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2

크리스천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Christians Think Differently

마가복음 10:42-45

신약성경의 핵심적인 말씀 시리즈 두 번째 설교는 “크리스천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이런 제목의 설교입니다. 본문 말씀은 마가복음 10:42-45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to serve others)’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에게 ‘섬김의 삶’은 단순히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매슬로(Abraham H. Maslow, 1908-1970)라는 미국의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Maslow's Hierarchy of Needs(매슬로의 욕구 단계설)’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위스콘신 대학을 졸업한후 콜롬비아 대학의 연구원을 거쳐 위스콘신, 브루클린, 보스턴에 있는 브랜다이스 등의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습니다. 그가 ‘Maslow's Hierarchy of Needs’를 처음 내 놓은 것이 1943년입니다. 그리고 1954년에 자기 주장을 약간 수정하여 지금의 이론을 완성했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론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가 ‘단계설’이란 말을 쓴 것은 욕구가 아래에서부터 위로 단계적으로 생겨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제일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인간의 욕구는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입니다. 먹을 음식이 있어야 하고, 옷이 있어야 하고, 잘 곳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 단계의 욕구는 ‘안전에 대한 욕구(Safety Needs)’입니다. 그 다음이 ‘애정과 소속의 욕구(Love and Belongingness Needs)’입니다. 친구와 가족, 그리고 자기가 소속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욕구입니다. 그 다음이 ‘자기 존중의 욕구(Self-esteem Needs)’ 단계입니다. 인정받고 싶어하고, 성공하고 싶어하고, 지위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권력에 대한 욕구가 생기는 단계입니다. 맨 위에 있는 단계는 ‘자아 실현의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명예에 대한 욕구가 생깁니다. 결론적으로 매슬로는 권력에 대한 욕구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로 본 것입니다. 

성경에 ‘고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민수기 16장). 그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에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고라’에게 모세와 그의 형 아론에 대하여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세와 아론과 같은 레위지파 사람인데, 왜 이 두 사람만 백성들에게 존경받고 지도자로 군림하는가?” 이것이 ‘고라’의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지내던 때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고라’의 행위를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라’를 심판하셨습니다. 고라의 반란으로 무려 14,950명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라’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지도자가 되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고, 자기 힘을 과시하고 싶은 기본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하고, 힘을 가지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이 다르고 힘을 행사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But among you it will be different).”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 1901-1978)라는 미국의 인류학자가 있습니다. 인류학(anthropology)의 초석을 놓은 분으로,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 배운다는 ‘The Theory of Imprinting(각인 이론)’으로 유명합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Children must be taught how to think, not what to think(어린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하는 지를 배워서는 안 되고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지를 배운다면 그 아이는 개성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지만, 어떻게 생각해야는 지를 배운다면 그 아이는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마가렛 미드의 이 말이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말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적인 관점(the biblical point of view)’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이사야 55:8-9) 하나님의 생각은 성경적인 관점을 배우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처음 들은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누가복음 24:11) 또 누가는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은 아테네 시민들이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비웃었습니다(When they heard Paul speak about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some laughed in contempt, 사도행전 17:32”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세상적인 관점(a worldly point of view)’에서 보면 십자가는 ‘foolish thing(어리석은 것)’에 불과합니다. 논리적으로 도무지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성경의 관점’을 이해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the power of God)’입니다. 

