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2021 | 아테네 설교

부활절이 지나고(17)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17:22-28

오늘 말씀은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 중에 아테네 시민들에게 설교한 내용입니다. 제2차 선교여행은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다소, 더베, 루스드라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 드로아를 거쳐 빌립보, 데살로니카, 베뢰아, 아테네, 고린도, 에베소, 예루살렘을 거쳐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습니다. 그 때가 대략 서기 50년 경으로 생각됩니다. 제2차 선교여행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최초로 유럽에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을 읽을 때마다 한 사람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지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생명을 주께서 내게 맡기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But my life is worth nothing to me unless I use it for finishing the work assigned me by the Lord Jesus — the work of telling others the Good News about the wonderful grace of God.” (사도행전 20:24)

바울은 자신이 복음에 대하여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씀이 로마서 1장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I have a great sense of obligation to people in both the civilized world and the rest of the world①, to the educated and uneducated alike(나는 문명 세계의 사람들이나 그 밖의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큰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 ①Greek to Greeks and barbarians 그는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하고, 마지막으로 로마에까지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이유였습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금방 모든 일이 잘 해결되면 로마교회의 파송을 받아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로마서 15:24, 28). 

우리 생각이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을지 몰라도 그 대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제가 1983년에 미국에 이민자의 신분으로 들어와서 지금까지 지내오는 동안 제가 가지고 있었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한동안 많이 절망했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이런 생각을 주셨습니다. “너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대신 나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이 한마디 말씀으로 저의 마음은 회복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한 것은 서기 50년경이었습니다. 빌립보, 데살로니카, 베뢰아를 거쳐 오면서 같이 동행하던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남겨 두고 혼자 아테네에 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는 동안 아테네 시내를 돌아보았습니다. 아테네의 역사는 3,000년이 넘을 정도로 오래 된 철학자들의 고향이었습니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Socrates, 469-399BC), 페리클레스(Pericles, 495-429BC), 소포클레스(Sophokles, 497-406BC) 등 쟁쟁한 위인들을 배출했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Academia)’가 아테네에 있고, 그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BC)가 세운 ‘리케이온(Lykeion)’도 아테네에 있습니다. 일종의 체육관이자 학교였고, 공공 모임 장소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아테네의 중심에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는 언덕이 있는데, 그 중앙에 ‘아테나’ 여신을 모시는 ‘파르테논(Parthenon, BC 432년에 완공)’ 신전이 서 있습니다. 

아테네 시내를 돌아본 바울은 수많은 신상(神像)들을 보면서 마음에 분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이 역사적인 도시의 시민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안타까운 생각때문에 마음 속에 일어나는 감정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바울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이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왜 진리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날마다 토론을 벌이면서 진리의 하나님을 찾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신상 밑에 새겨 있는 신상들의 이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상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To An Unknown God, ΑΓΝΩΣΤΩ ΘΕΩ)’라고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수많은 신들을 섬기면서도 혹시라도 우리가 모르는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런 신상을 만들어 놓고 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서 유대인들과 그리스인 신자들(the God-fearing Greeks)과 매일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 토론에서 바울은 “왜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을 소개하지 않습니까?”라고 문제를 제기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만나는 사람들과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은 에피큐리안 철학자들과 스토익 철학자들(Epicurean and Stoic philosophers)과도 토론을 벌였습니다. 누가는 그 때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에 대한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했습니다(사도행전 17:18). 에피큐리안들이나 스토익 철학자들 모두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에피큐리안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했고, 스토익 철학자들은 마음의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이 행복인데, 그러기 위해서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바울은 진정한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오는 것이라고 그들과 토론을 벌인 것입니다.

