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2021 | 야외예배

우리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 We Are The Flock Under His Care

시편 95:1-7

거의 일 년 반 만에 이렇게 야외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날씨가 좀 덥기는 하지만, 그래도 싱그러운 공기를 마시니까 숨이 트이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맞은편 나무 숲에서 모였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나무를 모두 베어버려서 좀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그렇게 큰 아름드리 나무들을 키우려면 100년도 넘게 걸릴 텐데 왜 모두 베어버렸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시편 95편 말씀입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이 시편도 다윗이 썼을 것 같은데, 다윗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록 무명의 저자이지만, 이 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가 쓴 시편 한 절 한 절 속에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이 배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쉽게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실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서기 51년경, 사도 바울이 그리스의 아테네에 가서 설교할 때, 그는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그분은 온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하늘과 땅의 주님이십니다.....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으로부터 세계 모든 인류를 만들어 땅 위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 시대와 지역의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24-28)

바울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지으신 분이라고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와 상관없이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직접 관계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exist., 28절)” 셋째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관계하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시편을 쓴 사미스트(저자)는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1절).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5:19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이야기하며,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찬송하십시오(Speak to one another with psalms, hymns and spiritual songs. Sing and make music in your heart to the Lord).”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서로서로 옆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인정의 마음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들이 너무 감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시편 100편에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Enter his gates with thanksgiving; go into his courts with praise)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은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의 대문을 열어야 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뜰(courts)을 밟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갖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미스트는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6절)”고 합니다. 우리가 성숙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오랫동안 목회하고 설교하면서 얻은 결론은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내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 이것만 제대로 알면 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 잘 알고 지키면 충분합니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감동적인 영상(https://youtu.be/Fe-6SRwMdWs)을 보았습니다. 2018년에 제작한 이 영상에 고양이 한 마리가 한 남자의 어깨 위에 올라가 얼굴에 몸을 비비며 애교를 부리고 있고, 이 남자는 고양이의 행동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남자는 미국 캘리포니아 페어뷰 밸리(Fairview Valley)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라이언 콜먼(Ryan Coleman)이라는 사람입니다. 콜먼은 2018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 진화 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이 화재로 80명이 숨졌고, 건물, 가옥 1만1천여 채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산불 진화를 위해 현장에 투입된 콜먼은 우연히 불길에 갇혀 있는 고양이 한 마리를 구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고양이는 자신을 구해준 콜먼 곁을 떠나지 않고 그의 목에 올라타서 온몸으로 고마움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화재 현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이 고양이는 줄곧 콜먼을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콜먼은 이 동영상을 찍어 자기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무려 170만 번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했고, 약 33,000명이 이 동영상을 공유했다고 합니다. 자기 생명을 구해 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이 고양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소도 제 주인을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의 여물통을 알지만, 이스라엘은 제 주인을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Even an ox knows its owner, and a donkey recognizes its master’s care - but Israel doesn’t know its master. My people don’t recognize my care for them.” (이사야 1:3)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지으셨고, 지금도 나의 삶을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삶의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그 목적은 나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런 삶을 통해서 삶의 의미(意味)를 발견합니다. 

둘째로, 사미스트는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이며 그분이 기르시는 양 떼들입니다(7절)”라고 고백합니다. 이 사미스트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잘 아는 다윗 역시 탁월한 사미스트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 다윗이 쓴 시편이 무려 73편이나 있습니다. 시편 전체가 150편이니까 거의 절반에 가까운 시편을 다윗이 쓴 것입니다. 참 대단합니다. 다윗 역시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1-2절) 예수님도 자신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 (요한복음 10:10) 