삶의 모든 이슈에 대하여 크리스천은 생각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제가 다윗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강한 인상을 받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7:9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나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항상 함께 있었고, 너를 위해 네 원수들을 물리쳐 주었다. 나는 너를 이 땅에 살았던 위대한 사람들만큼 유명하게 해 줄 것이다(Now I will make your name as famous as anyone who has ever lived on the earth).” 사람에게는 유명하게 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에게도 유명하게 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명하게 되는 과정과 방법이 다릅니다. 경쟁자를 이기고 그 자리에 앉음으로써 유명해지는 것은 크리스천의 방식이 아닙니다. 보스턴 지역에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대통령 상을 비롯해서 상이란 상은 다 받았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왜 저 사람이 상을 다 받느냐고 보스턴 한인사회를 잘 아는 어떤 분에게 물어봤습니다. 그 분이 하는 말이 “말도 마십시오. 그 사람은 자기와 경쟁 대상이 있으면 청와대에 그 사람을 모함하는 투서를 합니다.” 정말 이런 식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가 너를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사무엘하 7:9)”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윗은 유명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정말 우연히 일어났던 사건 하나가 다윗의 생애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과의 싸움으로 다윗은 단숨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좋은 대리석을 찾아 다니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 이탈리아)는 우연히 밭에 뒹굴고 있던 커다란 대리석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리석은 너무 커서 쓸모가 없다고 거들떠보지 않던 것을 미켈란젤로가 발견한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을 가지고 적장 골리앗을 노려보고 있는 ‘다윗 상’을 조각했습니다. 지금 이 ‘다윗 상’이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미술관에 있다고 하는데요. 사람들은 그 뛰어난 조각상을 보면서 성경에 나오는 다윗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다윗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윗은 세월이 가도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리더가 되고, 지도자가 되는 것도 크리스천의 생각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42절)”고 하셨습니다. 크리스천 중에서도 훌륭한 지도자가 나와야 하고, 훌륭한 정치인도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크리스천에게는 지도자가 되는 방법도 달라야 하고, 지도자에게 주어진 힘을 행사하는 방법도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3-44절) 여러분, 정말 이 말씀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servant)’이 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높여주실까요?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늘 섬김을 받으려고만 했지 ‘종’이 되어 섬겨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높여주시는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섬김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고,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삶’을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섬김의 삶’에 대한 어떤 것도 좋은 예(example)가 될 수 없습니다. ‘섬김의 삶’은 이런 것이라고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삶’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삶’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매슬로의 ‘인간의 욕구의 단계설’에서 본 것처럼, 누구나 섬김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데,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선언(宣言)하신 것입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새해가 되어 교회에서 제일 연세가 많으신 집사님 부부를 1월 한 달 동안 안내위원으로 주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 부부가 안내위원을 하면서 내내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남편 집사님이 저에게 와서 막 따졌습니다. “이 교회에는 우리 말고 집사가 없습니까? 어떻게 나이 많은 우리 부부를 1월 달에 안내위원을 시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건 아니지 않나요? 예수님께서 섬기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로,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의 삶’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삶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장면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요한복음 13장에 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 ‘섬김의 삶’의 핵심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의 삶’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발을 닦아주고, 스승이 제자의 발을 닦아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가요? 

이 말씀을 한번 들어 보세요. Dieter F. Uchtdorf(1940, 독일)란 사람의 말인데요. “As we lose ourselves in the service of others, we discover our own lives and our own happiness(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릴 때, 우리 자신의 삶과 행복을 발견한다).” 맞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내가 이 사람들의 스승인데?” 이런 생각을 하셨다면 제자들의 발을 닦아줄 수 있었을까요? ‘섬김의 삶’은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과 그를 시중드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누가복음 22:27) 섬김의 삶은 이런 것입니다.

셋째로, ‘섬기는 삶’에는 자기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내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I came to give my life as a ransom for many(45절)”고 하셨습니다. 자기 희생 없이 자기가 ‘섬기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때 기독교로 개종하려고까지 했던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Service without humiliation is selfishness and egotism(굴욕이 없는 섬김은 이기주의이고 자기 아집에 불과하다).” 진정한 섬김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섬김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의 삶’에는 굴욕이 따르고,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ransom(대속물, 몸값)’으로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희생이 있었기에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섬김의 삶’의 ‘화룡점정(火龍點睛)’은 자기 희생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섬김의 삶’은 온전한 섬김의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생각하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극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누구나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But among you it will be different. Whoever wants to be a leader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among you must be the slave of everyone else.” (43-44절)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말씀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정말 이 말씀대로 살면 누구든지 리더가 될 수 있고,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이제 우리의 ‘섬김의 삶’을 통해서 증명해야 한다.”