토론에서 절대로 밀리지 않는 바울을 보면서 에피큐리안들과 스토익 철학자들은 바울을 가리켜 “What's this babbler trying to say with these strange ideas he's picked up(18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이 말쟁이(수다쟁이)가 말도 안 되는 문제를 가지고 와서 지껄여 대는 거야?” 이런 말이 되겠네요.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18절) 이 사람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the Areopagus)’ 광장으로 데리고 갑니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바울의 주장은 ‘무척 낯설고 새로운 것(some startling and strange things)’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명한 바울의 ‘아테네 설교’가 시작됩니다. 바울의 ‘아테네 설교’는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친근감을 표현하면서 자기가 할 이야기는 아테네 시민들과 ‘연관성(relevancy)’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보니 여러분들은 매우 종교심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시내를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가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새겨진 신상을 보았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23절) 이 말에 아테네 시민들은 상당히 호감을 가지고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상대방과 아무 상관이 없는 말이라면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가 마음을 열도록 접근하신 방법은 “나에게 물을 좀 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가 시작되어 마침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있다는 말씀으로 연결됩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그런 물이 있다면 저에게 주십시오(요한복음 4:15)”라고 오히려 예수님에게 요청합니다. 사도행전 18장에는 바울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가까워진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침, 그들의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과 함께 묵으면서 그들과 같이 일했습니다. 천막 만드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3) 그들은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직업 이야기를 통해서 마음이 서로 열렸을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손으로 만든 신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이 설교를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레오바고’ 광장은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는 아테나 여신을 섬기는 웅장하고 화려한 파르테논 신전이 서 있습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신을 섬기는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 신전 앞에서 키가 작고 왜소한 체격의 한 유대인이 감히 신전과 아테나 여신을 향해서 도발(挑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터키에 성지 순례를 갔을 때, 미국에서 간 몇 사람들과 한국에서 온 분들이 한 팀이 되었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한 야외 극장을 보았습니다. 약 1/3 정도는 파괴된 상태로 있었지만, 상당한 규모의 극장이었습니다. 어떻게 설계를 했는지 음향이 마치 마이크를 댄 것처럼 들렸습니다. 이곳에서 에베소 시민들이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는 위대하다(사도행전 19:28)!” 하고 외쳤을 때 그 소리가 얼마나 컸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속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이 극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터키는 이슬람 국가이고 여전히 타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찬양을 시작할 때는 저의 목소리도 떨리고 저의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괜찮아져서 끝까지 찬양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셋째로, 바울은 하나님은 누구나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27절). 우리의 삶 속에 어느 것 하나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BC 6세기에 살았던 그리스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의 시를 인용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exist).” (28절) 아테네 시민 여러분의 삶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바울은 BC 3세기에 살았던 그리스 시인 아라투스(Aratus)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28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많은 신상들처럼, 하나님은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 어디서 이런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았을까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할 때 배웠을까요? 아니면 고향 다소에서 은둔하고 있을 때 이런 소양을 길렀을까요? 언제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의 인문학적인 소양이 복음을 전파하는데 크게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성경만 알면 돼!" 하면서 그 밖의 것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특별히 지금 우리시대에는 인문학적인 소양이 더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그 밖의 소양들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지금 그런 소양들을 길러 놓으면 언젠가는 그것들이 복음을 전하고 설명하는데 요긴하게 쓰일 때가 반드시 옵니다.

넷째로,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서나 온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30절) 아테네 시민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신들이 세계에서 최고의 시민들이라는 지적인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아테네 시민들에게 바울은 과거 하나님을 몰라 우상을 섬겼던 삶을 회개하라고,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라고 촉구합니다.

다섯째로, 지금까지 아테네 시민들은 숨을 죽이고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두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한 사람을 시켜 온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이에게 그 증거를 보이셨습니다(31절)”라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면서 예수님이 ‘심판의 주님’이시라는 증거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했을 때, 결국 사달이 났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테네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변해 바울을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부활하셨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고린도전서 1:23) 여기서 이방인이란 주로 그리스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철학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nonsense’였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당신 말을 다시 들어보겠다고 하면서 ‘아레오바고’를 떠났습니다.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에 나오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은 ‘nonsense’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으면 기독교는 인본주의적인 종교가 되고 맙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를 믿고 받아들일 때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가 됩니다. 부활의 메시지 때문에 아테네 시민들은 냉소적으로 변했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Dionysius)와 다마리(Damaris), 그리고, 몇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날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아테네 시내에 다마리스의 이름을 딴 "Odos Damareos" 거리가 있다고 합니다. 다마리스는 평생 자선사업에 힘썼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박해시대에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그녀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좋겠지만, 어떤 때는 다수가 아니라 소수가 귀한 때가 있습니다. 바울의 아테네 선교가 그런 경우입니다.


8/8/2021 | 예루살렘 회의

부활절이 지나고(16)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15:1-6

오늘 설교의 소제목은 ‘예루살렘 회의’입니다. 예루살렘에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모여 중요한 문제를 논의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모두 참석했고, 바울과 바나바가 참석했고요. 문제를 제기한 바리새파 출신 신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제 생각 같아서는 이 회의를 ‘예루살렘 공의회(The Council of Jerusalem)’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데, 교회 역사가들은 서기 325년에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니케아(Nicaea)’에서 열린 회의를 ‘제1차 니케아 공의회(The First Council of Nicaea)’라고 합니다. ‘니케아’는 지금 터키에 있는 ‘이즈니크(Iznik)’입니다.