7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볼까요?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이며, 그분이 기르시는 앙떼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장을 떠나서는 살 수 없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내 멋 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목장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장에서 풀을 뜯고, 하나님의 목장에서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내 힘으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를 기르시는 목자가 계십니다. 우리는 그 목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극성을 부리던 코로나바이러스가 이제 좀 잡혀가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은 계속해서 경고를 하고 있지만, 점점 일상을 회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매스크를 쓰지 않고 돌아다니고, 레스토랑에 가도 제법 사람들이 북적거립니다. 우리 교회도 다음 주부터는 사전 등록을 하지 않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매스크를 쓰고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 다과도 9월부터나 시작하려고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우리가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신앙적으로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깨달았습니다. 과학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21세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 30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18년 스페인 독감 때는 최소 5,000만명에서 최대 1억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불과 100년 전의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학이 발달했고, 인간의 지식이 확장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팬데믹으로 여전히 인간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시편 95편 오늘 본문 말씀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십시오(7절)”라는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어에 ‘쉐마(shema)’라는 말이 있습니다. ‘듣는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hear’입니다. 그런데 ‘쉐마’라는 히브리 말에는 ‘hear and do or obeying(듣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 번역된 영어 성경에서는 ‘쉐마’를 ‘listen’이라는 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단한 존재들이 아니라,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붙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Yes,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Those who remain in me, and I in them, will produce much fruit. For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NLT).” (요한복음 15:5) 예수님은 말씀을 하시고 마지막에 “귀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깨닫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이 축복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준 선물입니다. 오늘 이 야외예배가 이 축복을 기뻐하고 같이 나누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6/20/2021 | 최초의 신앙 공동체

부활절이 지나고(10)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2:40-47

지난 두 주에 걸쳐 ‘성령의 사역’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보혜사’, ‘파라클레이토스(παράκλητος)’라는 말입니다. 항상 우리 ‘곁에서(be¬side)’ ‘Advocate(편을 들어주는 자)’ ‘Comforter(위로를 주는 자)’ ‘Encourager(격려하는 자)’ ‘Counselor(조언을 해 주는 자)’ ‘Helper(도와주는 자)’ ‘Strengthener(능력을 주는 자), ‘Intercessor(중보자)’로 일하고 계십니다. 신자의 삶은 의지할 곳 없이 세상에 버려진 ‘고아’와 같은 삶이 아니라 항상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함께 계시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in us)’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17). 

문제는 어떻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느끼고 알아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을 ‘성령의 내적인 음성(the inner voice of the holy Spirit)’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바울 곁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를 내라. 너는 로마에서 나를 증거할 사람이다(사도행전 23:11)”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이 바로 ‘성령의 내적인 음성’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내적인 음성’을 듣는 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합니다.”(로마서 8:16) ‘우리의 영과 함께’라는 말은 ‘with our spirit’ 혹은 ‘together with our spirit’이라는 말입니다. Douay-Rheims Bible에 이 말이 “For the Spirit himself gives testimony to our spirit, that we are the sons of God”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라는 말은 쉽게 ‘우리의 마음’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생각을 불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내적인 음성’입니다.