6/5/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For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요한복음 15:1-8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성경의 핵심적인 말씀을 가지고 시리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나눌 말씀은 요한복음 15:1-8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 설교를 ‘성령으로 난 사람’ 설교 시리즈의 연속편으로 생각하면서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처럼 크리스천의 삶에 실제적인 말씀이 또 있을까요?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원리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 가장 우리에게 필요한 실제적인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말씀 중에 눈에 띄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5절 말씀인데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는 말씀입니다. “나를 떠난다”는 말은 ‘apart from me’ 혹은 ‘without me’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잘려 나가면’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생각 없이 한 일들이 많은데? 그 일들은 어떻게 된 거지? 그 때도 일이 잘 되었던 것 같은데?” 제가 좋아하는 설교자 중에 찰스 스탠리(Charles Stanley, 1932)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아틀랜타에 있는 제일침례교회를 51년 간 담임하고, 지금은 명예 목사님으로 계시는 분입니다. ‘In Touch With Dr. Charles Stanley’라는 유명한 TV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분입니다. 찰스 스탠리는 건전한 신학 위에 대중의 언어로 설교하는 분으로 유명합니다. 이 분이 ‘The Wonderful Spirit Filled Life(성령충만한 놀라운 삶)’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은 나 없이도 조금은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나 없이는 아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예수님 없이 무슨 일을 하려고 시도한다면 내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도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없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떤 분들에게는 이 말씀이 좀 과격하게 들리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에게는 과장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비유(parable)’를 사용하셨습니다. 신기한 것은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비유’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기도 하고, 이솝과 같이 ‘우화(fables)’를 사용해서 사회를 풍자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예수님처럼 ‘비유’를 사용해서 ‘영적인 진리’를 알기 쉽게 말씀하신 분은 없습니다. 이솝의 정확한 이름은 아이소포스(Αἴσωπος)라고 합니다.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사람인데, 노예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의 우화는 주로 동물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읽고 난 후에 독자들에게 교훈을 얻도록 한 것이 특징입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는 영적인 진리를 쉽게 가르칠 수 있는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즉흥적인 이야기입니다. 삶의 주변에서 쉽게 접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소재로 해서 ‘영적인 진리’를 깨닫도록 한 것이 예수님의 비유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크리스천들)이 어떻게 하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지 말씀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정원사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포도나무의 가지다(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gardener.....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1절, 5절) 이후에 나오는 말씀은 이 말씀을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신 것으로 보면 됩니다. 이 짧은 말씀 속에 크리스천의 풍성한 삶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면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 내 제자인 것을 나타내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This is to my Father's glory, that you bear much fruit, showing yourselves to be my disciples).” (8절) 우리의 삶에 열리는 ‘열매’는 내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으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증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열매’가 없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열매’라고 하지 않고 ‘많은 열매(much fruit)’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많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 속에 ‘열매 맺는 삶의 두 가지 원리(原理)’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잘라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마다 아버지께서 잘라 내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깨끗하게 다듬으신다(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원사이신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그의 자녀들의 삶에서 불필요한 가지들을 잘라내는 일입니다. 정원을 관리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잘 압니다. 불필요한 가지들을 잘라줘야 꽃도 잘 피고, 열매도 잘 열립니다. 겨울이 지나고 가지에 물이 오르기 전 2-3월경에 불필요한 가지들을 잘라줍니다. 

얼마 전에 한국 뉴스에서 ‘닭발 가로수’라는 우스운 제목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시(市)에서 가로수들을 정비하는데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가지를 자르는 바람에 마치 ‘닭발’ 같이 흉측한 가로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마구잡이로 자르는 바람에 매년 6-7천 그루의 가로수들이 죽고 있다는 기사였습니다. 

탁월한 정원사이신 하나님에게는 이런 실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잘라내야 할 가지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시고 잘라 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열매 맺는데 정말 필요한 가지만 남게 됩니다. 불필요한 가지들을 잘라 내면 삶이 단순해집니다. 의미있는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삶의 단순성(the simplicity in life)’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의 말을 한번 들어 볼까요? “To be yourself in a world that is constantly trying to make you something else is the greatest accomplishment(끊임없이 당신을 당신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만들려고 하는 세상에서 당신 자신이 되는 것은 정말 위대한 성취이다).” 에머슨은 ‘삶의 단순성’이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안 후에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모두 버렸다고 고백한 바울은 자신의 삶이 단순해짐으로써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빌립보서 3:8).

그런데요. 정원사이신 하나님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우리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잘라내실까요? 오늘 말씀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해 준 말 때문에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3절)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의 거울’입니다. 그 거울에 매일 우리 자신을 비쳐보면서 나의 삶을 반성하면서 고쳐 나갑니다. 이 일을 어쩌다가 한번 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매일 반복합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 이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모두가 조용한 시간에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심으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평생 계속하셨습니다. 마지막 체포되던 밤에도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도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대로 사역의 방향을 바꾸었을지도 모른다고요. 바울이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race, and I have remained faithful, 디모데후서 4:7)” 이렇게 고백했을 때, 그가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것이 말씀과 기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쳐보았고,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내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먼저 잘라내는 것이 열매 맺는 삶의 비결입니다. 지금의 혼란하고 복잡한 삶을 계속한다면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삶을 단순하게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렇게 해야 나에게 정말 필요하고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계속 지속적으로 말씀과 기도로 여러분의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가십시오.