여러분, ‘니케아 공의회’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이 공의회를 주최한 사람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74-337) 황제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서기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한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제국의 종교가 된 기독교 안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통치자의 입장에서 이를 하나로 통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한 것입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다룬 중요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the divine nature)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the human nature)에는 문제가 없으나 아리우스(Arius, 256-336)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아리우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아리우스는 키가 크고 군살이 없는 몸매에, 준수한 용모와 공손한 말투를 썼고, 여자들은 그의 정중한 예의와 금욕적인 외모에 감동했고, 남자들은 그의 지적 탁월함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리우스는 안디옥에서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아리우스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은 늘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으며, 아들은 창조물입니다. 그가 아버지와 같지도 않고 원래 그는 아버지의 진정한 말씀이나 진정한 지혜가 아니며, 하나님이 만든 하나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로써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냥 말씀과 지혜 자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아들에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는 말씀이 아버지를 정확하고 완벽하게 알지도 못하며, 그를 제대로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리우스의 이런 주장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폭 넓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대하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정통신앙을 변호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역시 서기 300년경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로부터 크리스천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고, 철학과 신학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청년시절에 종종 광야로 나가 수도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말씀과 엄격한 규율과 삶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타나시우스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의 논리가 치밀했거나, 그의 스타일이 우아했거나, 정치적 술수에 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기의 신념과 신앙에 따라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철저한 신앙생활, 사람들 속에 뿌리박은 신념, 그의 강력한 의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원칙 등이 아타나시우스를 누구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서기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 모두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했습니다.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에서 온 감독들이었고,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교회에서는 6명만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회의 장소인 니케아까지 가는 길이 멀고, 또 그리스어를 잘 몰라 참석을 꺼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318명 중에 알렉산더 감독을 비롯해서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감독들이 약 2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감독들도 이와 비슷하게 약 28명 정도였고, 나머지 감독들은 대부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양측이 잘 타협하겠지!” 하면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합니다. 그 때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더 감독의 보좌관 자격으로 공의회에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아리우스는 장로였기 때문에 공의회에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달에 걸쳐 치열한 논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아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했던 감독들이 차츰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에 가담하게 되어 투표에 붙인 결과 2명의 감독을 제외한 316명의 감독들이 아리우스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쪽에 투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감독들은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를 발표합니다. 이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아타나시우스였습니다. “We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 Son of God, begotten from the Father before all ages, God from God,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of the same essence as the Father.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영원 전에 성부에게서 태어난, 신 중의 신이며 빛 중의 빛이고, 참 신 중의 참 신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출생되었으며,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입니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니케아 공의회의 진행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그 회의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과를 보면서 “만약 그 회의에 언변이 뛰어났던 아리우스가 참석했더라면 회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그 회의에서 아리우스가 자기 주장을 조리 있게 설명해서 감독들을 설득했더라면, 회의 결과가 뒤집혔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지금과 다른 신앙을 고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은 서기 1세기의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한 회의에 대한 말씀입니다. 저는 이 회의를 생각하면서 ‘니케아 공의회’를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예루살렘 회의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이 회의의 안건은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가르쳐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안디옥 교회에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신자 몇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안디옥 교회 소식이 전해졌지만, 바리새파 출신이었던 이 사람들은 안디옥 교회에 이방인들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매우 불편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의 그런 행동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다른 말로 하면, 이방인으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신자들의 눈에는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식사하는 것도 못마땅하고, 그들의 옷차림과 말투도 못마땅했습니다. 저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저런 사람들을 어떻게 형제로, 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런 사람들에게는 먼저 율법 교육부터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문제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문의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요.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베니게와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가면서 유대인 신자들에게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야기를 전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모든 형제들이 크게 기뻐했다고 기록했습니다(3절).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급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누가는 필요한 것 같지 않은 이런 이야기를 기록했을까요? 누가가 이런 이야기를 기록한 이유는 지금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방인 선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베니게와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신자들(크리스천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기뻐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해외에 살고 있는 크리스천들의 ‘열린 마음(open mind)’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국을 떠나 이곳 보스턴에 와서 사시는 여러분들, 그리고 유학생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은 열린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이 열린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조국을 위해서, 그리고 남북통일을 위해서 크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이 말씀을 통해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이 참석할 예루살렘 회의에 대한 전망(展望)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 회의에서는 이방인 선교에 대한 희망적인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는 사도들과 장로들과 온 교회의 환영을 받았습니다(4절). 이 말씀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고 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드디어 예루살렘 회의가 열렸습니다. 먼저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 안디옥 교회의 사역을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고했습니다. 두 사람의 보고가 끝나자 바리새파 출신 신자들은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토론(a long discussion)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교회를 세우겠다(마태복음 16:18)”라고 약속한 사람 아닙니까? 베드로의 존재감과 무게는 사도들 중 단연 최고였습니다. 여러분,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로 모두 피난을 갔는데, 왜 예루살렘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견딜 수 있었을까요? 예루살렘 교회에 대표적인 지도자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베드로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의 동생 야고보이고,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제자 요한입니다. 갈라디아서 2:9에 보면 ‘James, Peter, and John, who were known as pillars of the church(교회의 기둥으로 알려진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런 지도자들의 영향력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이 쉽사리 예루살렘 교회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중에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뒤를 이어 야고보가 베드로의 말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발언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와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신다(9절).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이방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우리 사도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 용서받아야 할 죄인들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베드로는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신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찌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모두 질 수 없었던 짐을 이방인 신자들에게 지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려 하십니까?” (10절) 베드로의 말을 듣고 그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잠잠해졌습니다(12절). 더 이상 어떤 반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포석을 깐다’ 혹은 ‘복선을 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으로 있을 일들을 대비해서 미리 조금씩 힌트를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복선을 까는 데 천재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선교에 처음부터 마음이 열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몇 차례에 걸쳐 베드로로 하여금 이방인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경험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경험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포석을 깔아 두신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보자기 환상(a vision of a large sheet)’과 이어지는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Cornelius, a Roman centurion)의 집을 방문했던 일입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내가 왜 이방 사람의 집을 방문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고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를 안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도행전 10:34) 이 모든 일들은 이방인 선교를 위한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깔아 놓으신 정교한 포석이었습니다.