백년전쟁의 영웅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가 전쟁에 참가하게 된 것은 13살 때 들은 하나님의 음성 때문이었습니다. 저녁종이 울릴 무렵, 집 앞에 있는 마을교회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밝은 빛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후 프랑스의 위기가 깊어 가면서 그 음성들이 더 자주 들려왔고, 열 여섯 살 되던 때에는 구체적으로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잔 다르크’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사실인지를 검증하는 심문이 열렸습니다. 한 심문관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원하시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데 왜 굳이 너를 보내 병력을 요구하시는 것이냐?” 그러자 ‘잔 다르크’는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전투는 프랑스의 아들들이 치르지만 승리는 그분께서 주실 것입니다” 하고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잔 다르크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결국 영국 군에게 체포됩니다. 감옥을 지키는 영국군의 간수가 넌지시 ‘잔 다르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텐데, 너에게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이유가 무엇이냐?” 이 말에 ‘잔 다르크’는 “당신은 한번이라도 저녁 때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한 적이 있느냐?” 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여러분은 오늘 본문 말씀을 읽고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보세요. “믿는 사람들은 다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재산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사도행전 2:44-45) 또 사도행전 4:32, 3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믿는 사람들의 무리가 다 한마음과 한 정신으로,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썼습니다. 그들 중에 부족한 것이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또 “이건 공산주의 사상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共産主義, communism)’는 사회 통제를 통하여 사유 재산을 금지하고 생산수단을 공동 소유한다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주장한 사상입니다. ‘공산주의’의 핵심 주장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것입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독일)’과 그와 동시대 사람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 독일)’의 영향을 받아 역사는 계급투쟁을 통해 발전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투쟁은 지배 계급인 ‘부르주아(bourgeois)’와 피지배 계급인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와의 투쟁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데, ‘자본주의’ 사회는 이 투쟁 과정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하게 되어 멸망하고 그 자리에 ‘사회주의’ 체제가 등장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적(過渡期的)인 경제 체제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유대인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유대교 랍비였고, 아버지는 루터교로 개종한 변호사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자유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고, ‘카를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자유적인 사고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처음에는 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는데, ‘마르크스’가 법학 외에 다른 학문에 관심을 보이자 아버지는 그를 베를린 대학으로 전학시켰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베를린 대학에서도 법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역사, 경제, 사회학으로 관심을 돌리게 됩니다. 베를린 대학은 ‘헤겔(Hegel)’이 오랫동안 교수로 있던 곳이어서 ‘마르크스’는 여기서 헤겔의 변증법척 사고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카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사상의 아이디어를 성경 사도행전에서 얻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연히 종교적인 면에서도 유대교에서 루터교회로 개종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유대인이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렇다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는다”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자기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공동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최초의 신앙공동체에 대한 반응은 “어? 이건 말도 안 돼. 이런 게 어디 있어?” 이런 반응과 “어?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고? 이건 공산주의 사상 아니야?” 이런 반응입니다. 충분히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최초의 신앙공동체의 형성 과정을 보면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됩니다. 그리고, 외견상 이 공동체가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설교를 사용하셔서 듣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을 붙잡고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형제들이여,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Brothers, what should we do)?” (사도행전 2:37)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며,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사도행전 2:38-39)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날 베드로의 설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모두 세례를 받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날, 믿은 사람의 수는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출현하게 된 배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공동체에 대한 말씀을 읽으면서 시편133편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See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and sisters live together in harmony)!”(GOD'S WORD® Translation) 순례자들이 예배드리기 위하여 성소에 올라가면서 불렀던 다윗이 지은 시편(노래)입니다. 이 노래 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면서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는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 공동체의 출현에 대하여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들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그 중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자기 땅을 판 돈에서 얼마를 떼어 몰래 숨겨 놓고, 나머지만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그의 아내 ‘삽비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성령을 속이고 땅을 팔아 받은 돈 가운데 얼마를 떼어 놓았소? 그 땅은 그대의 것이었고, 판 뒤에도 그 돈을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았소? 그런데 어찌하여 성령을 속일 마음을 먹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오(You lied to the Holy Spirit..... You weren't lying to us but to God)”(사도행전 5:3-4) 결국 성령을 속인 일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죽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을 갖게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신앙공동체 운동이 순전히 자발적으로, 성령께서 주도(主導)하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은 공동의 이익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Now to each one the manifestation of the Spirit is given for the common good).”(고린도전서 12:7)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사역 중의 하나가 ‘공동(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 이런 게 어디 있어?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한다고? 그리고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준다고? 이거 공산주의 사상 아니야?” 맞습니다. 성령께서 일하시지 않고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공동체의 모습이 공산주의에서 추구하는 공동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달라요. 공산주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상적인 경제 사상일 뿐입니다. 오늘날 공산주의는 멸망했습니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인간의 죄성, 인간의 욕심과 탐욕을 간과(看過)하고 그것을 물리적인 힘으로 통제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공동체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실패합니다.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사람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도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우리를 거듭하게 하시기 전에는 어떤 공동체 실험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무리가 다 한마음과 한 정신으로,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썼습니다.”(사도행전 4:32) “집집마다 돌아가며 함께 모여 기쁘고 순수한 마음으로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였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늘어나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 2:46-47)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교제가 있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음식을 같이 나누고 주님의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힘썼습니다. 모일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의 칭찬이 잇달았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사도행전 9:31)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the church throughout Judea and Galilee and Samaria enjoyed peace [without persecution], being built up [in wisdom, virtue, and faith]; and walking in the fear of the Lord and in the comfort and encouragement of the Holy Spirit, it continued to grow [in numbers].”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고린도전서 말씀만 읽어 보더라도 교회 안에 벌써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 아름다운 공동체가 사라지게 되었는지,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케임브리지 교회 공동체가 사도행전에서 보여준 최초의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해서 우리 속에 있는 탐욕과 이기심을 이겨내고, ‘공동의 선(the common good)’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6/13/2021 | 성령의 사역(2)

