와 목적을 상실했을 때 그렇게 되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의 말을 더 들어볼까요? “The meaning of life is to give life meaning(삶의 의미란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다).” “For the  meaning of life differs from man to man, from day to day, and from hour to hour. What matters, therefore, is not the meaning of life in general but rather the specific meaning of a person’s life at a given moment(삶의 의미란 사람마다,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달라지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순간에 한 개인이 느끼는 삶의 특별한 의미이다).”

우리의 삶의 무게가 힘에 버겁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향해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I will give you rest)”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휴가를 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29절에 다시 나오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refreshment(원기 회복)’를 주고, ‘renewal(새로워짐)’ 시켜주고, ‘blessed quiet(복된 평온함)’을 주고, ‘tranquility(평온함)’를 주고, 삶의 ‘satisfaction(만족)’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쉼’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29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멍에(yoke)’는 예수님의 ‘교훈(teachings)’을 의미합니다. 예전에 소에게 일을 시킬 때 소의 어깨에 ‘멍에’를 메웠습니다. 멍에를 메울 때 두 마리 소에게 같이 멍에를 메웠습니다. 멍에를 메면 두 마리 소는 어쩔 수 없이 서로 보조(步調)를 맞춰서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멍에를 메라”고 하신 것은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지내면서 나에게 보조를 맞추라는 뜻입니다. 마가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시지요? “예수께서는 열 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습니다(Then he appointed twelve of them and called them his apostles. They were to accompany him).” (마가복음 3:14, 공동번역) ‘accompany’라는 말이 ‘go along with~(누구와 함께 가다)’라는 뜻이잖아요? 그러므로, ‘나의 멍에를 메고’라는 말씀은 “나와 함께 지내자”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과 나란히 걸으면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인격을 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에게 배웁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과 다른 랍비들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번 이 말씀을 보세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따라하지는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올리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 짐을 지기 위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23:2-4) 

이것이 예수님의 눈에 비친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본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영어 표현에 ‘take advantage of~’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부당한 요구를 해서 이익을 취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지도자들이 다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과 랍비들의 교훈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것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위(authority)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21-22)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것은 처음 듣는 새 교훈이다(What is this? A new teaching with authority, 마가복음 1:27)” 하면서 깜짝 놀랐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온 사람들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온 사람들을 이용해서 ‘take advantage’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서 뭔가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예수님은 그에게 온 사람들에게 인간성을 회복하도록, ‘참 인간’이 되도록 도우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에게 하신 말씀을 아시지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찾아왔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나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For I came to seek and save those who are lost).” (누가복음 19:9-10) 예수님 안에서 삭개오는 그의 잃어버린 삶을 되찾았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예수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는 증거는 이후 그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재산을 모으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안에서 재산을 축적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의 조건이나 환경이 어떻게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우리의 삶의 환경은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수님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Logotherapy(의미요법)’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이 우리를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 우리를 견디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모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서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그분과 함께 지내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돈을 쓰고 애를 쓰느냐?”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않고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서(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전에 들었던 찬양 가사가 생각납니다. ‘O Come, All You Unfaithful(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오세요)’라는 찬양입니다. “오세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요. 연약하고 불안한 사람들도 오세요. 와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세요. 오세요. 열매 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은요. 기도에 지친 사람들도 오세요. 와서 당신의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세요. 그리스도가 나셨어요. 그리스도가 나셨어요. 그리스도가 나셨어요. 당신을 위해.” 이런 가사의 찬양입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O Come, All You Unfaithful(Korean subtitle)’ Link https://bit.ly/3QsSnka

 


6/12/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2

크리스천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Christians Think Differently

마가복음 10:42-45

신약성경의 핵심적인 말씀 시리즈 두 번째 설교는 “크리스천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이런 제목의 설교입니다. 본문 말씀은 마가복음 10:42-45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to serve others)’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에게 ‘섬김의 삶’은 단순히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매슬로(Abraham H. Maslow, 1908-1970)라는 미국의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Maslow's Hierarchy of Needs(매슬로의 욕구 단계설)’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위스콘신 대학을 졸업한후 콜롬비아 대학의 연구원을 거쳐 위스콘신, 브루클린, 보스턴에 있는 브랜다이스 등의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습니다. 그가 ‘Maslow's Hierarchy of Needs’를 처음 내 놓은 것이 1943년입니다. 그리고 1954년에 자기 주장을 약간 수정하여 지금의 이론을 완성했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론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가 ‘단계설’이란 말을 쓴 것은 욕구가 아래에서부터 위로 단계적으로 생겨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제일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인간의 욕구는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입니다. 먹을 음식이 있어야 하고, 옷이 있어야 하고, 잘 곳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 단계의 욕구는 ‘안전에 대한 욕구(Safety Needs)’입니다. 그 다음이 ‘애정과 소속의 욕구(Love and Belongingness Needs)’입니다. 친구와 가족, 그리고 자기가 소속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욕구입니다. 그 다음이 ‘자기 존중의 욕구(Self-esteem Needs)’ 단계입니다. 인정받고 싶어하고, 성공하고 싶어하고, 지위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권력에 대한 욕구가 생기는 단계입니다. 맨 위에 있는 단계는 ‘자아 실현의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명예에 대한 욕구가 생깁니다. 결론적으로 매슬로는 권력에 대한 욕구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로 본 것입니다. 