8/1/2021 | 교회의 모델 안디옥 교회

부활절이 지나고(15)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13:1-3

오늘은 이방인 지역에 최초로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안디옥 교회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이유는 누가 자신이 안디옥 교회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의 지성인이었고, 역사 의식이 뛰어났던 누가는 안디옥 교회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생생하게 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디옥(Antioch)’은 시리아(Syria)에 있는 안디옥을 말합니다. 그 당시에는 시리아에 속해 있었지만, 현재는 터키 영토에 속해 있습니다. 안디옥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그 당시 주요 교통 수단이었던 배를 통한 이동(移動)이 용이했던 도시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안디옥은 당시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세계의 3대 도시로 이름을 날렸다고 합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안디옥은 지정학적인 위치상 그리스(헬라) 문화와 동양의 문화가 서로 교차하는 도시였다는 것입니다.

이 안디옥에 박해를 피해 온 많은 크리스천 디아스포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 이런 사실들을 확인할 때,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치밀하게 계획하신 일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주 전에 하나님의 관심은 ‘모이는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교회를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에 흩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안디옥 교회를 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outpost)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열왕기하 19:31, 이사야 9:7, 37:32)”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The zeal of the LORD Almighty will accomplish this(NIV)” 혹은 “The passionate commitment of the Lord of Heaven’s Armies will make this happen(NL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면 그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열심을 가지고 하시는 일이라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교회를 ‘흩으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열심을 가지고 추진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열심이 성취되어 나가는 과정을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한번 돌아보세요. 예루살렘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각 사람이 필요에 따라 물건을 사용했습니다(사도행전 4:32, 34). 그들은 날마다 같이 모였습니다. 박해가 없던 때는 성전 뜰에 모였습니다(사도행전 2:36). 집집마다 서로 돌아가면서 식사를 하고, 주님의 성만찬을 나누기도 했습니다(사도행전 2:46). 그 공동체 안에 끈끈한 ‘연대감(solidarity)’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박해를 통해 이 공동체를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흩어진 주님의 제자들은 어디든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안디옥에 있는 크리스천들이 그리스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를 파견해서 안디옥 교회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고 계신 것을 알고, 고향 다소에 은둔해 있는 사울을 데리고 안디옥 교회로 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일년 동안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킵니다. 그 때 이 안디옥 교회 사람들에게 붙은 이름이 ‘크리스천(Christians)’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다섯 명의 지도자를 세웠습니다. 바나바와 사울 외에 시므온(Simeon)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니게르(Niger)’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말로 하면 ‘the black man(피부색이 검은 사람)’이라는 별명입니다. 이로 보아 시므온은 아프리카 사람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 구레네(Cyrene) 출신 루기오(Lucius)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레네가 지금의 리비아에 속한 도시인 것을 감안하면, 루기오도 아프리카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구레네에서 살다 온 유대인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나엔(Manae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이하게 마나엔은 헤롯 안티파스(King Herod Antipas)와 어렸을 때 친구라고 합니다.

이 지도자들은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일년 동안 집중적으로 양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리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양육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연장자 순서로 세우거나 경험이 많은 순서 대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 중에서 세워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양육으로 만들어집니다.