부활절이 지나고(9) After Jesus’ Resurrection

요한복음 14:12-21

성령이 누구인지 제 나름대로 정의를 내려 보았습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중 셋째 위(位)에 계신 분으로 신자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혹시 여러분 이런 말씀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대로,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다.” (요한복음 7:37-38) 이 말씀에 ‘목마르다’는 말과 ‘생수의 강’이라는 말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의 수가 성에 사는 한 여자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여자의 이름은 ‘오르파(Orpha)’라고 합니다.  ‘오르파’는 예수님에게 ‘생수’를 달라고 합니다. 저는 ‘오르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르파’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리를 찾아 방황하던 ‘어거스틴’이 한 때 문란한 생활을 했던 것처럼, 어쩌면 ‘오르파’도 진리를 찾아 방황했던 여자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르파’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 장소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오르파’는 더 나은 삶을 찾아 방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르파’는 그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에게서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이 마른 사람은 나에게 와서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이런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는 사람들이 장차 받을 성령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으시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아직은 성령이 계시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 7:39) 무슨 말씀인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읽어야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사람들로 하여금 ‘만족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My purpose is to give them a rich and satisfying life.”(요한복음 10:10) 이 말씀을 잘 읽어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저와 여러분이 목마르지 않는 만족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런 삶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또 하나 소개할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3:11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 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나를 증언하여야 한다.’” 비록 이 말씀에 성령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바울 곁에 서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2,000년 전에 제자들과 함께 사셨던 예수님께서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예수님은 고난 받는 신자들을 찾아 위로해 주십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한 일들보다 ‘더 큰 일들(even greater things than these in extent and outreach, Amplified Bible)’을 하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14: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더 넓게, 더 멀리 전파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을 ‘다른 보혜사(another Advocate)’를 보내 주시라고 구할 것이다(요한복음 14:16)”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2,000전에 이스라엘에 사셨던 역사적인 예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실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성령께서 오시면 성령은 영(spirit)이시니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It is best for you that I go away, because if I don't, the Advocate won't come. If I do go away, then I will send him to you., 요한복음 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이 말씀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최종 목적이 우리에게 보혜사를 보내 주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혜사에 대하여 무지(無知)하거나, 보혜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는 일을 무시하거나, 보혜사의 도움을 거절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 낯선 말입니다. ‘보혜사’는 ‘성령’의 다른 이름입니다. 한자로 ‘보전할 보(保)자’ ‘은혜 혜(惠)자’ ‘스승 사(師)자’를 씁니다. ‘우리를 지키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스승과 같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희랍어 원문에는 ‘파라클레이토스(παράκλητος)’라고 나와 있습니다. ‘파라’라는 말은 ‘옆에’ 혹은 ‘곁에’라는 말입니다. ‘클레이토스’라는 말은 ‘돕는 자’라는 말입니다. ‘파라클레이토스’는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파라클레이토스’라는 말이 ‘Advocate(편을 들어주는 자)’ ‘Comforter(위로를 주는 자)’ ‘Encourager(격려하는 자)’ ‘Counselor(조언을 해 주는 자)’ 이렇게 4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Helper(도와주는 자)’ 혹은 ‘Strengthener(능력을 주는 자), ‘Intercessor(중보자)’라는 말을 더 첨가할 수도 있습니다(Amplified Bible).

예수님은 “내가 떠나지만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고 다시 올 것이다(요한복음 14:18)”라고 하셨습니다. “I will not abandon you as orphans-I will come to you”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곁을 떠나셨지만 사실은 영원히 함께 계시기 위해서 떠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I will come to you”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모가 없고 의지할 곳이 없는 아이들을 ‘고아’라고 합니다’ 제자의 삶은 결코 ‘고아’와 같은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영이신 ‘파라클레이토스’와 함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 곁에서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상담해 주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힘을 주시고,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저는 가끔 드라이브를 하면서 모르는 길을 찾아갈 때 성령의 사역이 GPS와도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차 안에 달려 있는 GPS가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됩니까? 한 번도 안 가본 길도 GPS를 켜고 따라가면 불안하지 않습니다. 이젠 GPS가 많이 좋아져서 오류가 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갔다가 돌아올 때 ‘Go Home’ 바튼만 누르면 집에까지 걱정하지 않고 올 수 있습니다. 올 때 고속도로를 탈 수도 있고, 고속도로를 피해서 로컬 길로만 올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베드로전서 2:21)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남기신 발자국을 보게 하시고 그 발자국을 따라가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바로 ‘파라클레이토스’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생활을 내 마음 대로 하려고 하지 말고, ‘파라클레이토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1-32) 이 말씀을 잘 보세요. 이 말씀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일을 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He is the Holy Spirit, who leads into all truth. The world cannot receive him, because it isn't looking for him and doesn't recognize him. But you know him, because he lives with you now and later will be in you).”(요한복음 14:17) ‘파라클레이토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씀이 놀랍지 않습니까?