둘째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그냥 ‘포도나무’라고 하지 않고 ‘참 포도나무(the true vine)’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붙어 있으라는 말씀을 다양하게 설명하셨습니다.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4절)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5절)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7절) 어떻습니까? 이 말씀을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속에 들어와 계시는 것이라고 지난 주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포도나무로부터 ‘수액(水液, sap)’을 공급받습니다. 이 ‘수액’은 가지가 살기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은 그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편지에서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신다는 표현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표현을 자유자재로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그가 성령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意志)를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르면 우리는 평생 복음적인 믿음생활이 무엇인지 모르고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율법적인 믿음생활을 하게 됩니다. 복음적인 믿음생활에는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적인 믿음생활에는 책임과 의무만 있을 뿐,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가 그랬고, 바울이 예수님을 알기 전 바리새인으로 살아갈 때 그랬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도 복음적인 믿음생활을 모르면 그렇게 됩니다.

오스왈드 체임버스(Oswald Chambers, 1874-1917, 영국)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God does not expect us to imitate Jesus Christ; He expects us to allow the life of Jesus to be manifested in our moral flesh(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삶이 보여지도록 하는 것을 원하신다).” “The expression of Christian character is not good doing, but God-likeness. If the Spirit of God has transformed you within, you will exhibit Divine characteristics in your life, not good human character-istics . God's life in us expresses itself as God's life, not as human life trying to be godly(크리스천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성령께서 당신을 변화시키게 되면 당신은 인간의 선한 특징들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징들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인간의 삶이 그렇듯이 경건하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용어 하나 하나를 매우 신중하게 사용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Bear fruit”입니다. ‘베어(bear)’라는 말은 자연적인 성장을 통해서 식물이 열매를 맺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 경우 ‘프로듀스(produce)’라는 말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프로듀스’라는 말은 주로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할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자연히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서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입니다. 이 ‘열매’가 복음을 증거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으로, 세상에 끼치는 ‘선한 영향력(good influence)’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 크리스천의 삶의 모든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일이라면 예수님 없이도 가능합니다. 예수님 없이도 제품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는 일이라면 예수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잘 붙어 있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생명이 자연스럽게 우리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 맺는 삶의 원리입니다. 


5/29/2022 | 성령으로 난 사람(3)

눈을 주님께 돌려(IX) Turn Your Eyes Upon Jesus

로마서 8:1-9

성령의 다른 이름은 ‘예수님의 영(the Spirit of Jesus)’입니다(사도행전 16:7). 그러므로,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영과 마음(the mind of Christ)이 내 속에 들어와 있다는 말입니다(고린도전서 2:16).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lives in me, 갈라디아서 2:20)” 이 말씀은 바울이 자기는 예수님의 영과 마음을 가지고 산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신학용어에 ‘imputa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돌리기’ 혹은 ‘전가(轉嫁)’라는 뜻입니다. ‘전가’라는 말은 “책임을 전가하다”라는 말과 같이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신학에서는 부정적인 의미와 긍정적인 의미 모두 사용합니다. 화면을 한번 보세요. ‘전가의 신학(The Theology of Imputation)’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도표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의 ‘옛 자아(old sinful being)’가 십자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과 생각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새로운 자아(a new being)’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의 의미는 예수님의 영과 마음과 생각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천입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대로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우리는 말로 그 과정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놀라운 일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을 받았다” “성령을 체험했다” “성령 세례를 받았다” “성령 충만하다” 이런 말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마음과 생각이 자신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닫는 경우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베드로전서 2:21)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범(an example)’이 되시니까 그가 남긴 ‘발자취(steps)’를 잘 따라 살면 우리는 어느 환경에서나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멋진 말이지만, 예수님의 영과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하지 않고는 이 말씀을 따라 살기 어렵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성령의 법이 내 안에 ‘전가(imputation)’되었을 때 비로소 실천 가능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지난 설교에 이어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 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평안이 주어집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본문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죄의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죄의 본성이 바라는 일을 생각하지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성령이 바라시는 일을 생각합니다.” (5절) ‘those who are dominated by the sinful nature(죄 된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 감정이 끌리는 대로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감정이 얼마나 파괴적이며, 얼마나 위험한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인간의 감정의 출처를 ‘sinful nature’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감정을 따라 살게 되면 절대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those who are controlled by the Holy Spirit)’은 어떤 사람들을 말합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성령에 의해서 컨트롤을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을 기쁘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바울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입니다(But letting the Spirit control your mind leads to life and peace, 6절)”라고 썼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우리 크리스천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습니까? 이 말씀에 나오는 두 단어 ‘생명과 평안(life and peace)’,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들입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때에는 이 말처럼 좋은 말이 없습니다. 누구와 인사를 하든지 늘 “건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상대방에게 ‘life and peace’를 빌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life and peace’를 얻을 수 있는 지, 사람들은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릅니다. 운동을 하면 되나요? 많은 돈을 들여서 여행을 하면 얻을 수 있습니까? 놀랍게도 성경책에 이 두가지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나와 있습니다. 그 길은 성령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면 이 두가지가 주어진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지 한번 보실까요? 우리가 살다 보면 어떤 큰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실을 아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정했을 때는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반대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했을 경우에는 마음에 담대함과(요한일서 3:21) 평안이 주어집니다. 존 베버리(John Bevere)라는 영향력 있는 크리스천 작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When we invite the Holy Spirit into our decision-making process, he will always bear witness through the peace of Christ Jesus(우리의 결정 과정에 성령을 초대했을 때 성령께서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을 통해서 증언을 할 것입니다).”