여러분, 서론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세요. “왜,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이렇게 안디옥 교회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가 안디옥 교회를 통해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안디옥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대략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동서 문화가 교차되는 요충지에 있는 안디옥 교회를 이방인 선교의 본부((headquarter)로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안디옥에 수많은 인종들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보스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문화적으로나 도시의 구성원에서나 보스턴과 안디옥은 참 많이 닮았습니다. 보스턴은 수많은 인종들이 함께 사는 다문화, 다인종 도시입니다. 보스턴처럼 각 나라의 문화를 존중해가면서 함께 살아가는 도시가 흔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교회가 위치한 케임브리지는 다인종 도시의 모델과 같은 도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스턴은 하나님의 선교적인 마인드를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최고의 도시입니다. 요즘에 와서 ‘다인종 교회(multi-ethnic church)’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세워진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는 이미 ‘다인종교회’였습니다. 저는 보스턴에서 목회하면서 한국교회라는 담(barriers)을 넘지 못했습니다. 제가 못 넘은 이 담을 이제 다음 세대인 여러분들이 뛰어 넘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안디옥 교회에 다양한 배경을 가진 다섯 명의 지도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지도자로 세운 것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들은 모두 이방인들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추진하려고 하면 먼저 지도자들의 마음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다섯 명의 지도들 중에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사도행전 9:15에 이런 말씀이 있었잖아요? “사울은 이방 사람들에게 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선택한 나의 도구이다(Saul is my chosen instrument to take my message to the Gentiles).” 이제 바야흐로 이방인 선교를 위해 사울을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열심)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는 것은 사도행전을 읽는 큰 재미입니다.

셋째로, 안디옥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 분명한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절) 예배와 금식과 성령의 음성이 있습니다. 4절 말씀에는 금식이라는 말과 기도라는 말이 같이 나옵니다. 예배와 금식과 기도는 모두 교회의 정체성을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입니다. 예배는 신자들이 같은 자리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 예배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예배를 소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배가 매주 규칙적으로 열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예배를 소홀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이번 주에 예배를 못 드리면 다음 주에 드리면 되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또 금식(禁食, fasting)과 기도가 있습니다. 금식은 밥을 안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밥을 안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금식을 하는 이유와 목적이 중요합니다. 금식은 식사를 끊음으로써 더욱 영적으로 민감(敏感)해지고,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안디옥 교회가 예배에 집중하고 금식할 때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성령의 음성(a voice of the Holy Spirit)’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을 시작하고, 성경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성령의 음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나도 성령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답답하고,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모를 때,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성령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의 음성’은 우리에게 희생(sacrifice)을 요구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얻은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음성’ 혹은 ‘성령의 음성’은 반드시 우리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 말은 나의 희생이 동반(同伴)되지 않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음성을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넷째로, 그러면, 안디옥 교회가 들은 ‘성령의 음성’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내가 그들에게 맡긴 일을 하게 하여라.” (2절) 이 ‘성령의 음성’ 속에 희생이 들어 있습니까? “One day as these men were worshiping the Lord and fasting, the Holy Spirit said ‘Dedicate Barnabas and Saul for the special work to which I have called them.’” (New Living Translation) “While they were worshiping the Lord and fasting, the Holy Spirit said, ‘Set apart for me Barnabas and Saul for the work to which I have called them.’” (NIV) ‘set apart’라는 말은 바나바와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시킬 수 있도록 따로 세우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을 더 이상 너희 교회에 머물게 하지 말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방인 선교를 위해 내 놓으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읽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를 향한 ‘성령의 음성’은 안디옥 교회에 사람들이 더 많이 들어오고, 안디옥 교회가 더욱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시킬 수 있도록 두 사람을 ‘set apart’하라는 것이 안디옥 교회가 들은 ‘성령의 음성’이었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안디옥 교회에 다섯 명의 지도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 지도자들 중에서 바나바와 사울은 가장 핵심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만약 두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번에 지도자들의 팀웍이 무너지고 지도력에 큰 공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것을 알았지만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성령의 음성’은 반드시 우리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시나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성령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시나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희생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뿐만 아니라 제자의 삶 자체가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If any of you wants to be my follower, you must turn from your selfish ways, take up your cross daily, and follow me).” (누가복음 9:23)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합니다. 매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 생각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고,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진정한 교회의 모델과 같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를 운영하고 계신 분은 성령님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서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을 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 대로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outpost)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흩으셔서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를 통해 안디옥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7/25/2021 | 바나바와 사울