한번은 이사야 말씀을 읽다가 깜짝 놀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30:20-21에 있는 말씀인데요 “비록 주께서 너희에게 슬픔의 빵과 고통의 물을 주셨으나, 여호와께서 여전히 너희와 함께 계시며 너희를 가르치실 것이다. 너희가 직접 너희를 가르치시는 분을 뵙게 될 것이다. 너희가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잘못된 길로 가려 하면 뒤에서 ‘이 길이 옳은 길이니 이 길로 가거라’ 하는 소리가 너희 귀에 들릴 것이다.” 이 말씀의 배경을 모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사람은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 있을 때 잘못되기 쉽고, 유혹을 받기도 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럴 때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조언해 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믿음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해서 우리 곁에 계시는 분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고(요한복음 4:24),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하고(에베소서 6:18), 찬양도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s)’를 불러야 합니다.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이야기하며,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찬송하십시오.”(에베소서 5:19, 골로새서 3:16)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일은 ‘파라클레이토스’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서 해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고, 기도가 되고, 찬양이 되는지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의 내적인 음성(the inner voice of the Spirit)’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바울 곁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내라고 하신 주님의 음성이 바로 바울이 들었던 ‘성령의 내적인 음성’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합니다.”(로마서 8:16) ‘우리의 영과 함께’ 라는 말은 ‘with our spirit’ 혹은 ‘together with our spirit’라는 말입니다. Douay-Rheims Bible에 이 말이 “For the Spirit himself gives testimony to our spirit, that we are the sons of God”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라는 말은 쉽게 ‘우리의 마음’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생각을 불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내적인 음성’입니다.

어느 눈이 많이 온 날이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어둑어둑한 때였습니다. 그날 따라 여기저기 삽을 들고 나와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때 어디를 가야 할 일이 생겨 차를 빼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뒷바퀴가 헛돌고 미끄러지면서 차가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지 웬 키 큰 사람이 삽을 들고 제 차 옆에 바싹 서 있는 것입니다. 저는 차 안에서 차를 빼려고 낑낑거리고 있었고, 그 사람은 제 차 옆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경이 쓰이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창문을 열고 “What do you want? Why are you standing here?” 그랬더니 그 사람이 “I want to help you”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제 차가 헛바퀴를 돌면서 빠지지 않는 것을 보고 나를 도와주려고 그렇게 서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의 도움으로 차를 뺐고 저는 여러 번 고맙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성령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다가 문득 그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파라클레이토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돕기 위하여 우리 곁에, 우리 속에 계시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내 힘으로 믿음생활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도움을 거절하고, 무시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대한 지식이 부족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즐겁습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힘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믿음생활 하고 있는지 여러분의 믿음생활을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6/6/2021 | 성령의 사역(1)

부활절이 지나고(8) After Jesus’ Resurrection

로마서 8:5-8

앞으로 두 주일에 걸쳐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성령의 사역(the works of the holy spirit)’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신자들의 삶 속에서 하시는 일을 말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쉬운 말로, 제가 이해하고 경험한 말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에 ‘성령’과 같은 말로 사용되는 다양한 말들이 있습니다. ‘영(The Spirit, 요한복음 3:6-8)’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고린도전서 3:16, 창세기 1:2)’ ‘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Christ, 로마서 8:9)’ ‘그리스도의 마음(The Mind of Christ, 고린도전서 2:16)’ ‘예수의 영(The Spirit of Jesus, 사도행전 16:7)’ ‘성결의 영(The Spirit of Holiness, 로마서 1:4)’ ‘약속의 영(The Spirit of Promise, 에베소서 1:13)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 요한복음 16:13)’ ‘생명의 영(The Spirit of Life, 로마서 8:2)’ 이런 말들이 모두 성령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말들입니다.