성경에 ‘고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민수기 16장). 그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에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고라’에게 모세와 그의 형 아론에 대하여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세와 아론과 같은 레위지파 사람인데, 왜 이 두 사람만 백성들에게 존경받고 지도자로 군림하는가?” 이것이 ‘고라’의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지내던 때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고라’의 행위를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라’를 심판하셨습니다. 고라의 반란으로 무려 14,950명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라’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지도자가 되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고, 자기 힘을 과시하고 싶은 기본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하고, 힘을 가지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이 다르고 힘을 행사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But among you it will be different).”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 1901-1978)라는 미국의 인류학자가 있습니다. 인류학(anthropology)의 초석을 놓은 분으로,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 배운다는 ‘The Theory of Imprinting(각인 이론)’으로 유명합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Children must be taught how to think, not what to think(어린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하는 지를 배워서는 안 되고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지를 배운다면 그 아이는 개성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지만, 어떻게 생각해야는 지를 배운다면 그 아이는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마가렛 미드의 이 말이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말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적인 관점(the biblical point of view)’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이사야 55:8-9) 하나님의 생각은 성경적인 관점을 배우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처음 들은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누가복음 24:11) 또 누가는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은 아테네 시민들이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비웃었습니다(When they heard Paul speak about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some laughed in contempt, 사도행전 17:32”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세상적인 관점(a worldly point of view)’에서 보면 십자가는 ‘foolish thing(어리석은 것)’에 불과합니다. 논리적으로 도무지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성경의 관점’을 이해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the power of God)’입니다. 

삶의 모든 이슈에 대하여 크리스천은 생각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제가 다윗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강한 인상을 받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7:9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나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항상 함께 있었고, 너를 위해 네 원수들을 물리쳐 주었다. 나는 너를 이 땅에 살았던 위대한 사람들만큼 유명하게 해 줄 것이다(Now I will make your name as famous as anyone who has ever lived on the earth).” 사람에게는 유명하게 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에게도 유명하게 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명하게 되는 과정과 방법이 다릅니다. 경쟁자를 이기고 그 자리에 앉음으로써 유명해지는 것은 크리스천의 방식이 아닙니다. 보스턴 지역에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대통령 상을 비롯해서 상이란 상은 다 받았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왜 저 사람이 상을 다 받느냐고 보스턴 한인사회를 잘 아는 어떤 분에게 물어봤습니다. 그 분이 하는 말이 “말도 마십시오. 그 사람은 자기와 경쟁 대상이 있으면 청와대에 그 사람을 모함하는 투서를 합니다.” 정말 이런 식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가 너를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사무엘하 7:9)”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윗은 유명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정말 우연히 일어났던 사건 하나가 다윗의 생애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과의 싸움으로 다윗은 단숨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좋은 대리석을 찾아 다니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 이탈리아)는 우연히 밭에 뒹굴고 있던 커다란 대리석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리석은 너무 커서 쓸모가 없다고 거들떠보지 않던 것을 미켈란젤로가 발견한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을 가지고 적장 골리앗을 노려보고 있는 ‘다윗 상’을 조각했습니다. 지금 이 ‘다윗 상’이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미술관에 있다고 하는데요. 사람들은 그 뛰어난 조각상을 보면서 성경에 나오는 다윗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다윗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윗은 세월이 가도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리더가 되고, 지도자가 되는 것도 크리스천의 생각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42절)”고 하셨습니다. 크리스천 중에서도 훌륭한 지도자가 나와야 하고, 훌륭한 정치인도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크리스천에게는 지도자가 되는 방법도 달라야 하고, 지도자에게 주어진 힘을 행사하는 방법도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3-44절) 여러분, 정말 이 말씀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servant)’이 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높여주실까요?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늘 섬김을 받으려고만 했지 ‘종’이 되어 섬겨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높여주시는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섬김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고,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삶’을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섬김의 삶’에 대한 어떤 것도 좋은 예(example)가 될 수 없습니다. ‘섬김의 삶’은 이런 것이라고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삶’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삶’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매슬로의 ‘인간의 욕구의 단계설’에서 본 것처럼, 누구나 섬김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데,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선언(宣言)하신 것입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새해가 되어 교회에서 제일 연세가 많으신 집사님 부부를 1월 한 달 동안 안내위원으로 주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 부부가 안내위원을 하면서 내내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남편 집사님이 저에게 와서 막 따졌습니다. “이 교회에는 우리 말고 집사가 없습니까? 어떻게 나이 많은 우리 부부를 1월 달에 안내위원을 시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건 아니지 않나요? 예수님께서 섬기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로,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의 삶’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삶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장면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요한복음 13장에 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 ‘섬김의 삶’의 핵심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의 삶’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발을 닦아주고, 스승이 제자의 발을 닦아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가요? 