부활절이 지나고(14)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9:26-31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사울(Saul)’이라는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기록했습니다. 사울은 나중에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13: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바울이라고도 부르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Saul, also known as Paul, wa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이 말씀부터 사울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쓰지 않고 바울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유대인들의 이름에는 뜻이 있습니다. ‘사울’은 ‘asked for(묻다)’ ‘questioned for’ ‘prayed for’라는 뜻이 있습니다. 반면에, ‘바울’이라는 이름에는 ‘small(작은)’ ‘humble(겸손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실제로 회심 후에 바울은 자기 자신을 항상 겸손하게 낮췄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조산아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입니다. 나는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8-10) 이 말씀에서 ‘조산아(早産兒)’라는 말은 ‘제 때 나오지 않은 아이(one untimely born)’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말을 자기 자신을 낮추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사울은 극적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가 예수님이 살아있을 때 만났다는 어떤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사울이 동시대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의 말 대로 그는 같은 또래 유대인들보다 더 열심히 유대교를 믿었습니다(갈라디아서 1:14). 그는 유대교 외에 다른 진리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울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혈통으로는 ‘히브리인 중에서도 히브리인’이었고, 신앙적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조건을 많이 갖춘 사람이었습니다(빌립보서 3:4). 그는 부모를 잘 둔 덕분에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2:28). 그리고, 그는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어는 물론이고, 아람어, 그리스어, 로마 말을 자유롭게 사용했습니다(사도행전 21:37). 그의 스승은 ‘가말리엘(Gamaliel)’이라는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랍비였습니다(사도행전 22:3).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사울을 가르친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상당히 소신이 있고, 진취적이고, 열린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유대 공의회가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심문할 때, 이 사람들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실 수도 있다고 혼자 소신 발언을 했습니다. 저는 사울이 이런 스승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심 후에 사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I once thought these things were valuable, but now I consider them worthless because of what Christ has done).” (빌립보서 3:7)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특권들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그의 성공을 보장해 주리라고 믿었던 것들을 ‘worthless rubbish(가치 없는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모두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일어난 변화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힘들어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번 사울을 보세요. 그가 버렸다고 말하는 로마의 시민권은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되었는지 모릅니다. 그가 모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었던 그리스어나 로마말은 그가 위험에 처해 있었을 때 그의 목숨을 구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가말리엘 문하(門下)에서 공부했던 학문적인 성취는 그가 쓴 편지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같은 성경은 얼마나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전개됩니까? 그가 버렸다고 했던 것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전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필요했던 것들이었지만, 회심 후에는 이것들이 복음을 위해서 필요한 도구들이 되었습니다. 목적이 바뀌고, 우선 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사울이 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이야기는 사도행전 9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서 시리아의 다메섹(Damascus)으로 가는 도중에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사울은 회심하자마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밖에 나가서 전파했습니다. 사람들은 사울의 회심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피했습니다. 회심을 해서 마음에는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하나님은 ‘요셉’이라는 사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요셉은 ‘바나바(Barnabas)’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사람입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에는 ‘위로의 아들(Son of Encouragement)’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 꼭 이름처럼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름의 뜻에서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바나바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Barnabas was a good man, full of the Holy Spirit and strong in faith).” (사도행전 11:24) 대부분의 성경들이 바나바를 가리켜 “Barnabas was a good man”이라고 했는데, GOD'S WORD® Translation에 보면 “Barnabas was a dependable man(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믿음이 좋다는 사람 중에 “He is a good man” 혹은 “He is a dependable man”이라는 평을 듣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은 좋은데 평이 안 좋은 경우가 많고, 믿음은 좋은 것 같은데 어딘지 가까이하기에는 먼 사람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착하고, 신뢰할 수 있고, 믿음이 좋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 바나바를 사울을 위해서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바나바는 신자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울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사울의 회심이 진실하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울의 회심을 믿지 않았을 때, 바나나가 사울의 회심을 보증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좋은 사람이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고, 믿음이 좋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사울을 위해서 이런 바나바라는 사람을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잘 배우고, 주변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면 언젠가는 이것이 하나님을 위해 쓰임을 받는 날이 꼭 올 것입니다.