 

성령은 인격(人格, personality)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격이 있습니다. 날 때부터 타고납니다. 누구나 자기 인격이 존중을 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반대로 자기 인격이 무시를 당하면 불쾌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도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성령께서 근심을 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And do not bring sorrow to God's Holy Spirit by the way you live).” (에베소서 4:30) 또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절하게 중보기도를 하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로마서 8:26).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기쁨이 충만하여 말씀하셨습니다(At that same time Jesus was filled with the joy of the Holy Spirit).” (누가복음 10:21) 중요한 것은 성령을 단순히 ‘영’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격을 가진 분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격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가 예수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처럼, 성령을 ‘성령님’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격을 잘 이해하면 ‘성령충만(to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이라는 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 편견(偏見)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성령을 받으면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 중에 가정에 충실하지 않고 교회에서 사는 사람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사람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항상 흥분 상태에 있는 사람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성령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혹시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도 성령에 대하여 이런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령을 받으면 지극히 정상적인 크리스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오히려 성령에 대한 지식이 없고, 성령에 대한 경험이나 체험이 없이 교회 생활하는 사람들이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 말씀을 한번 보세요.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오래 참음과 자비와 착함과 성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지할 율법이 없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e Holy Spirit produces this kind of fruit in our lives: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gentleness, and self-control. There is no law against these things!” 이 말씀을 읽는 여러분들은 이 시간 이후로 성령에 대한 편견을 모두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 리스트에 나오는 9가지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맺는 열매’입니다. 이렇게 나와 있지요? “But the Holy Spirit produces this kind of fruit in our lives (하지만, 성령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런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맨 끝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There is no law against these things!” 무슨 말인가요? 이런 것들과 반대되는 그 어떤 율법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율법도 이 ‘성령의 열매’와 충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넓게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결국은 우리가 이런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우리 속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내 속에 ‘나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이 충만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요. 잘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성령의 열매’를 ‘the fruit of the Holy Spirit’라고 합니다. ‘fruits’라는 복수 형태를 쓰지 않고 ‘fruit’라고 단수 형태를 씁니다. 희랍어 원문에도 ‘카르포스(καρπὸς)’라는 단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결과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열매들입니까? 이런 사람에 대해서 누가 좋지 않은 편견을 갖겠습니까? 이런 사람에 대하여 누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겠습니까? 반대로, 누구나 이런 사람에게 호감(好感)을 갖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후로 성령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이 편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런 편견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성령께서 그 사람 속에 내주(內住, abide in)하실 수 있겠습니까? 위에서 성령은 인격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성령께서 자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과 어떻게 친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 다음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두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을 받지 않으면(혹은 성령을 체험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22 말씀인데요.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을 다 행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라는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13:14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a man after my own heart’라고 나와 있습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의도나 그의 의지나 그의 성향(inclination)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되었다는 뜻입니다. 참 보기 드문 케이스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도가 의지나 성향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거든요? 이 말이 잘 이해가 안 되는 분들은 지금 자기 자신을 한번 돌아보세요. 내가 의도하는 것들,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것들, 그리고 항상 내 생각이 향하고 있는 쪽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인지 한번 반성해 보세요.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반대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참 드문 케이스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윗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보인다고 하잖아요?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로마서 8:5-8에 있는 말씀입니다. “죄의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죄의 본성이 바라는 일을 생각하지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성령이 바라시는 일을 생각합니다. 죄의 본성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생각은 죽음이지만,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입니다. 죄의 본성이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죄의 본성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at's why those who are still under the control of their sinful nature can never please God(바로 그런 이유에서 여전히 죄의 본성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But those who are controlled by the Holy Spirit think about things that please the Spirit (하지만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the Spirit을 기쁘게 하는 일들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여기서 ‘the Spirit’은 ‘하나님의 영’ 곧 하나님을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누가 한 말인지 모르지만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였던 노자(Lao Tzu)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지금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은 지금 향하고 있는 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If you do not change direction, you may end up where you are heading).”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싶겠지만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믿음생활도 그렇습니다. 왜 믿음생활을 하는지 그 목적이 중요합니다. 그 목적이 잘못 설정이 되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 위로를 받는 것, 좋은 말씀을 듣는 것은 믿음생활에서 얻는 부수적인 유익은 될 수 있지만 목적은 아닙니다. 믿음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 요리 문답(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작성한 나라가 영국입니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107 문항으로 만들어진 소 요리 문답과, 196 문항으로 만들어진 ‘웨스트민스터 대 요리 문답(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을 완성하는데 1643-1648년까지 무려 5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1648년에 영국의 국회에 보고되어 승인을 얻었습니다. 그 요리 문답에 나오는 제1번 문항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What is the chief end of man)?” 라는 질문입니다. 그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 마음 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기 위해서 믿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죄의 본성(the sinful nature)’이 살아있는 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시도록(to be controlled by the Holy Spirit) 해야 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왜 꼭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성령을 받는 일을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욥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좀 열심이 있는 사람들 중에 성령을 받는 사람들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에 대하여 크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입장에서 제가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둘째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성령을 받았습니다(And we have received God's Spirit (not the world's spirit), so we can know the wonderful things God has freely given us).” (고린도전서 2:12) 어마무시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world’s spirit(세상의 영)’을 가지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 수 없다는 말씀 아닙니까? ‘세상의 영’이 무엇입니까? ‘죄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세상의 영’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가지고 사는 이상 은혜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We can know the wonderful things God has freely given us(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 왜 꼭 성령을 받아야 믿음생활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정상적인 믿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왜요? 지금도 좋은데요?”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믿음생활의 올바른 목적을 회복할 수 있고,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믿음생활의 진수(essence)를 맛볼 수 있습니다.”