둘째로, 성령은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 요한복음 14:17)’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바른 길을 갈 때 성령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갈 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에베소서 4:3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라(And do not bring sorrow to God's Holy Spirit by the way you live).”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때였습니다. 누가는 그 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이 아시아 지방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성령께서 막으셨기 때문에 바울과 그 일행은 브루기아(Phrygia)와 갈라디아(Galatia) 지방을 두루 다녔습니다. 그들은 무시아(Mysia) 지방 가까이 이르러 비두니아(Bithynia)로 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서 드로아(Troas)로 내려갔습니다.” (사도행전 16:6-8)

이런 말씀은 지도를 보면서 말씀을 들어야 이해가 됩니다. 바울과 실라는 아시아에서 복음 전하려고 했지만 성령께서 그들의 계획을 막으셨습니다. 두 사람은 성령께서 막으시는 것을 알고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시아의 북쪽에 있는 무시아 지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거기서 다시 북동쪽에 있는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예수의 영(the Spirit of Jesus)’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드로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는 유럽 선교의 꿈을 꾸게 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네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께서 우리의 계획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막는 이유는 우리가 세운 계획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계획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이 막으실 때 순종했습니다. 억지로 자기들의 계획을 추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모두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막으실 때는 다른 길을 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시아 선교를 막으신 하나님은 그대신 유럽 선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후에 바울은 그의 심정을 이렇게 썼습니다. “비록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큰 문이 내게 열려 있습니다(A wide door for effective [service] has opened to me, and there are many adversaries).” (고린도전서 16:9)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길이 막혀 그 일을 추진할 수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실 때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왜 자기들의 계획을 막으시는지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열어 주기 전에는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순종했습니다. 억지를 자기들의 계획을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두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계획을 추진하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그 일에 열매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계획보다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무산(霧散)되는 결과를 가져왔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유럽 선교의 길이 열리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민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막으실 때는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열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성령께서 나의 삶을 지배하시면 나는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 중심의 삶’을 영어로 ‘a Christ-Centered life’라고 합니다.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 중심의 삶’이 말처럼 쉽지 않거든요?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 중심적인 삶(a Self-Centered Life)’을 살려고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려고 해서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 나의 이름으로 보내실 진리의 성령이신 보혜사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4:26) “그분은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가 들은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될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진리의 성령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려 주심으로써 나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6:13-14) 이 말씀들이 주는 메시지는 성령께서 나를 지배하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학교에서 ‘Our Core Values(우리의 핵심 가치)’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To challenge students to grow in their relationship with Christ, To teach Christ-centered character(학생들을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도록 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성품을 가르치고)” 아마도 어느 기독교 학교에서 이런 핵심 가치를 내세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스도 중심의 성품과 그리스도 중심의 삶은 교사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은 철저하게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입니다. 존 코라피(John Corapi)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형성합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끝으로, 드릴 말씀은 어마 무시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Those who do not have the Spirit of Christ living in them do not belong to him at all, 9절).” 같은 말씀이 14절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All who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are children of God).”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영입니다. 우리는 그 성령을 의지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로마서 8:15)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영’을 NASB 성경은 ‘a spirit of adoption as sons’라고 번역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는 영입니다. 왜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지, 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고,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셔야 하는지 그 이유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5/22/2022 | 성령으로 난 사람(2)

눈을 주님께 돌려(VIII) Turn Your Eyes Upon Jesus

요한복음 14:15-21

여러분,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는 것을 아세요? 바울이 북부 지방을 다니면서 전도하다가 에베소에 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몇 사람의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이 제자들에게 “여러분들이 믿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놀랍게도 “우리는 성령이라는 말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요한의 세례만 받았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사도행전 19:2). 