언젠가 사울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For Christ's love compels me., 고린도후서 5:14)”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빚을 진 사울은 예루살렘을 돌아다니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스데반과 마찬가지로 그의 설교를 듣고 분노한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사울을 그의 고향 다소(Tarsus)로 피신을 시켰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당장에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고향에 숨어 지내야 합니까? 그의 마음 속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불타고 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은둔 생활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다시 바나바로 하여금 다소에 있는 사울을 불러내게 하십니다. 바나바는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사울을 데리고 시리아의 ‘안디옥(Antioch)’으로 갔습니다(사도행전 11:25) 사울의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하나님은 바나바를 보내서 사울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때로 우리의 앞길이 절망적이고 막막한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바나바’를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의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We can make our own plans, but the Lord gives the right answer).” (잠언 16:1)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길을 어떻게 인도하시는 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인생의 위기 때마다 바나바를 보내셨다는 말씀이 은혜가 됩니다. 바나바는 그 때 안디옥 교회의 실태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안디옥에 박해를 피해 피난 온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그들은 유대인들을 찾아 다니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정체 불명의 크리스천들이 안디옥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구브로(Cyprus)와 구레네(Cyrene) 출신 사람들이라는 것 밖에는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방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전해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로 보내 실태를 조사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와 아무 상관없을 것 같은 이 이야기가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련된 일인 것을 알게 되면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납니다. 맞습니까? 만일 그 때 바나바가 조사원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때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교회 문을 닫았더라면, 오늘 우리의 구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 바나바의 눈에 비친 안디옥 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사도행전 11:23).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동역자를 찾았습니다. 그 때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고향 다소에 내려가 있는 사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다소로 가서 사울을 데리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교회를 1년 간 섬겼습니다. 그 1년이라는 기간이 중요한 이유는 이 때 ‘크리스천(Christians)’이라는 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사도행전 11:26에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 신자들이 우리는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크리스천들이다!” 하고 이름을 붙여준 것입니다.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때 안디옥 교회 신자들은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배우고, 실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략(The Divine Conspiracy)’이라는 책을 쓴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희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게 하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주께서 명하신 바를 실천하는 길을 열어 줄 복음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윌라드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복음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은 올바른 크리스천으로서 살게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또 누가 한 말인지 한번 맞춰 보십시오. “Jesus, a man who was completely innocent, offered himself as a sacrifice for the good of others, including his enemies, and became the ransom of the world. It was a perfect act(예수님은 완전히 결백한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심지어 원수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사람이다. 그는 세상을 위한 대속물이 되었다. 그것은 완전한 행위였다.” 마하드마 간디 (Mahatma Gandhi, 1869-1948, 인도)의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찬양했던 간디가 크리스천들에 대하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I do not like your Christians. Your Christians are so unlike your Christ(나는 당신들 크리스천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믿는 그리스도와 너무 다르다).”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천들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마다 사도행전 말씀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세상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달라스 윌라드의 말처럼 성경을 펴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새롭게 읽고 배우고,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천’이 됩니다. 그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7/18/2021 |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다

부활절이 지나고(13)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8:1-4

성령 강림 후 이 땅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생기고, 신자들의 수가 날마다 늘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은 일은 예루살렘 시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었습니다. 누가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도행전 9:31) 교회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성령의 위로하심이 있었고, 누구나 성령께서 이 공동체 안에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갈릴리와 사마리아에도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교회마다 평안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평안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폭풍전야(暴風前夜)’라는 말이 있습니다. 엄청난 폭풍이 불기 전 날 밤이라는 뜻입니다. 그 전날 밤까지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 엄청난 폭풍이 불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폭풍전야’를 영어로 ‘the calm before the storm’이라고 한다고 하네요. 아주 적절한 말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A great wave of persecution began that day, sweeping over the church in Jerusalem)(1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그 날’이란 스데반(Stephen)이 돌에 맞아 죽은 날을 말합니다. 유대인들, 특히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호시탐탐 교회를 박해할 명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스데반의 설교가 유대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교회를 박해할 명분(名分)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의 무모함을 탓해야 할까요? 스데반은 자기가 맡은 구제 사역이나 열심히 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밖에 나가서 설교를 하다가 화를 자초하게 되었을까요? 한 사람의 무모함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습니다.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도들 외에는 모두 박해를 피해 흩어졌다고 했습니다. 겨우 만들어진 신앙공공체가 이렇게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울(Saul)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Saul was one of the witnesses, and he agreed completely with the killing of Stephen). 사울은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똑 같은 시각(視角)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보기에 스데반은 당연히 제거되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사울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똑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요. 사울은 그 때 그가 교회를 박해했던 일들을 두고두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간증합니다. “한때는 저 역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고 확신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예루살렘에서 했던 일이 그런 일이었습니다. 저는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일에 찬성했습니다.” (사도행전 26:9-10)

사울은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울의 인생에 대하여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사울은 교회를 박해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사울에 대하여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 사도행전 9:15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울은 이방 사람들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Saul is my chosen instrument to take my message to the Gentiles).”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삶에 대해서도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실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여러분의 삶을 반성해 보십시오.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다시 순교자 스데반에 대하여 생각해 볼까요? 얼핏 보기에는 스데반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박해의 명분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스데반의 설교가 아니었더라도 유대교 지도자들은 또 다른 박해의 명분을 찾았을 것입니다. 어차피 교회는 박해를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께서 교회를 운영하고 계시다면 교회에 아무 문제가 없고 평안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교회를 흩으려고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언제까지 평안을 누리며 한데 뭉쳐 있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흩을 수 있는 방법이 박해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교회를 파괴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유대교 지도자들을 사용하여 교회를 흩으신 것입니다.