5/30/2021 | 베드로의 설교

부활절이 지나고(7)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2:14-21

예수님의 말씀 중에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마태복음 9:17)”는 말씀이 있습니다. ‘새 술’은 발효하는 과정에서 개스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팽창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새 술’을 신축성이 적은 낡은 부대에 넣으면 ‘새 술’의 팽창력을 감당할 수 없어서 터지고 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새 술’과 같기 때문에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율법주의에 빠져 있거나, 전통에 얽매어 있거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거나,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사람은 낡은 부대와 같은 사람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열린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native languages(난 곳 방언)’을 하게 되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누가는 이 일에 대하여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는 대로(as the Holy Spirit gave them this ability) 자기들의 언어와 다른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했다(사도행전 2:4)”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보시오!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크신 일을 우리 말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습니다.”(사도행전 2:11)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요?” “이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한 것 같습니다(They’re drunk on new wine., Christian Standard Bible, 사도행전 2:13)”라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를 비롯한 열 한 제자가 일어나 군중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유대 사람들,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아침 9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사도행전 2:14-15) 베드로가 사도들을 대표해서 이렇게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내용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와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전과 비교해서 확실하게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보기와는 달리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이 되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일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그 때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두려움이 없는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예수님과 관계된 일을 조리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까도 말했지만, ‘갈릴리 사람(Galilean)’이었습니다. 이 말은 공부를 못한 무식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개념으로 해석하면,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사도행전 4:13에 있는 말씀입니다. “공의회 의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members of the council were amazed when they saw the boldness of Peter and John, for they could see that they were ordinary men with no special training in the Scriptures. They also recognized them as men who had been with Jesus.” 말씀을 잘 읽어야 합니다. 베드로를 위시해서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이렇게 용감한 사람들이 된 것은 단순히 겁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보여주었던 ‘the boldness(담대함)’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과 함께 생각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Your love for one another will prove to the world that you are my disciples.” (요한복음 13:34)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게 될 것이다” 이런 말씀 아닙니까?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면 그것이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세상에 증명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예배에 열심히 나가는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은 우리의 변화된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들이구나!”하고 알게 됩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베드로의 설교 내용을 분석해 볼까요? 첫째로, 베드로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내 남자 종들과 여자 종들에게까지 내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예언할 것이다.” 이 말씀은 요엘 2:28-32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요엘(Joel)은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요엘이 활동했던 시기를 바빌로니아 포로 시대이후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요엘이 활동했던 시기를 대략 BC 835-796년경 유다의 8대 왕 요아스가 왕으로 있던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유다 왕국이 BC 586년에 멸망했으니까 요엘이 활동했던 시대는 나라가 멸망의 징조를 보이고 있던 때라고 보면 됩니다.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이 내려서 우리 중에 아들 딸들이 예언하고, 청년들이 환상을 보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합니다.