이 말씀은 우리가 요한의 세례만 알아서는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 세례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 아닙니까? 보세요. 요한의 세례 밖에 몰랐던 아볼로는 무명(無名)의 부부를 통해서 성령 세례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았던 에베소의 제자들도 바울을 통하여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사도행전 19:4-5).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성령 세례를 받은 아볼로의 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볼로는 그 지방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유대인들과 열정적으로 토론을 하여 그들의 주장을 물리쳤으며, 성경을 이용해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했습니다.” (사도행전 18:27-28)

성령을 받지 않고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도 교회 봉사를 할 수 있고, 성령을 받지 않고도 교회에서 직책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않으면 삶이 변화되지 않고, 믿음생활에 기쁨이 없고 만족이 없습니다.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갈라디아서 2:20).”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평생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다시 올 것이다(18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성령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유대나라에 사셨던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살아 계시다고 해도 예수님은 미국 보스턴에 살고 있는 우리와 함께 계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혜사’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으면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Advocate①, who will never leave you. / ①Or Comforter, or Encourager, or Counselor. Greek reads Paraclete; also in 14.26 He is the Holy Spirit, who leads into all truth. The world cannot receive him, because it isn't looking for him and doesn't recognize him. But you know him, because he lives with you now and later will be in you.” (16-17절) ‘보혜사(保惠師)’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라는 말을 한자로 음역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를 한자로 음역하면 ‘나성(羅城)’이 되고, ‘프랑스(France)’를 한자로 음역하면 ‘불란서(佛蘭西)’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요청해서 “another Advocate who will never leave you(너희를 떠나지 않는 다른 Advocate를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른’이란 말은 ‘another’라는 뜻입니다. 그리스 말로는 ‘알로스(ἀλλοϛ)’라고 하는데요. 이 말은 ‘똑 같은 두 가지 중 다른 하나’를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보혜사’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입니다. 유일한 차이는, 예수님께서 보내 주실 ‘보혜사 성령’은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요한복음 16:7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But in fact, it is best for you that I go away, because if I don't, the Advocate won't come. If I do go away, then I will send him to you).”

‘성령’을 그리스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paraclete(파라클리트)’입니다. ‘파라(para)’는 ‘옆에(beside)’라는 뜻입니다. 뒤에 붙은 ‘클리트(clete)’는 ‘부르다(to call)’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옆에 서 있도록 부르는 분’입니다. 법정에서는 우리 옆에 변호사가 서서 우리를 변호해 줍니다. 성령이 바로 그런 분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파라클레토스’는 ‘Advocate(보혜사, 변호사)’ ‘Comforter(위로자)’ ‘Encourager(격려자)’ ‘Counselor(상담자)’ ‘Helper(돕는 사람)’라는 뜻입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은 ‘예수님의 영(the Spirit of Jesus)’이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6:7).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정신이 내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고린도전서 2:16).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lives in me, 갈라디아서 2:20)” 이 말씀은 바울이 자기는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산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천입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우리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들어오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래 전에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92-1983, 네덜란드)을 설교 시간에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분입니다. 이 분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황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를 전파했던 분입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Trying to do the Lord’s work in your own strength is the most confusing, exhausting, and tedious of all work...... But when you a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then the ministry of Jesus just flow out of you(주님의 일을 당신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것은 다른 어떤 일 보다 어렵고, 피곤하고, 지루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예수님의 사역은 자연스럽게 당신으로부터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십니까? 

성경에 이런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충만하여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사십 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He was led by the Spirit in the wilderness, where he was tempted by the devil for forty days).” (누가복음 4:1-2)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철저하게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No one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calls Jesus accursed, and no one can say that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고린도전서 12:3, NKJV) 성령은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게 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해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참으로 복되구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마태복음 16:16, 17)

둘째로,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gifts)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은 모두 영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성령을 받았습니다.......성령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에 속한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것들이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런 것들은 영적으로 식별되는 것이므로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런 것들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12, 14)

이 말씀 속에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확실하게 나와 있습니다. 성경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 말씀 속에 ‘하나님의 감동(God’s inspiration)’이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 말씀 속에 하나님의 ‘숨(breath)’ 하나님의 ‘영(spirit)’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도움이 없이 어떻게 성경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표면적인 뜻은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말씀 속에 들어 있는 깊은 영적인 의미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막히게 됩니다. 