이 말씀을 한번 들어 보세요. Dieter F. Uchtdorf(1940, 독일)란 사람의 말인데요. “As we lose ourselves in the service of others, we discover our own lives and our own happiness(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릴 때, 우리 자신의 삶과 행복을 발견한다).” 맞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내가 이 사람들의 스승인데?” 이런 생각을 하셨다면 제자들의 발을 닦아줄 수 있었을까요? ‘섬김의 삶’은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과 그를 시중드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누가복음 22:27) 섬김의 삶은 이런 것입니다.

셋째로, ‘섬기는 삶’에는 자기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내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I came to give my life as a ransom for many(45절)”고 하셨습니다. 자기 희생 없이 자기가 ‘섬기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때 기독교로 개종하려고까지 했던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Service without humiliation is selfishness and egotism(굴욕이 없는 섬김은 이기주의이고 자기 아집에 불과하다).” 진정한 섬김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섬김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의 삶’에는 굴욕이 따르고,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ransom(대속물, 몸값)’으로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희생이 있었기에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섬김의 삶’의 ‘화룡점정(火龍點睛)’은 자기 희생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섬김의 삶’은 온전한 섬김의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생각하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극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누구나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But among you it will be different. Whoever wants to be a leader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among you must be the slave of everyone else.” (43-44절)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말씀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정말 이 말씀대로 살면 누구든지 리더가 될 수 있고,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이제 우리의 ‘섬김의 삶’을 통해서 증명해야 한다.”


6/5/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For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요한복음 15:1-8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성경의 핵심적인 말씀을 가지고 시리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나눌 말씀은 요한복음 15:1-8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 설교를 ‘성령으로 난 사람’ 설교 시리즈의 연속편으로 생각하면서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처럼 크리스천의 삶에 실제적인 말씀이 또 있을까요?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원리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 가장 우리에게 필요한 실제적인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말씀 중에 눈에 띄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5절 말씀인데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는 말씀입니다. “나를 떠난다”는 말은 ‘apart from me’ 혹은 ‘without me’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잘려 나가면’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생각 없이 한 일들이 많은데? 그 일들은 어떻게 된 거지? 그 때도 일이 잘 되었던 것 같은데?” 제가 좋아하는 설교자 중에 찰스 스탠리(Charles Stanley, 1932)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아틀랜타에 있는 제일침례교회를 51년 간 담임하고, 지금은 명예 목사님으로 계시는 분입니다. ‘In Touch With Dr. Charles Stanley’라는 유명한 TV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분입니다. 찰스 스탠리는 건전한 신학 위에 대중의 언어로 설교하는 분으로 유명합니다. 이 분이 ‘The Wonderful Spirit Filled Life(성령충만한 놀라운 삶)’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은 나 없이도 조금은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나 없이는 아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예수님 없이 무슨 일을 하려고 시도한다면 내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도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없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떤 분들에게는 이 말씀이 좀 과격하게 들리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에게는 과장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비유(parable)’를 사용하셨습니다. 신기한 것은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비유’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기도 하고, 이솝과 같이 ‘우화(fables)’를 사용해서 사회를 풍자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예수님처럼 ‘비유’를 사용해서 ‘영적인 진리’를 알기 쉽게 말씀하신 분은 없습니다. 이솝의 정확한 이름은 아이소포스(Αἴσωπος)라고 합니다.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사람인데, 노예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의 우화는 주로 동물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읽고 난 후에 독자들에게 교훈을 얻도록 한 것이 특징입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는 영적인 진리를 쉽게 가르칠 수 있는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즉흥적인 이야기입니다. 삶의 주변에서 쉽게 접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소재로 해서 ‘영적인 진리’를 깨닫도록 한 것이 예수님의 비유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크리스천들)이 어떻게 하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지 말씀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정원사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포도나무의 가지다(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gardener.....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1절, 5절) 이후에 나오는 말씀은 이 말씀을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신 것으로 보면 됩니다. 이 짧은 말씀 속에 크리스천의 풍성한 삶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면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 내 제자인 것을 나타내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This is to my Father's glory, that you bear much fruit, showing yourselves to be my disciples).” (8절) 우리의 삶에 열리는 ‘열매’는 내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으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증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열매’가 없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열매’라고 하지 않고 ‘많은 열매(much fruit)’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많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 속에 ‘열매 맺는 삶의 두 가지 원리(原理)’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잘라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마다 아버지께서 잘라 내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깨끗하게 다듬으신다(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원사이신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그의 자녀들의 삶에서 불필요한 가지들을 잘라내는 일입니다. 정원을 관리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잘 압니다. 불필요한 가지들을 잘라줘야 꽃도 잘 피고, 열매도 잘 열립니다. 겨울이 지나고 가지에 물이 오르기 전 2-3월경에 불필요한 가지들을 잘라줍니다. 