 

청년들을 볼 때 안타까운 것은 청년들이 환상을 보지 못하고 모두 눈 앞에 있는 현실에만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청년들이 현실만 보고 있다는 말은 이 시대의 미래가 절망적이라는 뜻입니다. 맞습니까? 청년들이 현실에 집착하여 당장에 먹고 사는 문제, 생존의 문제, 직장의 문제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현실이 원망스럽습니다. 청년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바라보고, 지금보다 더 사람 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키우게 될 때, 역사는 발전하게 됩니다. 맞습니까? 제가 보기에 상상력을 키우는데 성경보다 더 좋은 책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상상력과 환상을 보게 하는 책 아닙니까?

 

참 신기한 것은 베드로를 비롯한 거기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갈릴리 사람들’이었잖아요? 그런데, 율법을 모르는 베드로가 어떻게 이렇게 자유자재로 요엘서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요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 나의 이름으로 보내실 진리의 성령이신 보혜사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며,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4:26) “내가 지금 너희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그 때가 되면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에게 일러준 말을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6:4) 간단히 말해서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이 생각난다는 말씀 아닙니까? 이 말씀은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예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베드로와 거기 모였던 사람들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음 주 설교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둘째로, 베드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얻는다(But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사도행전 2:21)”라고 설교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Call on the name of the Lord”라는 말입니다. 위급할 때, 도움이 필요할 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많이 들었던 말씀이고, 별 특별한 의미가 없는 평범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한 구절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로마서 3:21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없이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율법과 예언자들도 증언한 것입니다(But now God has shown us a way to be made right with him without keeping the requirements of the law, as was promised in the writings of Moses and the prophets long ago).” 예수님 이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길은 율법의 규정들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죄성(the sinful nature)’ 때문에 율법의 규정을 모두 지켜 구원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다른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 길이 바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길을 ‘A NEW AND LIFE-GIVING WAY(새로운 생명을 얻는 길, 히브리서 10:20)’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다윗의 시편(16:8-11)을 인용하면서 “God has shown us the way of life(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다, 사도행전 2:28)”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核心)입니다.

 

셋째로, 베드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사도행전 2:36)”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더 직설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주님(the author of life)’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사도행전 3:15).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Silence in the face of evil is itself evil: God will not hold us guiltless. Not to speak is to speak. Not to act is to act (악의 면전에서 침묵을 지키 것 자체가 악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하시지 않을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 자체가 말하는 것이며, 행동하지 않는 것 자체가 행동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일에 모두가 동조했던 사람들의 죄를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다”는 말로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저는 베드로의 설교를 읽으면서 성령께서 그 시간에 베드로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설교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 증거가 37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eter's words pierced their hearts, and they said to him and to the other apostles, ‘Brothers, what should we do(베드로의 설교가 그들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찔렸다”는 말 대신 “They were deeply troubled(Good News Translation)”라고 번역한 성경도 있고, “They were deeply upset(GODS WORD Translation)”라고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은 매우 괴로워했다” 또는 “그들은 매우 속이 상했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경을 읽거나, 아니면 설교를 듣는 중에 마음이 상했거나, 마음이 괴로웠거나 혹은 마음이 찔린 때가 있었습니까? 괜찮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의 마음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세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상하고, 괴로웠던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지체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하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며,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38).”

 

베드로의 말을 듣고 그날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 3,000명이었습니다.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 때 회개했던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되었습니다. 신자의 삶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회개 없이 신자의 삶을 시작하고, 죄를 용서받는 일 없이 신자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우리 중에 진실한 신자들이 많이 보이지 않습니까? 왜 우리 중에 크리스천으로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바울은 신자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아로마(the aroma of Christ)’가 난다고 했는데(고린도후서 2: 15), 왜 우리 중에 ‘크리스천의 아로마’를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십니다.