셋째로, 성령을 받아야 올바른 기도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늘 기도하고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간구하십시오(Pray in the Spirit at all times and on every occasion).” (에베소서 6:18)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기적인 생각과 욕심을 따라 기도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에 응답이 없고 능력이 따르지 않는 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아시지요?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로마서 8:26) 바울은 우리가 가진 많은 연약함(weaknesses) 중에 무엇을 위해 기도할지 모르는 연약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하는 기도를 하지 않고 엉뚱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성령께서 아시고 도와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로,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의 일을 올바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말하면, 성령이 주시는 능력을 받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Then speak as though God himself were speaking through you. Do you have the gift of helping others? Do it with all the strength and energy that God supplies. Then everything you do will bring glory to God through Jesus Christ.” (베드로전서 4:11) 설교도, 남을 도와주는 것도 모두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해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영광을 받게 됩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1834-1892, 영국)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Without the Spirit of God, we can do nothing. We are as ships without wind. We are useless(우리는 하나님의 성령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람이 없는 배와 같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바람 없이는) 아무 쓸모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두가지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합니다. 성령이 처음으로 임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하는 자리였습니다. 성경에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사도행전 1:1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1:13)?”고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성령을 받고 싶은, 또 성령께서 내 삶을 지배하시기를 원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We are witnesses of these things and so is the Holy Spirit, who is given by God to those who obey him).” (사도행전 5:32) 정말 여러분이 이 말씀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을 깨우쳐 주실 때, 은혜를 주실 때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도록 하십시오.

 


5/15/2022 | 성령으로 난 사람(1)

눈을 주님께 돌려(VII) Turn Your Eyes Upon Jesus

요한복음 3:1-8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데에 두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니고데모는 자기가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 자기가 예수님께 가지고 온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조용한 시간에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과 진지한 대화를 하고 싶었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와 있는 제한된 자료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에서 알아주는 랍비였습니다. ‘랍비(Rabbi)’는 ‘선생’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 말로 학문과 지혜를 가진 사람들에게 붙여주는 칭호입니다. 예수님에게도 ‘랍비’라는 칭호가 붙어 있었습니다(요한복음 4:31, 9:2, 11:8. 마태복음 26:25)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외에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요한복음 1:38, 49, 3:2). 니고데모도 예수님께 ‘랍비’라고 불렀습니다(요한복음 3:2). 니고데모는 71명으로 구성된 ‘공의회(Sanhedrin)’의 의회원이었습니다. 이 직은 단순히 명예직이 아니라 최고의 권위를 가진 유대 사회의 실질적인 ‘rulers’입니다. 니고데모는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고, 불의한 일을 참지 못하는 정의감이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요한복음 7:50). 

중요한 것은 그가 바리새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3:1). 이 말은 그가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문자 하나까지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바울도 바리새인이었습니다(빌립보서 3:5). 바울도 스승 가말리엘 밑에서 합리적인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율법을 신봉했던 유대교의 체계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보자마자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아셨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문제를 모두 알고 계시는 마당에, 하나님과 본질 상 같은 분이신(빌립보서 2:6)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알고 계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으로서 철저한 율법 교육을 받았고, 율법을 지켜왔던 니모데모였지만, 삶의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는 자신이 따르는 율법의 조항들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지금 네가 가진 문제는 네가 거듭나야만 해결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assure you and most solemnly say to you, unless a person is born again [reborn from above—spiritually transformed, renewed, sanctified], he cannot [ever] see and experience the kingdom of God.”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다”는 말은 믿음 생활의 가장 높은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너의 답답함을 잘 알고 있다. 네가 기쁨을 얻고 만족함을 얻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즉 네가 영적으로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성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니고데모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생전 처음 들어본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뱃 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올 수가 있습니까?” 니고데모는 이렇게 묻습니다. 평생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을 실천해왔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공의회의 의회원이었지만, 니고데모는 영적으로는 초보적인,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는 그의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영적으로는 성령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에 놀라지 마라. 바람은 제 마음대로 부는 법이다. 너는 바람 부는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그 바람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도 이와 같다.”(6-7절)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읽어 볼까요? “Humans can reproduce only human life, but the Holy Spirit gives birth to spiritual life. So don't be surprised when I say, `You must be born again.”