몇 주 전에 ‘합킨톤 공원’에서 야외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 제가 설교 본문 말씀이 시편 95편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여호와는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위대한 왕이십니다. 땅의 가장 깊은 곳도 그분의 것이며, 가장 높은 산들도 그분의 것입니다. 바다도 그분의 것입니다. 이는 주가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손으로 마른 땅도 지으셨습니다. 다 와서 엎드려 주를 경배합시다.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3-6절) 저는 이 말씀을 읽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바다도 하나님이 지으셨고, 마른 땅도 하나님께서 지으셨구나!” ‘마른 땅’은 ‘dry land’를 말합니다. 어떤 번역 성경에는 ‘황무지(the wastelands)’라고 나와 있습니다. 떨기나무(bush) 같은 것만 겨우 살 수 있는 황폐한 땅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마른 땅’을 만드셨을까요? ‘마른 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쓸 데 없이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에 쓸 데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들어보셨지요? “내가 빛을 만들고 어둠을 창조하였다. 나는 평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재앙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한다(I create the light and make the darkness. I send good times and bad times. I, the Lord, am the one who does these things)(이사야 45:7).” 빛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왜 어둠이 있어야 합니까? 평화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왜 재앙이 있어야 합니까? 좋은 일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왜 절망이 있어야 하고 불행이 있어야 합니까? 그런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application과 implication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을 읽고 application(적용)을 잘 해야 하지만, implication을 잘 찾아야 합니다. 그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와 원리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사야 45장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함축적인 의미(implication)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삶 속에 관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무의미한 일이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힘든 일이 있습니까? 절망적인 일이 있습니까? 그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가 받은 박해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는 당시에는 아무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서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안디옥(Antioch in Syria)을 비롯한 지중해 연안으로 피신했습니다. 여기서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8)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은 교회를 흩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끝까지 나가 복음의 증인들로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워낙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의 연대감(solidarity)이 강했기 때문에 박해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신자들을 흩어지게 할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크리스천들을 찾아내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충실했지만, 그가 했던 일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 신자들 사이에서 사울이라는 이름은 악명(惡名)이 높았습니다. 다메섹(Damascus)에 살고 있던 아나니아(Ananias)라는 주님의 제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9:13) 워낙 신자들 사이에 사울의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나중에 사울이 회심했다는 소식을 들은 신자들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9:21). 

여러분, 이런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는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사울은 평생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빚을 지고 살았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입니다. 나는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므로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않습니다(But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and His grace toward me did not prove vain).” (고린도전서 15:9-10)

마지막으로, 4절 말씀을 보십시오. “흩어진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But the believers who were scattered preached the Good News about Jesus wherever they went).” 교회는 언제까지 평안을 누리면서 함께 공동체의 삶을 누리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이 공동체를 흩어지게 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The Gathered and Scattered Church(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선교 신학자 호켄다이크(Johannes Christiaan Hoekendijk, 1912-1975)가 ‘The Church Inside Out’이라는 그의 책에서 처음 쓴 말입니다. 이 책의 제목을 직역하면 ‘뒤집어지는 교회’입니다. 이 책이 1966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교회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책이 1979년에 우리나라에 ‘흩어지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호켄다이크가 이 책을 출판된 지 13년이 지난 후에 출판된 것입니다. 호켄다이크는 이 책에서 기존의 교회에 대한 개념이 뒤집어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gathered church(모이는 교회)’에 있지 않고 ‘scattered church (흩어지는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모이는 것은 흩어지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 드리고,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서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연대감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흩어져서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말씀을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호켄다이크가 말하는 ‘사도적인 교회(the apostolic church)’ 다시 말하면 ‘흩어지는 교회’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Ite, missa est(이테, 미사 에스트).” 카톨릭 교회에서 미사를 마친 후에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 하는 말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Go, you have been dismissed”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히 미사가 끝났다는 말이 아니라 “Go, it is the sending [dismissal]!”이라는 뜻입니다. 미사는 끝이 났지만, 이제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내보낸다는 말입니다. 사제가 이렇게 말하면 신자들은 “Deo gratias (Thanks be to God)!”라고 화답합니다. 나를 복음의 증인으로 보내주심을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2,000년 전에 하나님은 박해를 통해 교회를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너무 드라마틱합니다.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해서도 똑 같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는 ‘모이는 교회’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모이는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 예배 드리는 이유는 흩어져 복음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