얼마 전에 한국 뉴스에서 ‘닭발 가로수’라는 우스운 제목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시(市)에서 가로수들을 정비하는데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가지를 자르는 바람에 마치 ‘닭발’ 같이 흉측한 가로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마구잡이로 자르는 바람에 매년 6-7천 그루의 가로수들이 죽고 있다는 기사였습니다. 

탁월한 정원사이신 하나님에게는 이런 실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잘라내야 할 가지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시고 잘라 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열매 맺는데 정말 필요한 가지만 남게 됩니다. 불필요한 가지들을 잘라 내면 삶이 단순해집니다. 의미있는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삶의 단순성(the simplicity in life)’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의 말을 한번 들어 볼까요? “To be yourself in a world that is constantly trying to make you something else is the greatest accomplishment(끊임없이 당신을 당신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만들려고 하는 세상에서 당신 자신이 되는 것은 정말 위대한 성취이다).” 에머슨은 ‘삶의 단순성’이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안 후에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모두 버렸다고 고백한 바울은 자신의 삶이 단순해짐으로써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빌립보서 3:8).

그런데요. 정원사이신 하나님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우리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잘라내실까요? 오늘 말씀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해 준 말 때문에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3절)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의 거울’입니다. 그 거울에 매일 우리 자신을 비쳐보면서 나의 삶을 반성하면서 고쳐 나갑니다. 이 일을 어쩌다가 한번 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매일 반복합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 이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모두가 조용한 시간에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심으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평생 계속하셨습니다. 마지막 체포되던 밤에도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도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대로 사역의 방향을 바꾸었을지도 모른다고요. 바울이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race, and I have remained faithful, 디모데후서 4:7)” 이렇게 고백했을 때, 그가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것이 말씀과 기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쳐보았고,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내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먼저 잘라내는 것이 열매 맺는 삶의 비결입니다. 지금의 혼란하고 복잡한 삶을 계속한다면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삶을 단순하게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렇게 해야 나에게 정말 필요하고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계속 지속적으로 말씀과 기도로 여러분의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가십시오.

둘째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그냥 ‘포도나무’라고 하지 않고 ‘참 포도나무(the true vine)’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붙어 있으라는 말씀을 다양하게 설명하셨습니다.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4절)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5절)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7절) 어떻습니까? 이 말씀을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속에 들어와 계시는 것이라고 지난 주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포도나무로부터 ‘수액(水液, sap)’을 공급받습니다. 이 ‘수액’은 가지가 살기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은 그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편지에서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신다는 표현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표현을 자유자재로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그가 성령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意志)를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르면 우리는 평생 복음적인 믿음생활이 무엇인지 모르고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율법적인 믿음생활을 하게 됩니다. 복음적인 믿음생활에는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적인 믿음생활에는 책임과 의무만 있을 뿐,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가 그랬고, 바울이 예수님을 알기 전 바리새인으로 살아갈 때 그랬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도 복음적인 믿음생활을 모르면 그렇게 됩니다.

오스왈드 체임버스(Oswald Chambers, 1874-1917, 영국)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God does not expect us to imitate Jesus Christ; He expects us to allow the life of Jesus to be manifested in our moral flesh(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삶이 보여지도록 하는 것을 원하신다).” “The expression of Christian character is not good doing, but God-likeness. If the Spirit of God has transformed you within, you will exhibit Divine characteristics in your life, not good human character-istics . God's life in us expresses itself as God's life, not as human life trying to be godly(크리스천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성령께서 당신을 변화시키게 되면 당신은 인간의 선한 특징들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징들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인간의 삶이 그렇듯이 경건하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용어 하나 하나를 매우 신중하게 사용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Bear fruit”입니다. ‘베어(bear)’라는 말은 자연적인 성장을 통해서 식물이 열매를 맺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 경우 ‘프로듀스(produce)’라는 말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프로듀스’라는 말은 주로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할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자연히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서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입니다. 이 ‘열매’가 복음을 증거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으로, 세상에 끼치는 ‘선한 영향력(good influence)’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 크리스천의 삶의 모든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일이라면 예수님 없이도 가능합니다. 예수님 없이도 제품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는 일이라면 예수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잘 붙어 있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생명이 자연스럽게 우리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 맺는 삶의 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