크리스천의 삶을 이해하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말씀이 있을까요? 크리스천으로 사는 사람치고 하나님의 뜻 대로 살아봐야 되겠다고 결심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심을 해도 매번 실패하거든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잘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거나 새로워지는 것은 사람의 결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spiritual life(영적인 삶)’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진리를 ‘바람’에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성령’이라는 말과 ‘바람’이라는 말이 어원(語源)이 같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말로는 ‘루아흐(רוּחַ)’라는 말이고 그리스 말로는 ‘프뉴마(πνεῦμα)’라는 말입니다. ‘바람’ ‘숨’ ‘호흡’ ‘생명’ ‘영’ ‘성령’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람이 부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어디서부터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없는 것처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도 그 과정을 모두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람이 부는 것을 볼 수는 없지만, 바람이 불고 지나간 흔적은 볼 수 있습니다. 맞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도 흔적을 남깁니다. 나쁜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착하고, 선하고, 좋은 흔적을 남깁니다. 어떤 때는 드라마틱한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바울 같은 사람은 전에는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이었는데,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이 하도 급진적(radical)이고, 드라마틱해서 그 당시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는 “바울을 어떻게 믿느냐?” “그 사람 때문에 잡혀간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하면서 바울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사도행전 9:20-22, 26). 

갈라디아서 5:22-23에 보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맺는 열매들이 나와 있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자비와 착함과 성실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런 것들을 금지할 율법이 없습니다(There is no law against these things., NLT).” 이 열매들 중에 율법에서 금지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열매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에서 권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열매들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남기는 흔적들입니다.

성령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첫째로, 성령을 체험하게 되면 ‘능력(power)’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생각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성령에 대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게 되면(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높이게 되고 예수님 중심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에게 능력이 주어진다면,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But you will receive power and ability when the Holy Spirit comes upon you; and you will be My witnesses [to tell people about Me] both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even to the ends of the earth., Amplified Bible).” (사도행전 1:8)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 어디에도 그 외에 다른 목적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성령의 능력을 돈으로 살려고 했다가 망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사도행전 8:20). 사마리아에 살고 있던 시몬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gifts)’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이 하나님의 능력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능력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능력은 ‘내 것’이 됩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대로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성령의 능력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인식한다면 그 선물은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고, 그 선물을 주신 분의 생각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둘째로, 성령에 대한 잘못된 오해는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말을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 혹은 흥분 상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때로 성령께서 나를 지배하실 때 감정적인 변화가 따라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의 변화가 반드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찬양 집회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 부흥회에 참석했을 때 종종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집회 장소에 뜨거운 열기가 가득하고, 흥분의 도가니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을 성령충만과 혼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셋째로, 성령을 무슨 ‘원리(principle)’나 ‘원칙’ 혹은 어떤 ‘정신(spirit)’ 같은 비인격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로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경향이 많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인격(personality)’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그의 인격이 존중을 받을 때 기뻐하기도 하고, 근심하기도 합니다(에베소서 4:30). 성령을 인칭 대명사로 표시할 때 대문자 ‘Him’으로 표시합니다. 이 사실 역시 성령이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우리가 성령과 관계를 맺을 때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성령의 인도를 기꺼이 받고, 순종함으로써 성령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넷째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대하여 목소리가 크고, 고집이 세고, 자기 주장이 강하고, 대화가 잘 되지 않고,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고, 가까이하기 부담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잘못된 오해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크리스천으로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날씨가 더울 때 싱그러운 바람이 불면 얼마나 시원하고 기분이 좋습니까? 성령이라는 말과 바람이라는 말이 같은 말에서 나왔다고 했잖아요? 성령의 충만한 사람은 싱그러운 바람과 같아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의 성령께서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For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ver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고린도후서 3:17)

이 말씀을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성령이 계시지 않는 곳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성령은 모든 얽매인 것들을 풀어줍니다. 맞습니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명예에 얽매였습니까? 권력에 얽매였습니까? 돈에 얽매였습니까? 무슨 업적을 쌓는 일에 얽매였습니까? 예수님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의 말을 따르면 내 제자가 되고,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31-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영(성령)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되면, 우리는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제가 좋아하는 데이비드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 1813-1873)의 말을 나누려고 합니다. “God, send me anywhere, only go with me. Lay any burden on me, only sustain me. And sever any ties in my heart except the tie that binds my heart to Yours(하나님, 저와 함께만 가신다면 어느 곳에나 저를 보내 주십시오. 오직 저를 지탱할 수 있게만 해 주신다면 어떤 짐이라도 저게 지우십시오. 그리고 저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에 묶고 있는 끈 외에는 어떤 끈도 끊어주십시오).” 우리는 리빙스톤에 대하여 많은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진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디에도 얽매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참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고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